아마, 믿거나 말거나 정말로 있었던 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
-데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의 전설-
가요도, 재즈도, 클래식도 몰랐던 때가 있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외삼촌의 방에서 뒤섞인 채로 나를 향해 떨어졌던 테이프 더미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외삼촌은 음악과 영화 테잎들을 상자마다 가득 채워 쌓아 놓는 취미가 있었다. 게다가 분류도 정리도 하지 않고 집어 넣었는지라, 정리하려 들면 모든 상자를 다 열어야 했다. 그림책 한권 꺼내려 발돋움을 했던 여섯살의 나는 되려 그 상자 중 하나를 쏟아 버리고 말았다. 혼날까봐 두려웠던 나는 허겁지겁 상자 안에 널부러진 테이프들을 집어 넣었다. 다 집어 넣었지만 그 상자를 원래 있던 곳에 올려 놓을 수가 없어서 대충 한켠에 밀어 버리고, 나는 재빨리 증거 인멸을 위해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챙겨 방 안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 때, 방 한구석에 떨어져 있던 테이프 하나를 발견했다. 필름이 늘어지지도 않았고, 어디 한 구석 깨진 데 없는 테이프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호기심에, 나는 삼촌의 책상 위에 있던, 커다란 카세트로 테이프를 틀었다. 테이프에서는 흔히 듣던 동요도, 만화 주제가도 나오지 않았다. 테이프에서는 기이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뭔가 재미있거나 즐거운 음악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실망한 채 삼촌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그 때 들었던 음악이 라벨의 '어미 거위' 였다는 건,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돌아가신 삼촌의 짐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보면서 나는 외삼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말 한 마디 없었던, 속을 알 수 없었던 사람. 글과 그림을 기막히게 잘 쓰고 그리던 사람. 글을 쓰다가 외숙모와 결혼한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훌훌 하던 일을 털어 버리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던 사람. 뭘 잘못해도 그냥 감싸주기만 해서 외할머니한테 핀잔 듣기 일쑤였던 사람. 삼촌의 방에 쌓여 있던, 스무개가 넘는 상자들 속에는 수많은 테이프들과 책의 찢겨진 페이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혹시 외삼촌이 쓴 글이 남아 있을까 해서 한없이 뒤져 보았지만, 찾은 것이라곤 의미을 알 수 없는 메모들과 뒤섞인 테이프와 책들 뿐이었다.
데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 상표명과 연도로 이뤄진, 어디에도 말뚝 없는 이름. 삼촌은 가족을 사랑했지만, 외갓집에 올때마다 삼촌은 상자 중 하나를 꺼내 한없이 그 안을 뒤적거리곤 했다. 그 뒷모습에, 차마 달려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어쩌면 삼촌이 만약 나인틴 헌드레드의 이름을 알았다면, 그의 나인틴 이름을 부러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Welcome to the AMERICA, Please sit and sleep, have a nice california dream
산업 사회가 태동하고 양키 두들이 유행하던 그 때, 사람들은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노래했다. 미지의 갈색 땅 위로 아낌없이 쏟아지는 햇빛, 상큼한 향기를 내며 가지마다 가득 매달린 주홍빛 오렌지들, 그리고 돈 한푼 없는 사람도 모든 걸 쥘 수 있는 기회의 땅. 아메리칸 드림. 모든 사람들의 이상향인 셈이다.
늘 그랬다. 누군가가 늘 있었다. 이해하긴 힘들지만, 배에 탄 수천명 중에 부자와 가난한 이민들과 각양각색의 사람들 중에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항상 처음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냥 앉아 있다가, 혹은 뭘 먹거나 걸어다니다가 또는 바지를 고쳐 입다가도 순간 고개를 들거나 혹은 우연히 바다로 눈을 돌리다가 발견하곤 했다. 그럼 그대로 얼어붙어서 뛰는 심장을 억누른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 순간마다, 배에 타고 있는 우리에게 돌아서서 소리치곤 했다. 미국이다!
-' 피아니스트의 전설' 나레이션 中-
그러나 '피아니스트의 전설'에서 나오는 아메리카는 이상향과는 멀다. 영화 속 아메리카, 미국은 이제 과거의 미국과 맥스의 음악을 상실하게 된, 현대의 미국으로 나뉜다. 마치 용궁에 다녀온 사람의 세상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한 때 트럼펫 주자로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던 맥스가 그의 반쪽이었던 트럼펫을 파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며 죽어가는-속도의 세계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각자가 가치있는 다른 존재로 거듭나길 바랬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오페라 '라 보엠'을 현대판으로 각색한, 뮤지컬 '렌트'에서 에이즈 환자는 이렇게 말한다. '익숙해졌어요. 이 모든 공포에. 어차피 이 미국에는 공포들이 널려 있는 걸요.' 슬프고도 익살스런 말이다. 천재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젤리 롤은 그런 미국 에서 살아남은 '천재'였다. 사창가에서 절망적으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으로 두들겼던 피아노. 그래서 젤리 롤은 최고가 되어야 했다. 그런 젤리 롤에게 나인틴 헌드레드는 이질적인 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대지가 아니라 배에 처박혀 있는 피아니스트, 그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존재일 것이다. 그들의 대결은 필연적이고, 숙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젤리 롤의 연주는 일종의 합리 속의 비합리성이었다. 그는 모든 합리성의 세계, 미국에서 비합리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천재다. 그의 음악은 타들어가는 담배처럼 위태롭고 짧은 순간에도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는 일종의 '근대의 천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건방지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이기심과 기계적 움직임, 코카인처럼 날카로운 이성 속에서 살아 남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인틴 헌드레드는 다르다. 그는 잘난 척하지 않는다. 되려 젤리 롤의 연주에 찬사를 보낸다. 젤리 롤은 그런 나인틴 헌드레드를 쉬이 인정하지 못한다. 분류된 음악 체계 속에서도 재즈를 연주하는 젤리 롤.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 분류에 따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부터 가곡, 왈츠와 재즈까지. 그래서 젤리 롤의 부하들은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10개가 넘는 재즈를 섞어 연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10개를 섞는다는 것, 그게 가능할까. 그건 사실 재즈가 아니다. 재즈를 넘어선, 구분의 벽을 넘어선 거대한 음악이다. 칸트에게 진짜 예술은 진짜 자연이다. 칸트의 '천재'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사람'이자 '신의 대리인'이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자연' 속,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를 자신의 눈으로 받아 들이고 시작과 끝이 있는 피아노로 해석해 내는 천재다. 그는 젤리 롤과 달리 비합리성에서 합리성, 나름의 규칙을 선별해 내는 것이다. 젤리 롤은 칸트의 '천재'가 시대에 적응한 결과다. 근대의 천재와 자연의 천재, 둘은 이렇게 만나고 부딪친다.
그 둘이 맞부딪치는 건 그 둘 뿐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 맥스를 포함한 청중들은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대결에서 이기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러나 나인틴 헌드레드가 결심한 순간, 맥스와 관중들은 놀란다. 그들이 잊고 있던 자연의 위력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젤리 롤의 한계는 바로 '자연'을 우습게 여긴 결과였다. '자연'이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모든 '기회'들이 있었던 곳이었고,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대의 문물들에 눈이 멀어 자연을 외면했고, 신문 지면에 실리는 기사를 더 중요시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들이 꿈꾸던 캘리포니아 드림-아메리칸 드림은 일종의 허상에 불과하다. 발터 벤야민은 석화된 대상, 가만히 못박혀 있는 공장들과 대륙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실어다주고,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바다와 같은 유동하는 대상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젤리 롤과 나인틴 헌드레드의 대결은 새로운 '무언가'의 탄생, 그들은 그들이 꿈꾸던 곳. 그들이 꿈꾸던, 모든 사람들이 천재로 뒤바뀌는 곳,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때는 그 장소의 그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젤리 롤과 나인틴 헌드레드의 대결은 동시에 근대의 산업성과 자연이 좀처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젤리 롤은 지고 만다. 그의 과시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 과시성은 단순히 그 자신의 것은 아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사회의 성질이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젤리 롤의 도발을 듣는다.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사실 '대결'이란 없다. '합주'처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 나인틴 헌드레드의 자연은 젤리 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젤리 롤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젤리 롤은 패배자가 된다. 이는단순히 둘 사이 실력의 우위를 가르는 게 아니다. 사회성에 대한, 자연의 우위성. 그러나 이 우위성은 이내 바뀌고 만다.
지하실의 알레프
남미 작가 보르헤스의 '알렙'은 지하실에서 세계이자 세계의 중심인 '알렙'을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이 알렙은 유대교의 교리 기초라 할 수 있는 축소와 파괴, 통합 과정 중 하나인, 세계가 블랙홀같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축소와 닮았다. 사소한 점 하나가 세상이고, 세상이 하나의 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전설과 옛 이야기들에서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떠난다. 세상을 다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꿰뚫는 진리를. 그러나 그들이 고된 모랫바람과 험난한 길을 거쳐 찾은 진리는 아주 조그맣고 사소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 들인 이들은 현자가 되고, 그 사실을 부인하고 더 멀리 떠나가는 사람들이 모험가가 되며 그 사실을 부인하고 화를 내는 사람들은 폭군이 된다. 보르헤스의 '알렙'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그 사소한 진실이 고작 집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그와 함께 합주했던, 그 사내가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바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을 때, 나인틴 헌드레드는 질투를 느낀다. 그는 어떤 누구도 질투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양아버지 데니는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고,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배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했으며 완고한 지휘자마저 그의 재능으로 꺾어버린다.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할 순 없다. 허나 그가 평생을 살아온 바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대지 대신에 늘 어머니가 되어 왔고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느꼈던 바다, 그 바다의 목소리를 한 번도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내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듣지 못했던 '바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남은 딸 한 명을 위해 땅 위에서 허우적거렸던 사내였다. 바다를 보자마자, 그 목소리를 듣다니. 게다가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의 딸을 사랑하게 된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그의 딸을 알아 보게 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처음으로 느껴본 질투, 그리고 그 사내처럼 바다를 응시하는 아름다운 여자. 그는 그녀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을까.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 나인틴 헌드레드는 수줍어 한다. 그는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처럼 그녀도 바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내린다. 그녀의 아버지가 결국 대지 위에 안착하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는 일종의 배신자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처음부터 바다 위에서 삶을 시작했고, 그리고 끝내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그녀의 아버지도 바다의 목소리를 들은 이상 바다와 함께 해야만 했다. 허나 바다의 시체, 생선들이나 파는 신세가 되었다. 나인틴 헌드레드와 그녀는 꼭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는 연인 같다. 그러나 그녀가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호감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의 감정과 같은 마음으로 나인틴 헌드레드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른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아예 그의 마음도 전하지 못한다. 홀로 남은 트리스탄, 그저 하지 못한 구애만이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그 구애를 아는 사람은 그의 친구, 맥스 뿐이다. 맥스는 그 구애의 파편을 모은다. 구애는 복원되어, 숨어 있던 나인틴 헌드레드를 깨운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땅 위에 내리기로 한 그 때는 어땠을까. 만약 대지에 내린다면,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구애의 마음을 담은 레코드 판은 필요하지 않다. 직접 가서, 그녀에게 들려주면 될 일이다. 그가 만약 땅 위에 내린다면 그 또한 바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모든 질투는 사라지고, 새로운 나인틴 헌드레드가 태어나는 것이다. 허나 그는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모자만 허공에 던진 뒤 다시 배로 되돌아 온다.
그의 음악은 사랑처럼, 아름다웠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가 본 도시는 달랐다. 모든 것이 똑같이 이어지며, 모든 길이 한없이 펼쳐지는 악몽과 같은 세계였다. 그는 끝을 바랬다. 모든 자연에 있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었다. 한계가 없다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었다. 높은 벽을 오르고 오르다가 발견하는 건 그 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찍어 누르던 칼과, 끊긴 밧줄의 흔적 뿐이다. 그의 음악은 '자연'과 '산업'의 경계, 배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가 바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평생 들어왔기 때문에,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마치 우연히 통조림을 가지러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발견하게 된 알렙처럼, 계속 자신의 안에서 울려퍼졌던 바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예고된 비극의 연대기
배는 산업이 발달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의 걸음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의 '오딧세우스 원정대'부터 독일의 '바보배'까지 이르렀다. 배는 세상을 넓혔고, 새로운 자연을 개척했다. 배는 인위적인 것이었으나 물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다닌다는 점, 폭풍이나 자연 재해에는 결국 깨끗이 제 수명을 다하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윌리엄 터너의 풍랑에 휩쓸린 배를 그린 그림을 보노라면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자연의 폭력-숭고성에 대한 인간의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호는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게 만든, 근대 사회의 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돛단배의 과거를 잇는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호는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 서 있는 미묘한 존재다. 일종의 완충지대인 셈이다.
나인틴 헌드레드와 젤리 롤의 대결에서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이겼다. 앞에서도 말했듯 나인틴 헌드레드는 '자연'의 천재였다면 젤리 롤은 '사회'의 천재였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자연과 문명의 경계인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둘은 합리 속의 비합리와 비합리 속의 합리성이었다. 젤리 롤의 자연은 공장이 뿜어내는 매연이 가득하고,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사회였고 나인틴 헌드레드의 자연은 태고의 '바다' 그 자체였다. 둘의 대결 당시에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이긴다. 사회는 자연을 길들여 자신들의 합리성 안에 가두려 들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 시도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그가 레코드 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는 것도 그 저항을 이어간다. 수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높은 명성을 줄 수 있는 그 레코드 판을 나인틴 헌드레드는 단 한명을 위해, 단 한번의 구애를 위해 가져간다.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 같은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연주하나, 자연에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로서는 신기하고 흥미로울 따름이다.
허나 시간은 빠르게 지난다. 육지의 시간과 바다의 시간은 다르다. 맥스는 그새 자신이 아끼던 트럼펫을 팔아 치우게 된다. 그러나 그가 다이너마이트와 함께 폭사하게 될 버지니아 호를 본 순간, 그의 시간은 바다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과거와 현재의 혼합성, 이는 발터 벤야민의 역사 시학을 떠올리게 한다. 발터 벤야민은 연속적인 계몽적 사회의 역사와 다른, 각각의 역사를 따로 해석해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 내는 역사를 제시했다. 앵겔루스 노부스, 버지니아 호는 과거의 궤적을 바라보며, 뒤를 향해 나아간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맥스 또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는 기회의 땅으로만 여겨졌던 미국의 참된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태도가 필요했다. 맥스가 나인틴 헌드레드와 함께 흔들리는 홀 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즐겼던 추억과, 지금의 상황을 견주어 보며.
결말은 결국 나인틴 헌드레드, 사회의 다이너마이트와 함께 파괴되는 자연으로 끝난다. 젤리 롤이 표상하는 사회의 일시적인 승리인 셈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쪽이 당기면 다른 한쪽이 또 당기는 것처럼, 자연과 문명은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버지니아 호는 문명에서 '폐물'에 불과했고, 결국 문명은 자신들이 낳아 자연으로 내보낸 배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배에서 자란 나인틴 헌드레드 또한 그 배와 함께 끝나야 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찾을 때는 없었던 그가, 맥스의 간절한 부름에 나타난다. '배멀미라도 해?'라는 농담과 함께. 맥스가 나인틴 헌드레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혼자만이 아는 나인틴 헌드레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쩌면 나인틴 헌드레드는, 영화 속에 나오는 그는 맥스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맥스와 달리 바다에서 태어났고, 처음과 끝이 없는 그 도시를 경멸했다. 오히려 나인틴 헌드레드는 맥스와 달리 담담했다. 맥스는 새로운 시작을 말하며 상륙하자고 말했지만, 끝이 없다는 그 말은 욕망과 다를 바가 없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을 초월한다. 그는 육지를 겁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수긍할 뿐이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있는 버지니아 호는 결국 다이너마이트, 문명의 폭력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맥스에게는 그 순간이 비극이다. 맥스가 믿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음악,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인틴 헌드레드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맥스와 악기 상점 주인이 함께 들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연주, 그리고 맥스가 가지고 있는 나인틴 헌드레드에 대한 이야기는 남아 있다. 게다가, 결말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주인은 맥스에게 '이야기'의 가치를 말하며, 그의 트럼펫을 돌려준다. 어떻게 보면 돈과 돈의 교환가치만 통했던 사회에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인 셈이다. 맥스는 어쩌면 트럼펫을 다시 팔게 될 지도 모르고, 다시 불게 될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음악을 다룬 영화였으나 그 끝은 이야기의 지속성으로 끝난다. 물론, 나인틴 헌드레드의 일생은 스크린 위에 펼쳐졌고,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서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과 서사는 어우러진다. 이는 스몰의 '실용음악론'처럼, 다른 컨텍스트로 이어지며 오락처럼 여겨지는 예술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이는 아도르노의 '자율음악론'과 가깝다. 우리가 매혹되는 건 나인틴 헌드레드, 그와 그의 연주다. 그의 기구한 운명보다 우리는 '자연'과 '문명' 간의, 줄다리기를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나인틴 헌드레드는 이미 죽어버린 이들의 이야기, 전설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음악과 서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서로 상호적 관계라기보다는 이미 하나의 결합을 이룬 구와 같은 것이다. 배우와 극본, 음악의 구분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피아니스트의 전설' 속의 전설, 그 자체에서 숭고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