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0일 수요일

 

 

 역시 이청준이다. '당신들의 천국'도, '낮은 곳에 임하소서'도 좋다. 허나 '벌레 이야기'를 읽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를 읽고 나니 작가는 결국 무신론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사실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 인간이 그걸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기고양편파, 남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위해 천국을 예비해두고 시련을 준다고 하나님 탓으로 돌려버리는 역설적인 태도가 바로 세상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벌레 이야기'는 다르다. 시련은 끝없이 이어진다. 결국 '자살'로 강력한 거부의 몸짓을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걸어들어오면서 검은 밤하늘에 껍데기만 남은 채 타들어가는 교회 십자가를 보았고, 어머니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저 모든 걸 좋게 바라봐라. 좋게 봐라. 라고 했다. 이게 중학교 2학년 때 지나가는 허세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적도 있었다. 차라리 타인을 맹렬하게 공격해서 쓰러뜨리는 게 목적인, 원시적인 우월감이 목적이라면!

 

 주제 사라마구는 가까운 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중시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녀처럼 귀여웠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새로운 습작품을 써야 한다. 사실 나는 비문을 일부러 고치려고 들지 않는 편이다. 편집기술론 때 교정을 보라고 준 원고에서, 나는 일부러 비문을 고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섣불리 고치는 순간, 작가가 쓰는 템포를 놓치고 우리는 모두들 길을 잃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받아 적던 '셰익스피어 서점'의 실비아 하치는 원고를 다시 받아 적는 데에서 시력을 잃었지만 '율리시즈'의 탄생을 도모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조이스는 남자고 실비아는 여자지만.

 

 왜 레비 스트로스의 책, 을유사의 그레이트북스는 25000원이 훌쩍 넘는 걸까. 슬프다. 제본 뜨고 싶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싶다. 인간 관계에 얽매이기 싫다고 생각한 건 최근 일이다. 사람을 꾸역꾸역 만나면 그만큼 익숙해져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친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면 마치 친척을 만나는 것처럼, 아무 말도 안 해도 편한 사이라고 생각하니 더 맘이 놓이는 것 같고. 그렇고. 저렇고. 이렇게 살아왔고.

 

 

 

우스꽝스러워라

 

 

종로 청계천에 새로운 설치미술작품이 나타났다. 청계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드릴 모양의 전시품을 가져다 놓은 것도 참 웃겼는데 이번에는 나라의 발전과 영광을 널리널리 알리는 종을 형상화한 작품을 설치해 놓았다. 이 나라 구석까지도 다 퍼지는 은혜로운 소리를 들려줄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전두환 시대도 아니고. 성덕대왕신종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나름 멋있게 옮겨 쓴 어구는 이렇다. "종이 만들어지니 그 모습은 산처럼 우뚝하고 그 소리는 용의 읊조림 같다. 소리로는 지상의 끝까지 다하고 밑으로는 땅속까지 스며들어 보는 자는 신기함을 느낄 것이요. 소리를 듣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허나 전시물 안은 비어 있고, 수많은 스피커들만이 그 공허를 감추고 있다. 스피커 속에서 누군가가 외친다면, 그 소리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세상을 향해 빠져 나갈 터이지만 다시 말했듯 속은 비어있다. 차라리 작가가 사회 비판적 의미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만약 그런 경우라면 이 작품을 설치한 오세훈의 뜻은 알 수가 없다. 아예 몰랐거나 바보거나 그냥 큰 데 가격이 쌌거나.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드릴 보면 그 말은 안 나온다. 혹시 미국 쪽에서 상이라도 받았나? 작품이? 만약 사회비판적 의미, 각성의 촉구가 맞다면 과연 작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다리리를 가로막고 무한도전의 정준하처럼 사람들을 가리는 이 어색한 설치미술작품을 어떻게 여겨야 하나? 예전에 선배들이 그런 적이 있었다. 너, 그러면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안 낼거야? 원고 청탁오면?

 MB 동영상 퍼간 사람은 잡히고, MB 동영상 만든 놈은 왜 안 잡아가냐는 소리가 나오고. 세상이 미친 채로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희극을 본다. 미친 놈들을 따라하면서 진실을 보여주는 게 바로 희극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스스로가 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지켜야 할 것이다. 올바른 우파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파라고 한다면 우파의 정의를 세워라. 나는 양극단이 서로 꼭 대립하고 이를 드러내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서로의 주관이 또렷한 상태라면 소통도 가능하다고 본다. 어느 한명이 이성을 잃는 순간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사촌오빠는 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지켜지지 않아서, 품위가 없어서 싫어. 자! 여러분. 우리는 이제 호스로 세상을 닦아봐야 한답니다. 알겠습디까?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우리는 모두 불법이다-정철 '불법사전'

 

 

 

 

 

 

 위에 있는 이미지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불법 사례다. 우리 나라에서는 단체로 모여 다니는 걸 금지하고 촛불은 커녕 스탠드만 들고 나가도 불법으로 인정받는다. 스탠드는 알을 빼가지고 나가야 한다. 무조건 어둠을 밝히는 건 금지다. 헬멧에 가려진 타인의 얼굴을 비추는 불빛도 금지다. 다행히 휴대전화 액정은 금지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 휴대폰 액정을 열고 치켜든 채 거리로 나가는 것을 고려해 보고 있으나 정부에서는 와이파이를 열어 휴대전화에 강제 인터넷 연결로 배터리를 닳게 할 예정이란다. 결국 교통정체는 한시간으로 줄고 이 떼거지들을 진압할 경찰서장에게는 '보이지 않아서 어떤 놈이 반동분자인지 몰랐어요'라는 변명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사진의 촛불들은 화재를 염려한 경찰들이 물대포로 끄고 일부는 방패로 가려서 껐으며 몇몇은 바람의 검심에서 나올 법한 검도술을 사용해 촛불 심지를 자르기도 했다. 무림경찰, 대나무민중. 이게 바로 대한민국. 합법을 위해서 대나무들은 수없이 베어져야 했다.

 

 

 


 우선, 정철의 '불법사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불법으로 다른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책을 읽고 쓰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일까. 왠지 비문으로 보이는 물음이다. 허나 나는 이 문장을 '다르다'로 정의하고 싶다. 아예 없다가 생겨났기 때문에 다르다던가, 소수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게 아니다. 저 문장은 우리가 가장 쉬운 대답으로 회피하는 저돌적인 황소이고, 날카로운 창이다. 책을 읽고 글을 하나 쓰는 순간, 그게 레포트가 되었든 기사가 되었든 블로그 포스팅이 되었든ㅡ글은 그 책의 영향을 받게 된다. 문체나 작가의 사상을 따라간다는 게 아니다. 그 순간의 생각이 잔상처럼 남아 떠돈다. 무의식 속에 남아서, 우리가 만드는 스투디움 속의 풍크툼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스투디움과 풍크툼이라는 개념은, 얌전해 보이고 질서가 바로 잡힌 세상 속인 스투디움을 꿰뚫는 진리ㅡ풍크툼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이 대답이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면 그 말은 여지없는 사실이다. 소설가 김연수가 '인간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던 것에, 나는 두 손을 들고 항복의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겪고, 몇권 안되는 책을 읽으면서 번번히 부딪치고 부딪혀 온 진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들도, 인간관계도,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컨텐츠들도 풍크툼을 꿈꾼다.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에서 날카로운 속을 뽑아내길 바란다. 정철은 '불법 생각은 청춘의 특권이다'라고 말했으나, 사실 이 불법 생각은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청춘'에 한정되어 버리는, 서글픈 면죄부다. 그 표어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는 내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는 Post-청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청춘'이거나. '불법사전'의 저자 정철은 카피라이터다. 카피라이터는 이쑤시개 끝도 날카롭게 다듬는다. 우리가 이쑤시개를 만만히 보고 막무가내로 이 사이를 쑤셨다가는 잇몸이 걸레가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잇몸은 튼튼해서, 그 이쑤시개마저도 짓뭉개버리곤 한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이 '불법사전'을 불법으로 수용할 사람과 그저 넘겨버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불법사전'의 뒷표지를 봤을 때, '사전으로 위장했지만 에세이 코너를 못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 멘트에 역설적인 공감을 느꼈다. 이 책은 에세이다. 우리가 보통 쓰는 사전이라는 의미는 타인들에게 다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몇줄 안되는 단어 뜻을 적어 놓은 책이다. 에세이는 개인이 느낀 사상과 감정, 세계를 담아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전'이나 '에세이'. 둘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은 '에세이사전'이다. '불법사전'이기 때문에. '합법사전'이 '사전' 코너에 있다고 시큰둥해하는 저자에게 좋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정석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전은 이미 가정마다 한 권씩 보유하고 있으면서, 장식장에 꽂아 놓고 냉장고에 얼려 놓은 얼음처럼 잊어버리거나 가끔 필요한 정보나 찾아보기 위해 뒤져 보는 책이라는 것. 사전을 비하하는 말일 수도 있다. 맞다. 나는 비하하면서 '불법사전'을 옹호하고 있다. 허나, '사전'이 아닌 '에세이사전'이라는 것이다. 주관적인 자신의 생각과 세계를 담은 사전. 객관적인 사전에는 경계가 없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정보들을 잘라내고 덧붙여서 집어 넣을 수 있다. 가지고 다니기엔 귀찮다. '에세이사전'은 주관적이고, 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인생만을 담기 때문에 사전에 비해 부피가 작을 수밖에 없다. 2탄이 나올 수도 있다. 아니면 속편이라던가. '에세이사전'은 끝이 있다 해도, 그 끝까지는 많이 남았다. '발상전환'을 하면서도 저자는 '사전' 코너에 끼지 못하는 걸 아쉬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어불성설인가.
 현대 사회의 물신성을 조종하고 있다고 하는 광고는 '카피'로 시작되고 '카피'로 끝난다. '카피'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차를 바꾸고 옷을 갈아 입고 구두를 갈아 신고 사람마저 갈아치운다. '이게 다 ** 때문이다' 라고 쉽게 한 쪽으로 몰고 탓할 수 있다. 차 하나를 타면 여자들이 따라오고 사람들이 너를 최상위의 존재로 본다는 말, 사장님도 아닌 사람이 타도 사장님의 생각을 깨울까봐 조심조심 움직인다는 말도 다 웃기다. 그래서 물신성이 듬뿍듬뿍 넘치는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체중조절을 해준다는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는 기분이 든다. 꿈을 먹으면서 인간은 점점 자신의 구석을 갉아 먹는다. 허나 '카피라이터'들은 다르다. 그들은 멋진 현실을 만들어 내길 바란다. 멋진 현실, 긍정적인 쪽으로. 전에 가장 인상깊었던 광고 카피는 아름다운 가게의 공정무역 초콜렛을 홍보하는 카피였다. 단순하게 '초 콜 렛'이라니. 오규원의 날이미지시처럼 어느 여과 하나 없이 대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닌가. 악마의 키스고 뭐고를 떠나서, 초콜렛은 초콜렛이고, 공정무역은 공정무역이다. 정철은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하지만, 사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특별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전환이 아니라, 우울한 원숭이에게 화려한 무늬의 고깔모자를 씌우고 트럼펫을 들린 순간 광대가 되는 것처럼 보는 시선의 위치와 배경을 바꾼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사소함을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는 사소함이기 때문에, 이 책은 즐겁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고 무조건 이 책에 기대려고 하지만은 마시라. 제발 부탁컨대, 한 책에 의지하고 기대는 순간, 그 사람은 또다시 그 사람이 기댄 책을 찾고, 또 그 책의 저자가 기댄 책을 찾고, 찾고, 찾다보면 진리는 발견할 수 없다. 발상을 전환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은 '에세이 사전'이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정철은 거짓말은 '나는 거짓말을 전혀 안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퇴고를 거친 순간, 모든 책은 진실에서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거짓말들로 벤야민은 북극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맡은 순간 나는 무조건 이 책을 칭찬해야만 하는 것인가? 라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다. 그래서 책만 들여다보고 쓰질 못했다. 리뷰 마감일인 6월 23일은 내 생일 전날이다. 한번 생일을 불태워서 써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큼 이 책이 싫다는 건 아니다. 혹여나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이 책이 나의 인생 멘토'라고 하면서 '멘토'의 의견을 참고하는 게 아니라 기대는 사람이 생길까봐,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염증이 나서 이렇게 쓴다. 좋은 점도 쓰고, 혹여 이렇진 않을까 우려되는 점도 썼다. 그래도 칭찬 많이 했다. 책 예쁘다. '에세이사전'이다. '사전'과 다르다는 걸 확실히 알았으면, 그렇기 때문에 한번 읽어봤으면 한다. 만약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하고 타인의 세계 따위 들어와봤자 쌈무 위를 덮어 놓은 비닐이라고 생각한다면 안 읽어도 된다. 리뷰는 강요하는 것보다, 추천하면서도 추천하지 않는 미묘함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뿐이다. 

웹진 판타스틱의 귀환을 축하하며

 

 

 

 

 

 

 

 

 사실 한동안 판타스틱 읽기를 미뤘습니다.

 예전에는 장르 소설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들이 모르는 외국 작가의 단편, 스릴러와 판타지, SF를 넘나들었지만 어느샌가 시드노벨을 주로 내는 것 같아서 조금 불쾌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꾸준히 장르 소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좋은 장르소설가를 배출해 낸다는 점에서 판타스틱을 응원하고 싶네요.

 제가 지금 구독하고 있는 문학동네도 모 서점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구석의 한 칸에 처박혀 있어 문학의 소외화를 절절히 느끼게 합니다. 시드노벨과 일본 장르 소설을 주로 싣는 파우스트는 만화 쪽 코너에 있고 판타스틱은 문학 서가에 있거나 만화 서가에 있거나, 찾을 때마다 점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원래 장르 소설은 대중 소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들 했지만, 어떻게 보면 다릅니다. 장르 소설은 저마다의 장르 속에 파묻혀 장르의 순수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호 컨텍스트적인 면으로 경계를 지워나가기도 하지만, 스릴러는 스릴러의 정수를. SF는 SF의 정수를. 판타지는 판타지의 정수를.

 여하튼 그래서 더 응원합니다. 시빌워가 읽고 싶은 것도 좀 있지만요.

 

 초호부터 중간까지, 낯선 장르소설들과 낯익은 장르소설들을 적절히 소개하면서 장르문학의 입문을 더 쉽게끔 하고, 또 사람들이 장르 문학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깬 판타스틱입니다. 수많은 고난들이 있었지만 그만큼 더 풍부해지고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카페는 바로 밑의 주소로.

 

 http://cafe.naver.com/nfantastique.cafe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거짓말

 

 

 

 사실 이 모든 상황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한테 '미안해. 거짓말이었어.'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사라지지 않아서 슬프다.

 

 싸이월드 글 같은데...

 

 

 화요일에는 또복 선배의 시가지 회식에 끼는데 뭔가 무서워...전에 어떤 분이 소개글에 24일이 생일인 걸 강조하고 싶은 건가요? 라고 쓰셨는데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별 특징이 없고, 그냥 6.25 사변 때 태어났으면 올레! 죽었군. 이 상황이고 모 그룹의 남자 멤버와 생일이 같다는 것밖에 없으므로. 뭐 한 게 없잖아.

 

 

시험 끝나고 카페인 섭취

 

 

 시험 때만 되면 나는 시험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질 못한다. 음악이라도 들으면 꼭 죄 지은 기분이 든다. 이것도 강박이라고 해야 하나. 심리학 수업 들으면서 조금 나아졌긴 했지만. 이번 시험은 굉장히 기분 좋게 봤다. 심리학 공부도 재미있었고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현대시 수업도 들을만 하더라. 문제는 이제부터 할 일이 많다는 거지만, 글쓰는 게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즘 신경을 안 써준다는 동기의 말을 들었다. 문자도 제대로 답장 못 하고, 네이트온도 안 들어가고. 그게 안 써준건지. 사실 학회의 강제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참이기는 하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좋다.

 마시고 있노라면 다른 음식은 같이 안 곁들여 먹어도 될 것 같다.

 

 홍대 카페베네도 좋다. 의자가 넓어서 웅크려 앉을 수 있다.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아주 가끔 그렇게 한다.

 

 최승자 시인은 시집을 죽 내다가 마음의 병에 걸려서 십년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최근 '쓸쓸해서 머나먼'이라는 시집을 냈고, 사람들은 그녀의 독기가 빠졌다며 아쉬워 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반응들. 최승자의 시를 읽다 보면 괴롭다. 그녀가 그녀의 고통을 깎아내고 깎아내고 끝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최승자론을 쓸 때 조연호와 비교하면서 그녀는 죽음이 삶의 연장선에 있다고 봤고, 조연호도 그랬지만 최승자는 삶도 죽음도, 어느 쪽에서도 위안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연호는 희망을 바라봤지만, 최승자는 절망만 보았다. 내가 1년 전, 그녀의 시론을 쓰면서 그녀가 아이오와에서 쓴 '어떤 나무들은' 책을 읽고 그녀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라고 했는데 교수님은 최승자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절필. 충격적이었다.

 

 누군가와 쉼없이 이야기하기보단 지금 이렇게 혼자 있는 게 좋다. 인간 심리를 공부하다가 성격의 유형들 몇을 알게 되었다. 동기는 그걸 보고 나한테 분열성 성격 같다고 했다. 타인과의 관계에 그닥 기대를 갖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이걸 욕이라고 해야 하나, 분석이라고 해야하나. 학교에서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물론, 카페 갈 때는 혼자 있는 게 좋고 카페 가는 건 좋아한다. 어...

 

 레포트는 아직도 수리가 안 되었나. 오기가 나서 답안지에 다원론적 미학에 대해 내 생각을 두서없이 써버렸다.

 

 학교에서 중국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걸 듣고 동기들과 함께 시끄럽다고 웃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나라 말이 아닌 다른 나라 말이라면, 그게 익숙치 않다면 똑같이 성가시지 않을까?

 

 쩜쩜쩜.

 

 

 봉평에 가서 햇빛 받고, 긁적거리고, 만약 웃게 되면 웃고.

 

 학교 동기들하고 이야기하다보면 어딘가 콱 막힌 기분이 든다. 동기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다. 하수구에 머리카락이 잔뜩 걸려서 물이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답답하다. 가끔 끊임없이 이야기하다보면 문득 울고 싶어질 때가 있다.

 

 공황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창피하고 짜증이 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다가도 어쩌면 나는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 원인을 알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누구나 드라마를 가지고 있지만 그 드라마는 막장일 때가 있고,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말하면서도 반신반의한다. 내가 과연 이런 일을 겪긴 했을까. 말할 때는 농담처럼 말하다가도 혼자 생각해보면 우울해지곤 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계속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쩜쩜쩜.이라는 말이 좋다. 귀여워서. 소리내서 읽으면, 몇몇은 의성어 의태어를 소리내서 말하는 사람들 같다고 싫어하지만 좋다. 귀엽잖아. 홍상수의 '하하하'도 왠지 좋다. 귀여워서. 그런데 '귀여워'는 싫다.

 

 

 싫은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맘에 들지는 않는다.

 

 아시아라이 저택의 주민들 좋다. 왠지 이야기가 너무 광범위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좋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을 물어볼 때 '데카메론'을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은 웃고 넘기지만 생각해보니 정말 못된 년이었군! 싹수가 노래! 제기랄!

2010년 6월 7일 월요일

홍대 Thanks Nature Cafe

 

 

...에서 공갈을 당했다. 사실 내 잘못인 것도 있지만. 샌드위치와 커피 세트가 안된다길래 와플로 바꿨다. 서비스는 아니었다. 얼떨결에 만원 넘는 돈이 나갔다. 눈물이 절로 난다. 옷 정리하다가 실수로 청바지를 버려서 마트 아르바이트할 때 입던 검은 뱅뱅 면바지를 입는다. 덥다. 나가기도 싫다. 무슨 찜질방 속에 들어온 것만 같다. 걸어다닐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미학의 이해> 수업 발표도 이상하게 해버리고, 레포트 반응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시험은 답답하다. 다른 짓을 할 때마다 죄진 기분이 든다. 강의 결제해 놓은 것도 아직 못 들었다. 친구는 시험이 끝나고 2주일 후에 일본에 간다고 했다. 다른 두 명은 유럽으로 간다고 했다. 어쩐지 나는 그 곳에서 보내온 엽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좋은 것은 유리병 안에 든 아메리카노? 시원하다. 맛있다. 커피를 끊겠다고 하고선 하루만에 쪽쪽 빨아먹고 있다.

 

 소설을 써야 한다. 퇴고를 해야 한다. 내일까지다. 빡빡하다. 하지만 레포트를 강제로 뽑아내던 어제보단 낫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더워서 귀뚜라미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글을 썼다.

 

 블로그를 옮기고 옮기면서 타인의 검색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친구는 그렇다면 왜 블로그를 하냐고 물었다. 어쩌면 일종의 과시욕일지도 모른다. 위선을 떠는 것일지도 모르고. 네이버 블로그에서 내 글, 백설기를 나눠 먹었던 글이 조그만 사이트 한 구석에 실린 것을 보고 염증이 났다. 그게 기독교 찬양 글로 바뀐 것에 더 화가 났다. 아무래도 그렇게 무단 도용을 당하지 않으려면 백설기를 그 사람 얼굴에 처박기라도 했어야 했나 싶다.

 

 선배는 내 소설은 비문 천지지만 이상하게도 읽힌다고 말했다. 영화 시나리오 같은 소설, 이라고 말했다. 뭔가 씁쓸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에는 소설 같다고 하고 소설을 쓸 때는 시나리오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억지로 레포트 뽑아내는 데에 염증이 나서 최승자 시인에 관한 레포트를 쓸 때 헛소리를 지껄였다. 교수님이 합평문을 세번째로 시켰을 때 나는 동기에게 내 입에 오백원을 넣으면 합평문이 튀어나온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몽골에 가고 싶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 사실 학회 MT만 안 간다면 상관 없을 것 같다. 강제가 아니라고 해놓고선 돈을 걷고, 교통비를 가져오란다. 2박 3일 동안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써야 할 글도 많고, 읽을 책도 많고, 볼 강의도 많다. 시험 중에는 이상하게도 좌불안석인 기분이 들어서 책도 읽을 수 없고 글도 쓸 수가 없다. 결국 느는 건 스페이드 카드 놀이 실력. 그런데 이번 판은 영 별로다. 뒤엎고 또 뒤엎고.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랑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요즘 동기들과 있다 보면 이야기보단 자랑을 많이 듣게 된다. 아니면 자기 소설에 대한 변명. 점점 갈수록 성격이 나빠진다고 느꼈던 건 십분동안 이어지는 자랑에 내가 끼어들어 제동을 걸었을 때였다.

 

 말더듬이 아다다, 아다다는 아다다하고말했다 아다다와나는 함께걷는다 아다다 아다 보아다 많은 것을 보아다고 아다다는 말했지만 나는볼수없었다 아다다는 많은 것을 들어다고 말했지만 나는들을수가없었다 아다다는 많은 것을 말해다고 말했지만 나는아무것도들을수없었다 아다다는묻는다 대체넌뭘듣말볼수있는거니 나는 대답한다 아다 아다 아다다 이제 나만 도망갈 시간이다

 

 시창작연구 시를 대충 써내려고 한다. 그런데 위 시를 대충 쓰고 나서 검색해 보니 교수님이 아다다에 관련해 쓴 논문을 쓰셨다. 씁쓸하다. 역시 벌을 받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