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스위치switch'-발랄, 아쉬운 발랄.

 


 영화 '스위치'를 봤다. 학교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왔다. 원체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동네라 그런지 상영관에는 사람이 나와 친구 둘밖에 없었다. 좌석은 총 66석인 소규모의 극장이었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제스쳐가 커진다. 다른 영화를 보면 오히려 더 조용해지거나 하는데 왠지 모르게 손을 내젓거나 큰 소리로 웃게 된다. 어쩌면 영화 자체에서 주는 흥겨운 분위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나 혼자면 조금 무안해지는 법이다. 친구도 열심히 웃다가 텅 빈 상영관 때문에 머쓱해져서 둘 다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미혼모', 싱글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 지 궁금했다.
 '여성'의 본능이 재생산이며 양육이라는 말은 솔직히 이전 여성학에서 여러번 번복되어 온 문제적 발언이다. '모성애'라는 건 사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는 '모성애'가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미혼모-싱글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에 대해 혐오감이 있는 사람들,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게 된 사람들. 하지만 이는 편견일 뿐이다. 오히려 '스위치'의 여성들처럼 스스로 결정하는 여성들, 물론 그만큼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남자'보다는 '아이'가 우선인, 사실 '스위치'에게 바란 건 바로 이런 면이었다.

 

 

 가끔 네가 미칠 정도로 보고 싶어질 때가 있어

 '가족'이라는 것은 모든 트라우마의 근원이고 모든 '나'의 토대이다. 기본적으로 '나'를 보호해 주는 것, 어떻게든 부정해 봐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스위치'는 새로운 가족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영화 장르상 가볍게 다루고 있기는 하다. 마치 '싱글맘'인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본능에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듯하고(계기) 아이를 갖기 위해 임신 파티를 열며(실행) 아이를 낳는 데에 성공한다(결과). 하지만 '친 아버지'라는 것은 의외로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그것도 '싱글맘'이었던 여성이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단순히 혈연적 끌림이나 직감이라고 하기에는 무책임하다. 이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이 '어려운 문제들'을 드러내면서도 '가볍게' 뛰어넘는 경쾌함이었다. 헐리우드 영화들, 로맨스 코미디들은 특히 이런 면모가 강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연애 소설을 기반으로 했지만 나름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 은근슬쩍 신데렐라 스토리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칙릿-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스위치'에서는 이 '싱글맘' 문제가 대충 얼버무려지고 만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어머니와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지 못하는 남자.

 

 이 영화에서 살아 있는 인물은 아버지, 월리 뿐이다. 월리는 본래 자기중심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는 이성적이며 솔직하다. 그가 하는 말들은 무언가 빙 둘러 말하지 않고 곧장 찌르는 바늘같은 말이다. '캐시'는 월리가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지만, 이제는 친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월리는 그 한계를 알지만 포기하지 못한다. 너무 사소한 것들은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가령 '캐시'의 아들 세바스찬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던가 하는 것들. 하지만 이 캐릭터 또한 '걱정하는 텀'이 너무나도 짧다. 차라리 월리 스스로가 자신이 나이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 그리고 캐시를 사랑한다는 것도 깨닫게 하라. 월리의 변화는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새에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어떻게 보면 월리는 세바스찬을 자신이 사랑하는 '캐시'와 떨어뜨려 놓았다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접해야 한다. 하지만 '혈연'이라는, 그 끈끈해 보이는 관계로 너무 쉽게 엮어버린다. 게다가 '사랑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월리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액자에 끼워진 샘플 그림들로 자신의 부성애적 결핍을 채우려 한다. 월리가 그의 가족이 된 이후 세바스찬의 액자에는 월리와 찍은 사진들이 가득 차는데, 이는 부성애적 욕망이 채워졌음을 말해준다. 세바스찬이 월리를 좋아하는 것도 조금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둬야 할 점은 '캐시'였다. 싱글맘이라는 것, 이 위치는 미묘하고 다루기가 힘들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쌍한 싱글맘이 되어버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너무 센 싱글맘이 되어버린다. 불쌍하면 서사가 재미없어지고 세면 마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영화 '스위치'에서 캐시의 위치는 너무 애매모호하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상관없다. 세바스찬과 월리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일 뿐 캐시의 위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캐시는 일종의 '장치'로 보일 뿐이다.

 

 


 가족의 탄생

 

 영화는 너무 쉽게 흘러간다. 모든 상황들은 다 정해져 있고, 월리는 무조건 캐시에게 고백해야 한다. 둘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긴장도 너무 짧다. 마치 '아버지'가 꼭 있어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캐시'를 보면, 사실 이 감독이 생각하는 싱글맘의 이미지는 '불쌍한' 여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탄생'은 무조건 세 축이 있어야만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두 개의 다리로 서 있던 테이블에 다리 하나가 더 끼어드는 것 뿐이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영화를 보자면, 싱글맘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가 없을 것만 같던 사람들을 만나고, 서먹해 하고, 울고 웃다가 가족이 된다. 가족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타인과 타인일 수 있는 사람들이 한데로 엮이는 것이다. 이 접합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섬세하게 다가가야 한다. '싱글맘'이라는 소재, 그리고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따라서 말이다.
 감독은 아무래도 '로맨스'보다는 '혈연에 끌리는 남자'를 더 다루고 싶어했던 것 같다. '스위치'는 일종의 책임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싱글맘'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사용했다는 게 바로 여기서 취약점을 찔렀다. '스위치-바꾼다'. 그리고 이 바꿨다는 행위에 책임을 지는 남성. 사실 남성의 책임에 대해, 그리고 월리의 성장에 대해 다루는 영화였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의 탄생'이라기 보다는 '책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임'은, 작위적인 영화의 서사를 더 강화시켜 준다. 사실 월리의 친구 레너드의 경우 이혼을 두세번 정도 한 경력이 있고 여자친구를 아직도 왕성하게 사귀고 있는 이로서 어떤 '책임'의 여부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레너드는 월리에게 이런 저런 충고를 해준다. 레너드의 캐릭터는 영화 서사에서 솔직히 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레너드의 등장 이유는 간단하다. 월리에게 레너드 자신처럼 '살지 말 것'을 당부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레너드는 그냥 술렁술렁, 웃음을 부여하기 위한 요소로만 제시된다. 하지만 어떤 요소가 너무 튀면 영화 전체의 흐름이 망가지는 법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스위치'처럼, '싱글맘'에 대해 다룬 영화가 나오기를 바랬다. 하지만 '스위치'는 결국 남성의 최종적인 책임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다룬 영화였다. 이는 솔직히 아쉬움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캐시'는 물론 월리에게 화를 내야 한다. 월리는 캐시를 혼란에 빠뜨렸고 캐시가 원하는 아이라기보다는 월리 자신이 원한 아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캐시는 월리가 '세바스찬'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아니면 '캐시' 자신 때문에 다시 다가오는지 알아야 한다. 캐시는 월리에게 고백의 여부를 발견하고 조바심을 내지만 월리의 엉뚱한 대답으로 김이 팍 새고 만다. 이 상황을 보면서 좀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어랍쇼. 캐시가 월리에게 '결혼하자'고 말하고 승낙까지 한다.
 세바스찬의 액자가 치워진다거나 세바스찬이 좋아하는 유기견 센터의 강아지 사진이 그려진 케이크로 생일 파티를 한다던지 등은 좋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삽화일 뿐이다. 세바스친과 월리는 함께 살면서 무조건 '잘' 맞을 리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월리와 세바스찬 사이의 갈등을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무조건 '좋은 관계'로만 이어지는 둘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특히 롤랜드에게 세바스찬이 냉정하게 대할 때, 이는 솔직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롤랜드를, 세바스찬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영화의 '심기-거두기', 즉 복선은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 있다. 모든 장치를 다 드러내 보이면 어떤 멋진 타워팰리스라도 순간 멋을 깨는 법이다. '스위치'의 장치들은 너무 많이 그 표면이 드러나 있다. 차라리 그 표면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나았을 것을.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스위치', 제발 다음 번에 나오는 싱글맘 관련 영화는 '주노'처럼 되길 바란다. 건투를 빈다.


 

 

 

 

 

 

 

2010년 11월 24일 수요일

대체 학교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는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졸업생입니다.
대학교에 와서도 계속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체 학교는 누구의 것인가?
저희 대학교 강단에서 한 교수님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설마 여러분, 학생이 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대체 학교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육청입니까?
교장인가요? 재단인가요? 나라인가요?
히틀러의 나치즘과 별다를 게 없는 노릇입니다. 유용성만 따진다면 세상의 모든 예술은 하나만 그려야 하죠. 나라에 대한 충성, 그 뿐입니다. 하지만 그 충성은 진정한 게 아닙니다. 강요된 이상 어떤 것도 진실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학교 관리자 몇 분이 이 사항을 결정했다는 것이 더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동안 뭘 보셨나요? 썩은 된장국처럼 거무죽죽하게 떠 있는 부레옥잠이요? 아니면 1년마다 갈아치우는 화단이요?

 저희 학교는 화단에서 피는 꽃을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람이라는 꽃을 키우는 게 목표가 아니었나요?
 아예 농업 고등학교로 학교를 바꾸면 더 낫겠군요.
 
 이 사안이 터무니 없다면 만약 실용화되었을 경우 책임은 누가 지실 겁니까?
 애당초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 나왔을 때 모두가 믿었다는 것,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이라 보십니까? 학교에서는 '믿을 거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여지'라는 게 있습니다. 졸업생들은 바보가 아니고, 순순히 넘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오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중장기 발전 계획 보고서를 어떻게 내셨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신다면 교육청에 물어보고, 대답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떻게든 답변을 얻어내고 말겠습니다.
 
 취업, 진학, 사실 이 두 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왜 이 학교에 교장으로 오고 교감으로 오셨나요?
 수상 실적을 의기양양하게 뽐낼 수 있어서?
 학교 겉이 예쁘니 화단도 마음껏 꾸밀 수 있어서?
 
 학교에서 '먹이고 재워주는' 건 학생이지만, 학생들도 자원적으로 자퇴를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 건 학생입니다.
 그 학생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는 게 학교입니다.
 사업체를 꾸리실 생각이시면 선생님을 그만 두시고 지금이라도 취업 전선에 뛰어드시면 됩니다.
 황금광시대처럼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반복 패턴만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선 저 같은 불량품은 나오지 않습니다. 완성품 가득한 사회로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이메일을 받은 출처는 혹시나 피해가 갈까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메일로 받았어요. 퍼뜨려야 할거같다고 생각하고있기에 여기에 올립니다.

 

 

 

(이메일 내용)

 

얘들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하니 길이 조금 길더라도 모두 잘 읽어주길바래.

얘들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하니 길이 조금 길더라도 모두 잘 읽어주길바래.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학교에 근무하고있던 산학겸임교사들(김정운,박정준,손기영,박성민)을 학교가 해고하려고 하고 있단다.

이유인 즉은 소위 비정규직법안 때문이야. 다음해(2011년)에 우리들을 재임용할경우 산학겸임교사는 무기한계약제로 전환이 되는데 학교와 경기도교육청의 과학직업교육과가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인거야.

다시 말하면 아무런 잘못도 하자도 없이 그냥 해고를 통보하고 있다는거야. 일부사람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우리산학겸임교사들은 정든학교와 학생들을 떠나게 된단다. 그래서 산학겸임교사들은 내년3월부터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려고 그동안 여러가지 준비를 해왔어. 그런데 이시점에서 학교는 학교발전중장기계획(안)이란 것을 암암리에 작성했고 이문서는 이미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상태란다.

 

이 학교발전 중장기계획(안)의 가장 충격적인 안은 영상연출과의 폐지란다. 그간 학교에 수많은 수상실적을 가져온 영상연출과를 학과유지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폐지한다는구나.

그리고 이 안건에는 만화. 애니메이션과에 대한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지.

만화와 애니메이션과를 통합하고 애니과를 컴퓨터그래픽과 3D애니에 중점을 둔 학과로 개편하겠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우리학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과는 컴퓨터게임과라고 말하면서 컴퓨터게임과만이 현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내용이란다.

애니과를 컴퓨터그래픽과 3D애니과로 만든다.... 이것은 애니과를 컴퓨터게임제작에 필요한 그래픽들을 제작하는 과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너희모두 알겠지만 그간 우리 만화창작,애니메이션과, 영상연출과는 해마다 다수의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국내 및 해외 대회에서 수많은 수상실적을 올려왔었단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왔다. 이것은 교장,교감선생님이나 일부 미술부장교사들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과 전공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만들어낸 실적이란다. 그리고 그러한 실적들이 우리 애니고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건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개교10년이라는 짧은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애니.영상,게임 학교로서의 위상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 학교가 몇몇사람들의 손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는거야. 이것은 비단 재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졸업생들아....생각만해도 아련한 이 애니고가 앞으로는 취업을 위한 학교로 바뀌게되고 우리같은 전공교사들을 1년에 한번씩 갈아치운다니..과연 이러고도 애니고가 지금과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한 이 학교발전중장기 계획에는 다른의도도 숨어있는거 같다. 현재 우리가 진행할려는 소송은 여러 변호사의 의견을 종합해본 결과 승소할 확률이 크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승소를 해도 학과가 개편되면 다시 복직할 수가 없다는거야. 학교는 이것을 알고 미리 손을 쓰고 있다고 판단된다.

 

맨처음의 시작은 산학겸임교사들의 부당해고에 대한 억울함을 알리는 거였지만 이제 이문제는 산학겸임교사의 해고를 벗어나 학교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안으로까지 나아가게 된거란다.

 

누가 이학교의 주인인 것이니? 교장.교감,전공부장?? 그들은 이학교의 주인이 아니야. 이학교의 주인은 교육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학생과 학부모인거야. 그런데 관리자와 전공부장은 쉬쉬하며 학생과 학부모를 고려하지 않은 문건을 작성해서 상부에 보고하고도 여지껏 이것을 동료교사 선생님들에게 공개하고 있지 않은 상태란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학교가 누구의 학교인지를 보여줘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이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밖에도 여러가지 사안을 독단적인 결정을 하고 진행해왔단다. 그리고는 학교구성원에게 이를 통보하는 식의 자세를 유지해왔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게 넘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단다. 그들은 이 문건이 단순히 보고를 위한 문건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문서화시켜 상부에까지 보고했는데 어떻게 이것이 단순한 보고용이라는 것이겠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그 교육과정이 완전히 틀리다는 것은 너희들도 잘 알거야. 대학에 진학하게되면 더더욱 절실히 느끼겠지. 애니과 자체도 더 세부적으로 전공을 가르고 있는 이 판국에 만화와 애니를 통합한다는건 발전이 아니라 퇴보라는건 상식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문제란다.

그리고 영상연출과를 폐지한다는 것은 영상연출과의 모든 학생,학부모,교사 그리고 졸업생들 모두를 기만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구나.

 

애니과의 경우 컴퓨터그래픽과 3D 애니라는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애니고에서는 일년에 단 2,3편의 작품도 제대로 내지 못할꺼야. 3D는 간단히 배워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파트가 아니니깐...아마도 학교관리자나 일부 미술교사에게 점수와 상금을 안겨줄 기능경기대회에 써먹기엔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만화과도 애니과도 작품의 수준은 떨어지고 편수는 줄어들게 되는 현상은 불보듯 뻔할꺼야.

 

얘들아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나는 더이상 두고볼수가 없구나. 재학생 졸업생 너희모두가 이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교를 지켜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애니고는 너희들의 것이란걸 잊지마.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초능력자-결국 문제는, 타자와의 소통


 

 

 

 

'아저씨'를 봤다. 원빈만 봤다. 아름다웠다. 원빈이 너무 예뻐서 '아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없고 원빈만 있었다. 동기는 그렇게 말했다.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배우에게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클로즈업으로 인해 영화의 서사를 다 잡아먹어 버리기도 한다. 원빈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과거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잘생긴 얼굴 둘이 있었지만, 검댕과 서사의 강렬함으로 인해 외모는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가요계는 이미 아이돌 천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노래보다는 외모와 퍼포먼스 중심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하다는 말은 사실 유명 배우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메이저가 아닌 언더의 영화들이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유는 포스터에서 잘생기거나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전에는 음악 영화 '어쿠스틱'이 개봉했었는데, 임슬옹과 씨앤블루 등 인기 있는 아이돌들이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물론 그 중에도 신세경이라는 배우가 있었지마는, 사실 극 전반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건 사실이었다. 꼭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반으로 동영상을 짜놓은 느낌이었다.
 이번 '초능력자'에서도 사실 그 불안한 기우를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시놉시스는 '아저씨'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아저씨'는 먼치킨 캐릭터인 아저씨가 등장하는 반면 이번에는 먼치킨으로 보이는 두 캐릭터가 등장해서 팽팽하게 내러티브의 끈을 잡아당기지 않을까. 그렇다면 강동원이나 고수의 외모보다도 그 서사성에 더 주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뿌린 씨앗을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가 바로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내린 결론이다. 꽃을 피우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다음 열매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정수리 위에서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다가, 떨어지면서 딱 하는 소리로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그 열매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격주 빌런 시네마

 '소설의 이론'을 쓴 루카치는 현대 내러티브 예술-영화, 소설, 연극을 다 포함해서-의 주인공은 일종의 마성적 존재라고 말했다.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현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하거나 이탈을 꿈꾸는 존재라는 것이다. 허나 완벽한 이탈은 없다. 인물은 사회적 관습에 한 쪽 발꿈치를 담그고 있다거나 자신의 본적지를 두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이탈자가 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아킬레우스처럼. 그들은 완벽한 세상,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 유토피아는 이뤄질 수 없다. 그들 자신조차도 무의식 중에 그걸 깨닫고 있다. 여기서 빌런과 영웅의 존재가 갈라진다. 빌런은 그들의 유토피아가 이뤄지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방해하려는 세력이나 뛰어넘으려는 이들을 짓밟고 지워낸다. 하지만 영웅은 다르다. 슈퍼맨 같은 영웅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유토피아를 사회와 융합하려 한다. 사회와의 소통을 포기한 자와 포기하지 못한 자. 빌런과 영웅은 이렇게 나뉜다. 종이 한장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웅보다 악당, 빌런에 더 감정이입을 할 때가 많다. 그들이 그렇게 빌런이 된 것은 단순히 '우월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에 잠재되어 있던 본능, 우리 안에도 있는 본능 때문인 것이다. 영웅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우상이 된다.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웅은 '영웅'이 된다.

 


 초인(강동원)은 보다시피 빌런이고, 그는 그의 장난감들처럼 완벽한 그의 세상을 꿈꾼다. 그의 인형은 웃고 있다. 인사하듯 한쪽 손을 경쾌하게 들어올리고 있다. 흡사 친구를 만난 듯한 표정이다. 야트막한 건물들과 개미같은 차들. 허나 그 배경에 그 말고 다른 인간은 없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그를 알아채는 순간 배척하고 경시할 존재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나레이션으로 '내 어머니마저 나를 죽이려 들었다'며 그의 절망감을 표현할 때, 사람들은 강동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만약 그가 초능력을 잃었다면 그는 그저 한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살았을 것이다. 그의 초능력은 배트맨의 조커처럼 한없이 매력적이고, 위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그에게 조종을 당한다. 그는 타인과 애당초 소통하지 못하는 자다. 소통을 배우지 못한 아기와 같은 존재다. 그로 인해 그는 더 고독해지고, 점점 더 바깥으로 어긋난다. 허나 그의 아킬레스 건, 어머니-다리 때문에 그는 사회적 관습 속으로 도로 끌려와 '학살'당한다. 사실 보면서 규남(고수)이 영웅이라기 보다는 조금 납득할 수 없는 존재, 초인과 비슷하거나 묘하게 거슬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규남도 사실 '초능력자' 중 하나다. 엄청난 회복력과 초인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또한 초인처럼 밑바닥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초인과 다른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속하고 그 소통의 끈을 계속 놓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둘을 같은 위치에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규남을 초인처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존재로 만들고, 밑바닥 인생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사실 초인보다 규남에 더 집중해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나, 우리는 배트맨에게 감정 이입하고 조커를 두려워했다. 미국 영화에서는 이렇게 영웅을 우위로 치켜 올린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다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히어로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히어로는 결점이 있어도 그걸 극복해 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국기 옆에서 웃어야 한다. 한국 영화에서는 그 결점을 다 드러내고, 그 결점은 영화 전반에서 계속 주인공의 주변을 떠돌며 그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그는 스스로 아이러니에 빠질 것이라는 걸 몇번이고 되새겨 준다. 현실은 시궁창, 그 뿐이다.
 규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는 지하철에서 초인이 죽이려던 아기를 몸을 던져 구하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게다가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사람들은 본척도 않는다. 어쩌면 초인의 초능력으로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도록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실 현실이 그와 비슷하다. 몇몇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할런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 한번 그보다는 못하지만 충격은 비슷한 광경을 봤다. 한 할머니가 전철 의자 한쪽에 쓰러져 있었는데도, 다들 못본 척 했다. 물론 잘못 처치했다가는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 아니면 그냥 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확실하다. 이제 물어볼 수 있을만한 여유는 사라졌다는 것. 초인은 규남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준다. 잠시나마 그 광경은 그들이 대등한 위치, 즉 사회적 관습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 타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규남만이 초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를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규남은 그를 뒤늦게서야 이해하는 것 같다. '같다'라는 표현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초인은 '빌런 시네마'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그 때 우리는 초인의 인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초인에게 감정 이입을 한다. 하지만 규남에게는 좀처럼 감정이입하지 못한다. 규남에게는 오로지 선만 있을 뿐, 인간다움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크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맨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영웅을 아직도 기다리며


 '초능력자'의 주인공은 둘이고, 이는 빌런과 영웅의 대결 구도로 정립된다. 규남은 영웅이다. 허나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영웅이다. 나중에 그를 조금이나마 인정해 주는 사람은 그가 섬기던 사장 딸 뿐이다. 완전히 그를 인정해 주던 사람은 오히려 초인이었다. 초인은 규남에게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진 사람이다. 왜 너를 제대로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목을 매지? 왜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려 하지? 그리고 초인은 그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를 생각해 주지도 않고 너를 걱정하지도 않는데. 하지만 규남은 완전한 선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난 규남을 보면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층계 위에서 떨어질 때 규남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장면, 사실 그 때서야 인간다움이 조금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인간다움도 왠지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슈퍼맨이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어떤 시대에서 어떤 창작물이 나오는가는 그 시대에서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뮤지컬 '영웅'도 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 사회, 부조리하고 온갖 거짓말로 넘쳐나는 사회에서 모든 걸 구제해 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영웅은 크립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웅은 이 사회에서 태어난 존재여야 하고, 인간다운 감정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일종의 타자적 존재고, 영웅이 필요한 건 바로 타자적 존재들이다. 타자들은 '이해'를 원한다.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려는 영웅.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규남이 초인을 껴안고 떨어질 때, 그리고 초인을 보면서 어쩌면 그와 자신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뒤늦은 후회를 할 때,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영화는 지속된다. 그 뒤부터 나는 왜 일어나고 싶었는가. 초인의 죽음과 규남의 생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규남은 이제 자신의 '초능력'을 인정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초인만이 그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규남이 전신 마비가 된다는 건 쓸데없는 리얼리티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리얼리티를 포기해야 옳았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아이를 구한다는 것도 뜬금없다. 차라리 리얼리티를 도입할 것이라면 정말 리얼리티로 가는 게 나았다. 규남은 전신마비로 일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환상에서만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간극에 가슴 아파해야 했다. 아니면 아예 전신 마비 씬을 없애던가. 씨앗을 뿌렸으나 제대로 거두지는 못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사회적 경계를 이탈한 존재들의 싸움, 그리고 빅뱅.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이 영화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고수가 얼마나 순박하고 잘생겼는지를 보여주는 팬비디오가 아니지 않은가. 강동원 클로즈업이 나올 때도 나는 이 영화가 팬비디오가 아니고, '아저씨'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허나 뒤로 가면서 어찌나 고수의 팬비디오스럽던지.
 이 영화는 극 중후반까지 긴장을 유지한다. 긴장-긴장으로 이루어지는 액션 서사 때문에 조금 정신없기는 했지만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에필로그처럼 클라이맥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불필요했다. 영화에서 이뤄놓은 것을 후반부에서 다 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저씨'처럼 영화를 배우의 외모가 다 잡아먹는 게 아니라 내러티브에서 불필요한 욕심이 영화를 잡아먹었다. 어쩌면 감독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초인은 단순히 악당일 뿐이고, 규남은 아주 올바른 청년이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아마추어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만약 이 영화에서 꼭 에필로그를 넣고 싶었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아예 초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한 존재, 그렇다면 우리는 초인에게 제대로 감정 이입을 할 수 없고, 그를 악당으로 치부하게 된다. 초인이 만약 어머니를 죽였다면, 그리고 그를 얽매이는 모든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났다면 우리는 그를 악당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허나 쓸데없는 감상성, 인간다움 때문에 초인은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규남이 우리에게는 더 괴물로 다가온다. 하지만 감독은 규남에게도 일종의 리미터, 제한기를 걸어 놓는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장과 사장 딸, 그의 친구들. 제한기가 하나 하나 풀어질 때마다 규남은 괴물에 가까워진다. 초인처럼 규남에게도 마지막 제한선이 있다. 사장의 딸이다.

 허나 참 답답한 것이, 초인에게는 온갖 대사가 있다. 그는 규남에게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거듭 말한다. 규남은 그를 위협하는 존재다. 초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규남에게는 초인이 애초부터 적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초인을 먼저 이해하게 된다. 초인은 그의 장난감 세계와 그의 과거를 보여주고, 그의 인간다움을 보여준다. 허나 규남이 하는 대사라곤 그저 '넌 누구냐'밖에 없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초인의 이름을 묻는다. 초인은 그 때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규남은 그 때 몸을 날려 초인을 덮친다. 둘이 함께 차 지붕 위로 떨어지고, 죽음의 가능성을 공유하는 순간에서야 둘은 소통하게 된다. 둘 다 타자적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소통. 그제서야, 그것을.

 

 


 '초능력자'는 결국 씁쓸한 비극으로 남는다. 에필로그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초능력자'는 비극이 되어야만 했다. 비극은 모든 게 다 죽어야만 비극이 되지 않는다. '소통의 불가능성'이 바로 비극의 끝이다.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의 소통 시도를 거부하고 그의 고집대로 행하려 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와 소통하려 하지만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소통은 실패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찌른다. 하지만 그가 없어도 그의 나라는 돌아가고, 크레온이 대신 통치한다. '초능력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죽어도 사회는 여전히 시계처럼 돌아가고, 그 사회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미학적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하고 타자적 존재를 배척하는 사회다.
 

 

 


 우리 주변의 '초'능력자


 결국 '초능력자'는 타자에 관한 영화다. 우리 사회에는 울타리가 있다. 그 울타리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웃기고 자빠졌다. 사실 그 울타리는 세금도 내고 얼굴과 머리색이 한국인 표준에 맞아야 하며 소득이 일정하게 있어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있다. 그 울타리는 사실 환상이다. 전쟁이 나면 평범한 사람들은 다 죽는다. 타자들도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타자'를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해 노벨문학상을 탄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사회적 관습에서 밀려난 타자에 대한 이야기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도 제이디 스미스도 어느 경계에도 속하지 못한 타자에 대해 쓴다. 문학은 이제 '타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워낭소리가 인디 영화계에서 '히트'를 쳤을 때, 기존 영화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가? 워낭소리는 이제 타자로 밀려난 인간과 동물의 교감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다.
 초인과 규남은 둘 다 '타자'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초인이 그의 어머니에게조차 거부당했을 때, 그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꿈꾸었다. 규남은 그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려고 애썼다. 초인은 규남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이 너를 만난 건 다 실수였어. 너는 아예 혼자여야만 했어. 이 말은 묘하게도 초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초인은 규남을 통해 자신을 보고, 규남은 초인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이 묘한 거울적 관계, 그리고 규남은 초인을 죽인다. 사실 규남과 초인은 함께 죽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거울이 깨지면 거울을 보고 있던 그 자신의 정체성은 홀로 떠도는 방랑자가 되거나 함께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남은 살아남는다.
 초인이 시선을 맞춤으로써 초능력을 쓴다는 것도 흥미롭다. 어느 누구도 초인과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눈을 '맞추고' 대화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소통을 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이다. 허나 사람들은 초인과 소통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미친 사람을 보면 절대로 '시선을 피하거나'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로 인해 타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에서는 미친 메리라는 사람이 나온다. 미친 메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다. '타자'다. 하지만 사마드는 타자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 순간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미친 메리는 이제 미친 메리가 아니라 그냥 메리라는 사람일 뿐이다.
 초인과 규남은 소통에 실패하거나 너무 그 시도가 늦었던 이들이었다. 영화에서는 일종의 알레고리적 성격을 띄면서 이들의 관계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결국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타자 뿐, 그리고 그 소통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초인처럼 다리 한쪽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관습에 의문을 품는 것, 어째서 이래야 하는지 끝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매트릭스적 뿌리를 보게 되고, 그 뿌리가 달랑거리는 순간 뒤돌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통하는 순간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나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에게 새롭고도 동시에 오래된 이 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사마드는 15년이 족히 넘는 기간 동안 아무도 미친 메리에게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메리를 만진 것이다. 아주 살짝, 어깨를.
 "우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나의 경우, 마음의 반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그냥 지나가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성전에서 싸우고 싶어 합니다. 지하드! 그리고 분명 우리는 밖으로 나와 이것을 거리에서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종국에는 당신의 과거가 나의 과거가 아니고 당신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니고 당신의 해결책이 나의 해결책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진실과 견고함이 하나의 제안이 될 겁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나의 희망은 최후의 날에 있습니다. 선지자 무함마드, 그 분께 평화를. 그분께서는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이 의식을 잃는다고 하셨습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상태, 세상의 모든 잡담이 사라진 상태. 이런 빌어먹을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 그럼 저희는 이만."

                                                    -제이디 스미스, '하얀 이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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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능력자'를 본 다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아저씨'보다 훨씬 낫다고 추천했다. 허나 에필로그를 보지는 말라고 말했다. 트랜스포머처럼 짜투리 영상을 끼워넣기에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 그 많은 생각을 대충 서랍장에 집어 넣느니 흩어진 그대로, 벤야민의 폐허를 쳐다보는 게 더 나았다. 사람들을 더 생각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수 있었다. 강동원과 고수의 연기는 좋았다. 강동원의 외모보다 연기에 더 집중한 건 사실 처음이다. M에서도 강동원의 외모만 눈에 더 들어왔다.
 사실 나는 내러티브가 없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이라도 내러티브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내러티브가 아예 없는 영화로는 '디 워'를 들 수 있다. 그 영화는 정말 명작이다. 명작이라는 것은 그 영화같은 영화가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어법을 내포한다. 오마주도 사양한다.
 하지만 '초능력자'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함께, 조금이나마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 '초능력자'의 장점 중 또 하나는 '장면'이다. '장면'의 설정이 너무 좋았다. 단순히 외모를 부각시키지 않고 그 장면의 내러티브를 녹여낸, 컷마다의 분위기가 좋았다. 규남이 사무실 위쪽의 대들보 천장에서 숨기 위해 오가는 것도 좋았다. 초인과 싸우기 위해서는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위는 그저 허상일 뿐이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허상. 초인은 허상을 꿰뚫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허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번번히 '아저씨'와 비교해서 다른 '아저씨' 팬들이 유감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배우의 비주얼이 탁월하고 나름 내러티브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영화 두 편이었기 때문에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에는 문제 의식 자체가 없다. 팬비디오 그 자체다. 그래서인지 왜 영화제에서 상을 탄건지, 아직도 조금 의문이 남아 있다. 강동원과 고수보다는 원빈을 더 좋아하는데. 왜 영화에서는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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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말이 도중에 더 생겨서 마구 쓰다 보니 어느새 훌쩍 12시를 넘겼다. 늦은 건 처음이라 시무룩하다.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뮤지컬 서편제-계절처럼 되돌아오는, 소리.

 

 

 

 


 뮤지컬 '서편제'를 봤다. 이청준의 소설, 남도 사람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원작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에 대해, 그닥 호감을 보이지는 않는 편이다. 돈은 없으면서 입맛은 더럽게 까다로운 것이다. 이전 국립극장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를 현대극으로 바꾸어 공연했을 때도 나는 아낌없이 악평을 쏟아 부었다. 원작을 읽거나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면, 사실 사람들은 그 내용이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다르게 나타났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호평을 받은 2차 창작물은 사실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악평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왠만하면 2차 창작물을 볼 때에는 기대를 하지 않고 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청준의 '서편제'가 뮤지컬화된다는 소식을 씨네21에서 읽은 후로,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청준의 소설들은 영화, 연극 등 2차 창작물로 번안되는 경우가 많다. 원작이 그대로 영상화되거나 다른 식으로 변용되서 나오는데,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는 이청준의 소설 텍스트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와 소설 텍스트의 가치가 비교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텍스트의 가치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영상의 가치를 드높여 준 작품들이다.
  이청준의 '남도 사람' 시리즈는 임권택 감독 등 수많은 감독들의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만큼 아름답고, 무서울 정도로 단아한 텍스트다. 너무 자세한 텍스트는 독자의 상상력을 막고, 영상화에 있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다. 하지만 이청준은 다르다. 텍스트로만 온전히 이야기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기에, 그는 여백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그 여백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송화의 목소리가 되고, 동우의 이글거리는 햇덩이가 된다.
  변용된 작품들은 또한 제각기 빛을 낸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서편제'가 과연 뮤지컬이 될 수 있을까? 공연을 보러 가는 내내, 내 뇌리 속에서는 저 질문이 번잡하게 떠다녔다. 팔만원 가량 되는 공연을 실제로 보는 건 사실 처음이었다. 이전에 본 조승우 지킬의 지킬 앤 하이드도 사실 친구가 3만원에 좋은 좌석을 양보해 줬기에 볼 수 있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본 동기는 나에게 돈만 들었지 그닥 좋은 공연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과연 내 담배는 남아날 것인가. 오랜만에 본 친구와는 어떤 표정으로 공연장을 나오게 될까?

 

 

 

  길의 계절-길을 가자, 길을 가자.

 

 

 뮤지컬 '서편제'는 정말 뮤지컬이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조화롭게 표현한, 좋은 작품이다. 소도구가 인물을 방해하지 않고, 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 이입하게 하면서도 서양음악과 동양음악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극을 감싸준다. 뮤지컬은 원래 서양에서 나온 음악극이다. 또한 플롯에는 한계가 있다. 오페라처럼 노래로만 치우치지도 못하고, 연극처럼 플롯 위주로 치우치지도 못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둘 다를 외치는 청개구리 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 서양 청개구리로 동양권의 내용을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재 대학로에는 이 나라를 기반으로 한 내용의 창작 뮤지컬들이 많지만, 좋은 연출과 소재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어째서 큰 극장에서는 서양 뮤지컬만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애당초 다루는 게 서양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뮤지컬로 발했을 때 궁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조금씩 반영했다는 소문으로 이제서야 한국식 뮤지컬이 태어나는 건가. 하는 기대가 있었다. 허나 '명성왕후'는 말 그대로 약간의 픽션이 섞인 역사에 불과하다. 이미 정해진 결말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역사를 돌려감기로 보는 것과 같다. 결국 '명성왕후'는 좋은 작품이지만 지루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허나 '서편제'는 다르다. '명성왕후'는 이미 고증된 역사와 결말을 팩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여운 말고는 깊은 공감이나 절절함을 끌어내기가 힘들다. '서편제'의 뮤지컬 인물들은 '깊이'와,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뮤지컬의 인물들은 사실 '깊이'가 있을 수 없다. '깊이'가 있는 인물들은 작품의 주인공이거나, 아주 뛰어난 작품의 인물들이다. 노래 가사로서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만 뮤지컬의 플롯은 노래와 춤이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닥 많은 이야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수많은 연출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허나 사람들은 최우선적으로 '노래'를 들으러, 공연장으로 간다.
 뮤지컬 '서편제'의 인물들은 재미있게도 우리 근처에 있는 인간 군상이면서, 동시에 그 군상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동우와 송화의 아버지인 유봉은 과거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으로 스승에게 설사약을 먹이고 스승 대신 창판에 나갔다. 그 때 스승에게 쫓겨나고, 힘들게 쏘다니며 방황했던 기억 때면에 동우의 반항을 곧이 곧대로 봐 넘기지 못한다. 어떻게든 북을 잡게 해서 소리 쪽에 가까이 두려 한다. 하지만 동우는 '소리'에 쫓겨, 또다른 '소리'로 대피한다. 송화는 부정으로 인해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눈이 멀고 만다. 그리고 소리를 얻게 되었는가? 사실 송화가 얻고자 했던 소리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그 소리는 '유봉'의 집착으로 인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송화의 한이 우리의 무의식에 있던 한을 풀어내 주는 것이다.

 

 

 매력은 인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한지들을 덧붙인 벽 여러 장이 있다. 그 벽들은 움직이면서 배경을 바꾸고, 조명에 따라 한지 특유의 부드러운 색으로 부딪치면서 극 전반에 걸쳐 아련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미군 부대 공연을 위해 자본에 찌든 사업가들이 나올 때 이 벽들은 가만히, 구석에 서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분리라고 본다. '한지'는 매끄럽고 탄력있는 일반 종이에 비해 힘이 없고, 약간 결이 성겨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속에 있는 걸 완전히 가리는 게 아니라 어렴풋이 비춰주면서, 지금 우리는 현대가 아니라 과거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이고, 이 한지의 결처럼 엉겨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한이 어떻게 무대 위에서 표현될 지, 무대 장치를 통해 미리 시사하는 것이다. 공연하기 전 공연장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는 마치 한지가 진짜 바람에 나부끼면서, 소리를 싣고, 기억을 싣고 무대 위로 날아드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 무대 장치가 그냥 '장식'으로만 여겨진다면, 사실 한지고 뭐고 상관없다. 하지만 이 무대 장치는 극의 표현에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가령 어른 동우가 어렸을 때의 동우 자신과 어머니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그렇다. 어른 동우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천천히, 걸어서. 그렇다면 그의 기억에서 가장 트라우마가 되었던 '거대한 햇덩이'를 다시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두 개의 한지 벽으로, 아이 동우와 어머니의 장면은 그림자로-어른 동우는 벽 밖에 휑뎅그레하게 내던져져 닿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 애타게 손을 뻗는 것으로 시간차를 드러내면서도 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또한 송화와 아버지, 그리고 동우가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벽 하나를 두고 빙빙 돌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해 노래하는 것도 좋았다.

 

 

 어쩌면 그 장면은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함께 하는 추억이었기에 더 아름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가는 가족들을 무대 가장자리를 돌게 한다던가, 가로질러 걷게 한다던가 하는 것은 관객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서편제'에서는 빙빙 돈다. 애당초 이 뮤지컬 '서편제'는 일종의 순환, 모든 것이 힘들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원처럼 순환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연출 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심 봉사 이 말을 듣고

 에으이 청이라니 이게 웬 말이냐
 내가 죽어 수궁을 들어왔느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갑갑허여라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어디 어디 어디 내 딸 좀 보자

 두 눈을 끔적끔적끔적거리더마는
 끔적끔적끔적거리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심청가 中-

 

 

  '서편제'가 가리키는 것은 '순환성'이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사람들이 아무리 집착을 하고 청춘의 열기 때문에 헤매여도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원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다시 한번 헤엄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서만, 우리는 잃어버렸던 것을 찾을 수 있다. 송화의 눈은 동우가 떠났을 때부터 멀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동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송화는 눈을 감는다. 송화에게 동우는 눈꺼풀 안쪽에 남은 잔상이다. 아버지는 송화의 눈을 확실히 멀게 한다. 이는 동우에 대한 상실감을 송화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송화의 한은 그 뿌리를 더 확실히 돋궈 안쪽으로 파고든다.

 심봉사가 어디, 어디, 어디, 하면서 천천히 안간힘을 쓰는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안타깝고 서러웠을까. 송화가 눈을 뜨는 건 동우의 귀환이다. 심봉사처럼 '번쩍'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아도 동우가 자신 앞에 돌아와 있다는 걸, 그리고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기에. 송화는 기쁘게 미소 짓는다.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천천히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송화와 동우, 둘 다.

 

 

 

  남도 사람 이야기-한과 승화의 순환

 

 2차 창작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원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보통은 원작을 잘 반영했느냐 아니면 반영하지 못했느냐인데, 이 뮤지컬 '서편제'는 소설 원작과 방향이 다르다. 남도 사람 시리즈 1,2에 해당하는 '서편제'와 '소리의 빛'에서 어느 정도 취해온 감도 있지만, 이청준이 서술하는 '서편제'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만 같고, 나머지는 거의 다 다르다.
 우선 뮤지컬에서는 동우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동우가 송화를 찾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그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내려가는 순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이런 식으로 극을 진행해 나가면 산만함의 극치가 될 것이다. 동우는 송화 주변을 떠도는 행성이고, 송화는 소리의 힘으로 동우를 끌어당긴다. 소설에서는 다르다. 송화의 소리에 대해 동우가 집착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해, 좀 더 깊고 비틀린 심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동우의 '극복'이 주가 된다. 동우는 거대한 햇덩이의 소리는 피할 수 없고, 마치 자신의 부모처럼 안타까운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1차 '극복'을 하며, 자신이 찾던 것이 궁극적으로는 마음 속에 흔적을 남겼던 송화였다는 것을 알면서 2차 '극복'을 한다. 마지막으로 송화와 만나게 되는 순간, 뮤지컬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린다.

 

 

 기억은 희미해져 가는데
 모든건 추억이 되는데
 뭔가 그냥 가만두질 않고 날 붙잡는 건
 뭔가 그저 흘러가질 않고 돌아보는 건
 그건 너의 흔적이야
 내게 남긴 너의 흔적

 

                                        -뮤지컬 서편제, 흔적 中-

 


 소설에서는 송화와 동우가 동침을 한 다음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떠나게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동우는 그 후로도 송화를 계속 찾아다니고, 송화는 피한다. 뮤지컬에서는 다르다.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송화와 동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둘을 이어주는 건 소리라는 것을, 한은 한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부드럽고 완만한 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뮤지컬 속 송화와 동우는 같이 소리를 하고, 송화는 심청가를 하면서 동우라는 것을 재차 깨닫고 송화 자신의 한도 극복해 낸다. 상호 간의 해소이다.
 어쩌면 뮤지컬의 결말에서, 더 이어진다면 소설처럼 둘은 헤어질 수도 있다. 허나 뮤지컬의 결말에서 시간은 멈춘다. 무대의 조명이 꽃이 피어나듯 움직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여운을 남기면서 멈춘다. 순간 관객들도 숨을 멈춘다. 이청준은 영화나 소설 등 각 컨텐츠에서 '서편제'를 다루는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름'은 더 다채롭게 피어나가면서, 각자의 색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원작에 매몰되거나 천천히 스러져 죽어가는 것 없이.

 

 

 

 

 

 ...떴구나.

 

 차지연의 심청가는 나름 강단이 있고 좋았다. 허나 뮤지컬 극의 느낌이 많이 묻어났다. 안타깝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지연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기존 OST에서 들은 차지연의 목소리는 가사만 바꾸면 외국 배우라는 느낌이었다. '서편제'에서 차지연의 목소리는 곧게 솟아올랐다가 종이 비행기처럼 팽글팽글 돌면서 여운을 남기며 내려간다. 이자람의 '심청가'도 물론 좋다. 사실 이 전에 판소리를 완창했다는 점에서 더 안정되고 더 깊은 감정을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JK 김동욱이 유봉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걸 보고, 그 자체로도 신기하기도 했으나 의외로 판소리극에 목소리가 어울린다는 것도 신기했다. 허나 아직 어색했다. 힘을 과도하게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유봉이라는 역할이 약간 고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만큼 목소리의 해석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또 동우 역의 김태훈의 연기에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약간 소년 풍으로, 치기가 어리면서도 앳된 그 분위기가 이 '서편제'와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허나 이 '서편제'의 메시지는 약간 산만한 감이 있다. 결국 동우가 헤맨 것은 '청춘', '방황할 시기'였다는 것이고 순환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인데, 1부에서는 각 에피소드의 비중이 너무 비등비등해서 밋밋했고, 2부에서는 급격하게 플롯이 전개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했다. 1부가 커피라면 2부는 티오피다. 1부는 왠지 긴 도입부를 연상케하고 2부부터는 전환점으로 급격히 치닫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밋밋함을 조금 더 조절해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송화와 동우의 관계는 이 뮤지컬 ;서편제'의 계기가 되고 결말이 된다.
 음악이 총 30여 곡이 되는데 그 중 국악을 제대로 활용한 노래가 10편 남짓 된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음악 전반이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딱 좋았다. 플롯은 단조로워서는 안 되지만, 이 '서편제'의 음악은 단조롭고 그 여백이 있으면서도 여백이 여백으로 느껴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아이들의 코러스 라인이 좋기는 했으나 무대에서 가까이 듣지 않으면 초반에 잘 들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아역의 문제점이 바로 그 점이라는 걸 충분히 알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바로 이 극의 시작을 장식한다. 가사는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엔딩 부분에서 송화와 동우의 조우, 그리고 송화가 심청가를 부르는 장면은 좋았다. 송화는 심청가를 부르면서 '눈을 뜨다'라는 심봉사의 모습을 자신이 눈 앞에 있는 동우가 동우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일시한다. 소설에서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이 엔딩은 그만큼 뮤지컬 '서편제'를 가치있게 한다.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면 사실 표가 얼마나 비싸든 상관없을 것 같다. 그만큼 감동적이다. 허나 조명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노란색과 보라색 원으로 마치 꽃이 피어나듯 위에서 쏘아 내리는 조명은 그 색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색으로 입체성을 띄면서도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좋다. 하지만 노란색과 보라색은 묘하게 독을 품은 꽃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미군 부대 면접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색깔이 아니던가. 차라리 동우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송화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단아한 색으로 바꾸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를 가리고 있던 한지 벽들이 걷히고, 출연자 전원이 처음부터 나와서 인사를 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양식으로 인사를 곧장 하기보다는 한국식으로, 강렬하게 마지막 인상을 남기는 게 물론 좋은 시도기는 하다. 허나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왜 기타노 다케시의 '피와 뼈'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너무 비장해서 조명을 좀 더 밝고 깨끗하게 쓰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차라리 절은 어떨까? 조용히, 두 손을 맞대고 깨끗한 흰색 조명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다.
 뮤지컬 '서편제'는 11월 초에 막을 내린다. 좋은 작품이다. 뮤지컬 '렌트'는 '라 보엠'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라 보엠'에서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을 다루고, '렌트'에서도 비슷하지만 사회 문제인 에이즈와 관련해서 더 활발하게 풀어나간다. '라 보엠'은 오페라 그 자체로 좋다. 만약 렌트가 오페라가 되었더라면 그닥 호평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뮤지컬은 자유로운 변용이 생명이다. '리틀 샵 오브 호러스'와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보라. '서편제'는 원작 텍스트가 있지만, '렌트'처럼 사회상-판소리가 점점 줄어가고 외국 문화가 밀려 들어오는 근대-를 반영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긍하게끔, 노래와 함께 쉬이 풀어나갈 수 있게끔 한다. 서양음악 뿐이던 뮤지컬 속에서, 한국의 뮤지컬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사실 뮤지컬을 꼭 현대를 배경으로 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허나 우리는 강박적으로 현대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룬다. 원작의 탄탄함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플롯의 탄탄함, 사람들은 영상화와 연극이 이제 사람들을 위한 예술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럴 수록 우리는 텍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텍스트야 말로 한국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뮤지컬 '서편제'는 그 텍스트에서 또 다른 한국의 모습, 순환성을 보면서 한국형 뮤지컬의 뜻있는 시도를,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시기는 바로 문화가 바뀌는 시기다. 그 때 수많은 문화들이 학살되고 새로운 문화들이 자라난다. 어떻게 보면 행운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불행이다. 그럴 때의 이야기들이 더 많지 않겠는가. 단순히 현대나 너무 격렬했던 민주화 운동, 혹은 아예 과거를 그려내는 것보단 그 변화의 순간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구식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지나쳤던 보물찾기의 쪽지를 발견할런지 누가 아는가. 그 터닝포인트를 찍어낸 뮤지컬 '서편제'는, 과거 보물찾기에서 번번히 실패하던 나한테 보인, 옹이구멍 속에 꽂힌 보물찾기 당첨 쪽지와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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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전번에 이자람 밴드가 집 근처에 있는 야외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도서관으로 바삐 걸어가다가 언뜻 그 밴드의 공연을 듣게 되었는데, 묘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힘있게 뻗어가면서도 주먹에 쥐고 있는 흙들을 천천히 흩뿌리듯이, 흘러나오는 감정의 응어리가 인상적이었다. 뮤지컬 '서편제'에서 '송화' 역을 맡았다는 기사를 봤을 때 과연 어떤 '송화'를 연기할 것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날 본 공연은 '송화'역에 차지연이 캐스팅된 쪽이었다. 세 명의 캐스팅 배우들의 목소리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세 개의 공연을 한꺼번에 연출하는 기분이라고 했던 연출자의 말이 떠올랐다. 씨네 21의 기자분은 이자람 씨는 딱 천재 국악인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차지연 씨는 소리 때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한 비극성 짙은 인물, 그리고 민은경 씨는 반항적이면서도 강단있는 인물. 사실 이자람 씨가 더 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듣고 오니 이건 우위를 쉬이 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확실한 건, 차지연 씨의 그 깨끗하면서도 곧은 음성이 점점 한이 뚝뚝 떨어지는 한 맺힌 소리로 변해가는 것이 나는 정말 짜릿했다는 것이다. 몽테크리스토 등 서양 쪽 뮤지컬을 하시던 분이지만,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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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차지연 씨가 뮤지컬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축하합니다.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저지대의 아름다움

 

 

 말 그대로,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몇번 읽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외국어 번역이라 어려울 수도 있다.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데 이 '저지대'에서는 그 모든 게 무너진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부딪치고, 뮐러가 예상했든 안 했든 이미지가 태어난다. 다른 이미지가.

 

 

해야할 일

서편제 리뷰

박성원 작가론 쓰기

편혜영 작가론 쓰기

여성과 심리학 레포트

클래식코리아 리뷰 쓰기

드라마 대본 시놉시스 쓰기

 

쓸 것은 너무나도 많은데 내 시간은 적다. 하지만 내일은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를 읽으리라.

 

2010년 9월 28일 화요일

진짜 유럽을 맛볼 사람들을 위해-김보연의 '유럽 맛보기'

 

 


 '유럽 맛보기'라는 책은, 다른 책들처럼 그 나라의 명소만을 소개하는 게 아니다. 명소라는 곳은 우선 맛있지만 비싸고, 예약을 해야 하거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저번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던 선배는 나름 미슐랭 가이드에서 극찬하는 곳을 예약했지만, 가격에 눈물짓고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음식, 그걸 먹는 게 유럽을 맛보는 것일텐데. 우리는 깨끗하고 편한 곳만 찾아다니느라 어쩌면 겉핥기로 유럽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레스토랑은 대부분 음식을 다른 나라 사람 입맛에 맞춘다. 선배는 사실 그 레스토랑에서 먹은 파스타보다 호텔이 있던 동네 구석 쪽의 초라한 파스타 가게가 더 맘에 들었다고 말했다.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맛도 좋았다고. 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조용히 칼질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며 접시가 서로 부딪치는 곳이 더, 유럽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참 놀라운 것이, 저자는 우리가 슬쩍 지나칠 수 있는 유럽의 다른 음식들까지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인이 갈비찜은 알지만 곱창구이는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갈비찜이라면 넌, 껍데기와 곱창이야. 껍데기와 곱창구이가 얼마나 맛있는데. 저자는 스스럼없이 사람들이 소주 한잔과 기울이며 먹게 되는 안주들을 내밀 것이다. 그 안주들에서는 온기가, 그리고 즐거운 냄새가 풍길 것이다. 빵과 파스타, 햄, 치즈, 마카롱, 수많은 야채들과 젤라토.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직접 가지 않아도 좋고, 직접 가는 사람들에게는 유럽을 좀 더 맛볼 수 있게끔 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이탈리아표 자장면도 배달이 되나요?

 

 

 

 

 

 저자는 볼로냐를 '먹보들의 도시'라고 부르고 있다. 놀리면서도, 은근슬쩍 애정을 보인다. 순대와 비슷한 테린을 소개하고, 메밀부침이 떠오르는 크레이프를 소개한다. 사실 우리가 아는 크레이프는 일본식 크레이프다. 반죽보다 그냥 그 안에 든 게 중요한 것. 홍대입구에서 먹는 크레프가 아마 그 일본식 크레프일 거다. 딸기와 치즈케이크, 온갖 소스. 먹기만 해도 살이 푹푹 찔 것 같다. 하지만 유럽의 크레이프는 다르다. 봉평에서는 메밀부침에 이것저것 속을 넣어 사람들의 배를 든든하게 해준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크레이프가 식사용으로 쓰인다. 봉평에 문학 세미나로 갔을 때 이 메밀전병을 세 번 먹었는데, 그 세 번 다 너무 맛있어서 몸부림을 칠 지경이었다. 아마 유럽의 크레이프도, 아주머니들이 덤덤하게 부쳐주면서 '먹어!'라고 내밀테지만, 그 끝에는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걱정스런 물음이 묻어 있을 것이다.
 또한 볼로냐의 자장면, 탈리아텔레 알 라구가가 있다. 저자는 볼로네즈 스파게티가 여기서 파생된 음식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스파게티처럼 우아하게 면을 후루룩 먹는 게 아니라, 자장면처럼 흡입하듯이 먹는 것. 그리고 내숭을 떠는 게 아니라 배고픈 자의 배를 가득, 듬직하게 채워준다는 것을 말해준다. 라자냐도 마찬가지다. 내가 먹어본 라쟈나는 사실 모 프렌치 부페에서 먹은 게 다다. 라자냐는 왠지 살이 안 찔 것 처럼 생겨서, 먹어도 배가 안 부를 것 같았는데 유럽에서는 다르다. 온갖 기름진 것들을 다 꾹꾹 우겨넣고 겹쳐넣고, 그리고 양심상 고기를 먹다가 상추를 생으로 집어먹듯 라자냐 사이에 시금치를 껴넣는다. 수제비, 만둣국과 비슷한 토르텔리니 인 브로도도 나온다. 저자는 힘든 자신의 몸을 일으켜 주는 수프였다고, 그렇게 말한다. 이 음식들은 모두 이 곳의 사람들이 먹고 자란, 엄마의 음식들이다. 사랑스럽지 않은가. 이들도 살아가고, 숨쉬고, 웃고, 먹고, 떠든다. 저자가 천천히 짚어주는 음식들을 보면서, 우리는 입맛을 다시고,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한테 하나만 물어보자. 이탈리아식 자장면은 배달, 되나? 안 되겠지...

 

 

 

 스팸 한장에 흰밥 뚝딱

 

 

 

 

 우리는 사실 '햄'이나 '소시지'를 그냥, 전세계적으로 똑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보통 먹어야 겠다고 달려드는 건 치즈 아니면 파스타, 혹은 타르트다. 저자는 그런 이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면서도 식사용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식사용이라고. 빵들도 딱히 화려하지 않다. 우리에게 쌀이 밥이라면 유럽 사람들에게는 빵이 밥이다. 밥에 괜한 기교를 부리는 건 솔직히 영양밥으로도 충분하다. 푸알란의 미슈라는 빵이 바로 그 좋은 예시인 듯 싶다. 투박하고 왠지 모르게 끌리는 빵. 우리의 쌀밥처럼. 화려한 장식이나 단호박 크림치즈가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여튼 햄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이전에 친구 덕분에 어떤 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생햄을 먹어본 적이 있다. 그 때 그 쌉쌀한 맛과, 참을 수 없는 누린내라니. 코를 막고 먹었지만 사실 그 맛은 아직도 내 혀 끝에 남아 있다. 저자는 햄 '쿨라텔로'를 소개한다.

 일단 다른 햄과는 달리 첫맛에 좀 톡 쏘는 느낌이 든다. 삭힌 홍어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자연적으로 삭힌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부드러운데 은근히 고소하면서 입안 가득 담백한 풍미가 퍼진다. 조금 단맛도 난다. 30개월은 좀 더 센 맛인데, 신맛이 조금 감돌면서 담백하다. 확실히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햄의 맛, 타고는 미식가는 못 되는지 첫입에 '아, 이 맛이다'라는 황홀한 느낌은 아니다. 외국 사람이 묵은지의 맛을 느끼기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겠지.

 저자는 만약 입에 맞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한번은 꼭 먹어봐도 좋을 음식이라고 말해준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들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송로 버섯도 마찬가지다. 송로 버섯은 사람들이 듣기만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아주 비싼 가격으로, 찔끔 먹어본 적이 있을텐데 송로버섯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해주면서 무조건 맛있다. 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안 맞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다른 나라 음식이고, 묵은지의 맛을 못 느끼는 외국인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해준다. 덕분에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도 한 시름 덜게 된다. '하몬 이베리코'도 저자가 소개하는 햄인데, 스페인의 정취를 담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영화 '하몽하몽' 알아요? 그 '하몽'이...
 그래서 이 책은 다른 미식 관련 책들보다 더 다가가기 쉽고, 얻는 것이 더 많다. 만약 유럽에서 미식 여행을 하려고 해도 돈이 그닥 없고, 힘들다면 책에 실린대로 여행을 해봐도 좋겠다. 물론 비싼 음식들도 있지만, 그만큼 저렴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도 있다. 아니, 좀 더 많은 편이다.

 

 


 고기 반찬이 나는 너무너무너무 좋더라

 

 내가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받은 부분은 바로 '오피치나 델라 비스테카Officina della Bistecca'였다. 세계 최고의 푸주한인 다리오 체키니가 고기의 모든 부위를 다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일주일에 단 한번 열리는 소고기 세미나. 사실 우리 나라에서 세미나라는 말은 학술 분야에서나 쓰인다. 음식이라니. 이들은 음식을 하나의 철학으로 승화시키고, 그 철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식객' 덕분에 음식의 도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게다가 테이블보 위에 엄숙하게 찍힌 말이라니.

 

 속을 비우고 와라. 우리는 조금만 먹을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사실 이 파티 부분을 읽는 동안, 입에서 절로 침이 흘렀다. 특히 판차노 스테이크의 단면을 찍은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살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사실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뭘 먹는다는 게 고역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저도 모르게 소리지르고 먹고 이야기하고 웃게 된다. 파티기 때문이다. 보면서 내내 그 분위기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또 어떻게 음식점을 예약해야 하는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물론 다른 미식가 분들도 책을 펴낼 때 그렇게 쓰겠지마는 왠지 약을 실컷 올린 다음에 '너도 한번 먹어봐'라고 약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 유럽이여. 한입 베어물면, 온갖 맛으로 혀 끝에 스며들.

 

 

 

 

끝나지 않는 성장통을 위하여-'안녕,바다'

 

 

 


 

 어쩌다 보니 플럭서스 뮤지션의 리뷰만 두 편이나 연거푸 쓰게 되었다. 하지만 '윈터플레이'와 '안녕바다', 둘 다 좋은 음반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즐거웠다. 들쑥날쑥한 기온에 기운이 쭉 빠지려는 찰나, '윈터플레이'는 기침을 멎게 해주고 '안녕바다'는 지친 몸을 쭉 일어나게 해줬다. 꼭 약장수라도 된 기분이긴 하지만, 그만큼 플럭서스의 음악들은 매력적이다. 사실 내가 플럭서스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플럭서스의 뮤지션들이 한데 모여 부르는 캐롤과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 그리고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의 유튜브 영상 때문이다. 하와이안 풍의 여유로운 분위기, 발랄한 캐롤, 사실 SM이나 JYP 등, 나름 가수를 배출해 낸다는 소속사들의 가수들이 모여 노래를 부를 때면 그냥 노래를 끄고 얼굴만 봐도 되겠다 싶었다. 사실 댄스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 거다. 게을러서 그런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너무 빠른 템포로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 음악이 좋다. 게다가 이렇게 기온이 더웠다가 갑자기 추워지는 요즘에는 더더욱, 재촉하는 것보다 좀 느긋하게 풀어주는 음악이 좋지 않겠는가.
 '안녕바다'의 보컬은 사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난 뒤로부터 주목하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능숙하게 꺾어주는 목소리나, 애교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비음. 그리고 파격적인 헤어스타일.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에서 나왔을 때도 한눈에 알아봤다. 꼭 '홍당무' 같다. 그런 밴드의 음악을 듣고 있자면 피곤함도, 우울함도 사라진다.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따라 부르고, 즐거워지는 것이다.

 

 

 

 

 


 영원한 피터팬들

 

 '안녕바다'의 멤버들을 보면서, 나는 왜 '피터팬'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새까만 칠판에 끝없이 흰 분필로 별을 그리고, 그려가면서 해답을 찾는 소년의 모습, 소년은 어른이 되기를 꿈꾼다. 어른이란 게 뭘까? 사랑이란 게 뭘까? 어린 청소년의 음악이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궁금해 하고 궁금해 해야 한다. 궁금해 하기를 멈추는 순간, 모두는 성장하기를 멈춘다. '안녕바다'의 멤버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뚱하게 입술을 내밀고 우리를 바라본다. 앨범재킷이 그들의 음악을 나타내는 한 컷이라면, '안녕바다'는 멋진 앨범 재킷을 찍은 셈이다.
 '내 맘이 말을 해', '별 빛이 내린다', 'Soon', 'Beautiful dance',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별'은 이들의 앨범 속 음악을 이루는 소재이자 '희망'을 나타낸다. '별'은 피터팬의 팅커벨, 그리고 그들의 배가 향하는 목적지다. 성장 중인 음악, '안녕바다'의 노래는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나는 사실 어떤 가수든 '1집'에 더 주목하는 편이다. '1집'은 그 가수의 갓 태어난 모습을 아낌없이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로 자라날지 모르는 새싹이기 때문에, 다른 경험이 많은 뮤지션들과 달리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내가 추측할 수 있다는 것-에 더 마음이 두근거린다.
 피터팬들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끝없이 자라나는 피터팬', '안녕바다'의 멤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다 자랄까? 우리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젓는다.
 
 
 작은 별이 되줄래?

 

 

 

 

 

 

 '안녕바다'의 멜로디는 분명 밴드의 음악이다. 밴드의 음악의 기반은 가장 쉽게, 기타로 이뤄진다. 하지만 '안녕바다'는 피아노의 건반음이 주축이 된다. 아니면 살짝의 전자음, 일렉트로닉하면서도 절대 전자음에 주축을 빼앗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그들의 음악, 좀 더 변용된 밴드 음악으로서의 서정성일지도 모른다. 클래지콰이가 플럭서스의 일렉트로니카의 묘미를 보여준다면, '안녕바다'는 밴드 특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욕심을 낸다. 조금 더, 하나만 더. 별을 잡기 위해서.
 조금 아쉬운 점은, 트랙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플롯의 기승전결처럼 잘 맞는 곡들은 좋지만 조금 더 많은 시도를 했다는 걸 보여줬으면 했다. '안녕바다'의 노래가 특히 맘에 들었던 나로서는 더더욱. 다섯곡이 적다고는 할 수 없을테고,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표시일테지만. 어쩌면 나는 그들의 2집을 더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나 외국의 밴드들을 보면 보컬에 힘을 싣기 보다는 멜로디에 힘을 싣는 경우가 많다. 멜로디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디는 어떻게 보면 그림처럼, 언어의 장벽을 쉬이 뛰어넘고 다른 사람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천사의 날개다. '안녕바다'의 음악, 그리고 다른 플럭서스의 뮤지션들의 음악이 다른 해외 뮤지션들에게 소통할 수 있는 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녕, 바다.

 

 

 

 

 '작은 별이 되줄래, 내 어둠이 깊을 수록 넌 더욱 빛날 테니까.' '안녕바다'의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의 주 가사다. '안녕바다'는 멜로디에만 무게를 두는 게 아니다. 가사에도 신경을 쓴다. 가사 덕분에 이 멜로디는 더욱 빛난다. 바다 속에 가라앉을 수록, 우리는 어둠을 본다. 그래서 두려워하지만 안녕바다는 속삭인다. 괜찮아! 바다가 깊을 수록, 너는 더욱 빛날거야. 소년처럼, 그들은 뚱한 표정으로도. 이 세상을 넉넉히 헤쳐나갈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어둠'을 '빛'을 더 빛나게 하는, 단순히 무거운 게 아니라는 것을 전환시키는 힘을 믿는다.
 물론 단순히 낙천적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 또한 고통이 있다. 기나긴 성장통. 'Beautiful dance'는 그 성장통의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를 던져 내 춤에 숨막히게 해 또
 싸늘한 바람이 부는 거리에 혼자뿐이었어

 

                                            -'Beautiful dance' 中, '안녕,바다'-

 

 올드보이에서 나오는 문구가 있다. 웃어라, 세상이 함께 웃을 것이다. 하지만 울 때는, 너 혼자만 울 것이다. 성장통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거리에는 나 혼자 뿐이기에 바람은 더 싸늘해진다. 하지만 안녕바다는 말한다. 괜찮아, 걱정 말라니까. 별로 더 빛날 거라구. 그러니까 우리, 울지만 말고. 안녕, 바다.

 

 

 

2010년 9월 26일 일요일

오늘밤은 당신과 함께-윈터플레이


 리뷰를 신청했을 때,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어떤 케이블 프로그램에서 윈터플레이와 알렉스가 함께 캐롤을 노래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말 좋았다고. 그 때, 알렉스의 목소리에 한창 빠져있던 참이었다. 허나 그 때 캐롤을 듣고, 윈터플레이라는 그룹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윈터(winter)가 들어가는 걸 보니 겨울, 겨울에 캐롤을 부르는 그룹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몇 년 뒤에서야, 윈터플레이라는 그룹이 단지 캐롤만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멋진 뮤지션들이 모인 플럭서스에 속한 그룹이라는 것만으로도, 신뢰감이 저절로 생겼지만, 그 때 여자 보컬의 부드러우면서도 호랑가시나무처럼 딱딱 떨어지는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윈터플레이의 음악은 팝과 재즈가 섞인, 사실 장르라는 경계가 필요없는 음악이다. 단순한 후크송이나 클래식한 게 아니다. 그래서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두 경계에 선 사람은 경계를 무너뜨린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된다. 눈 밑에는 수많은 것들이 고루 잠든다. 어떻게 보면 눈이 가장 평등하게, 모든 걸 덮고 새하얀 백지로 돌리는 것이다. 윈터플레이의 음악은 어디에서든 잘 스며든다. 플럭서스의 뮤지션들의 공통된 장점이기도 하지만, 윈터플레이는 그 중에서도 묘하게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대부분이 영어가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허나 가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친숙하면서도 다정한 멜로디, 그게 바로 윈터플레이의 매력의 원인이다. 우리가 가사를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멜로디를 흘려 보내기 쉽다. 첫키스가 기억에 남듯 멜로디를 처음에 듣는 건 뮤지션의 전반적인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사가 마냥 허튼 것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멜로디를 듣고, 그 다음에 가사를 음미하면서 음악을 몇번씩이고 듣는 거다.

 

 또 하나, 재즈는 대중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강렬한 애드립과 익살스런 멜로디, 씩 웃는 웃음과 즐거운 연주. 허나 지금은 클래식과 재즈가 한 데 묶였을 정도로 고전 장르가 되어버렸다. 윈터플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마저도 슬쩍 넘어가 버린다. 재즈라고 해서 무게를 잡거나 무조건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연인과 와인 한 잔 기울이면서 듣는 게 아니라는 것. 골방에 틀어박혀 외롭게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의 곁에 앉아, 나긋나긋한 허밍으로 들려주는 멜로디가 바로 윈터플레이의 재즈라는 것을.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란 없다. 완전히 새로운 문학도 없다. 예술은 그렇다. 미학자 와이츠는 가족유사성을 통해 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긴다고 말했다. 또렷한 본질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조그만 교집합만으로도, 유사성을 인정받으면서 점점 횡적이고 종적인 넓이를 넓혀가는 것이다. 윈터플레이는 '세월이 가면' 등의 예전 음악을 팝-재즈로 다시 한번 해석한다. 새로운 멜로디를 들으면 사람들은 묘하게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낯익은 멜로디가 재즈로 변했을 때, 그 멜로디의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빅뱅이 힙합으로 바꿔 불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식상하다고 혀를 찼던가, 아니면 좋다고 박수를 쳤던가?

 

 

 

 'Don't know why'는 보컬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와닿는 곡이다. 사실 크리스마스 파티 때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날,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세월이 가면'은 멜로디 전반에 깔린 약간 하와이안 풍의 음색과 함께 지난 명곡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트랙이었다. '투셰모나모'는 재치있는 스냅과 깔끔하게 끊어지는 보컬의 목소리가 꼭 한밤의 카페, 그 곳에서 혼자 들어도 좋을법한 곡이다. 주가 되는 여자보컬의 목소리에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목소리, 그리고 허밍이 점점 깊어만 가는 가을과 겨울의 밤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어쩌면 윈터플레이의 이번 앨범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점점 길어지는 밤을 위해 나온 곡들일런지도 모른다. 밤의 층을 더 깊게 해주면서 그 끝은 아련하고, 아름답게. 끝을 바라지 않는 누군가와의 왈츠처럼. 로맨스의 계절에 부드럽게 스며들 수 있는, 딱 맞는 노래다. Moon over bourbon street도 추천한다. 고풍스러운 음색과 함께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음악. 밤의 거리를 걸으면서 누군가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으면 좋을 법한 노래다. 달빛은 쏟아지고, 당신은...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죽음에 이르는 병

 

 

 

 

 

역사는 영원히 투쟁하고 있는 두 명의 전사의 이미로 표현되는 악무한과는 전혀 무관하다. 진정한 정치가는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상황을] 계산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폐절하는 것이 경제와 기술 발전의 거의 계산 가능한 시점(그것은 인플레이션과 독가스전에 의해 예고되고 있다)까지 완수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불꽃이 다이너마이트에 닿기 전에 타고 있는 도화선을 잘라야 한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中 ‘화재 경보기’-

 

2010년 9월 17일 금요일

My favorite things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저 노래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렸지. 영어라는 이유로 친구와 어눌한 발음을 섞어가면서 불렀던 저 노래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세상이 온통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다면 어떨까. 엄하게 질책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도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청준은 정말 랜덤캐릭터에서도 운수가 좋게 걸리는 대박 캐릭터...혹은 아무리 짜맞춰도 백분의 일 확률로 나오는 고퀄리티 캐릭터. '축제'를 읽었는데 너무 좋고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과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연인' 보러 간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도 사서 읽어야 하는데 어디서 산담? 숭문당에서 사오나... 멀어서 왠지 가다가 병이 도질 듯 하다. 이제 병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쳤다. 사실 아픈 사람들일수록 입을 다문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그 동정의 시선이 너무 힘겨워서. 어제도 세미나에 끝까지 참석하려 들었다. 고등학교 때 그 감기에 걸려서 눈꺼풀이 뜨겁게 내려앉을 때도 억지로 교과서를 읽었다. 사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나중에, 좀 더 약해졌을 때 그냥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나한테 있는 것이라곤 내 몸뚱이 하나 뿐, 내 지식은 사실 쓸모없고 보잘것 없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궤변가, 위선자. 완전히 착하거나 완전히 못되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부럽다. 애매모호한 것만큼 최악의 상황인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 착한 척 한다 말하지만, 우리는 착한 척 해야 한다. 착하다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왜 다들 나쁜 의미로 받아들일까. 우리는 착해져야 하는데.

 

 김진환 식빵집에서 오랜만에 식빵을 사고, 몇덩이 잘라서 990원짜리 자몽과 함께 도서관으로 소풍을 가야 겠다. 천천히 걸어가면 괜찮겠지. 하면서. 세시쯤 와서 밀린 글들을 다 써야 한다. 눈 앞이 깜깜하다.

 

 헤드폰 수리를 어떻게 맡겨야 하나. 크레신 헤드폰이 단선이 되었다. 다른 헤드폰을 사야겠다. 이어폰으로 쓰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지만 난 이어폰을 끼지 못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상황이지 아우슈비츠 당시의 상황이 아니다. 그 당시 상황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대해 그냥 다행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그 상황까지 같이 무시해버리고 있다. 착한 척 손 내밀지 마.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군대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추억들로만 이어져 있는 앨범이 아니다.

 

 난 강정 시인이 약간 나르시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기는 이 사람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2010년 9월 16일 목요일

'땅의 여자'-'도시의 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본격 농촌 다큐멘터리 영화, '땅의 여자'를 보았다. 1년 반 동안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찍은 다큐멘터리인 만큼, 보고 있노라면 점점 영상이 친밀해지는 것을 느낀다. 다큐멘터리란 어떻게 보면 '타자'를 이해하는 한 수단이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인물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땅의 여자'는 '대추나무 사랑 열렸네'도 아니고 '관촌수필'도 아니다. 단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거쳐 이 모든 걸 다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해시키지 못할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계몽'을 꿈꿔서는 안된다. '계몽'을 꿈꾸는 순간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극영화가 되어버린다. 친구는 이 영화가 '농촌으로 오라'는 구호의 영화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줄 알았다. 허나 아니었다. 이 영화는 정도를 잘 지켰다. 더 나아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얕지도 않은 적정의 선을 지킨 내용이었다.

 

 

 

 마술환등에서 튀어나온 여자들

 

 현 20대의 사람들 중 어느 정도는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 '도시의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노인들이 있고 가끔 농활로 가서 고생을 하는 농촌, 사실 이 농촌은 그들에게 귀향해야 할 선험적 고향이 아니라 그냥 '타자'다. 농활을 가도 '잠깐 갔다 오는 게 재미'라고 생각할 뿐,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해한다는 게 단순히 그 곳에 가서 살아야 한다거나 그들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화두는 바로 '농수산물 적정 가격대'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벤야민은 도시를 거대한 마술환등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계몽적인 도시인이 되었다고 하나 사실 물신주의에 빠진 맹신자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이나 부처가 아닌, 물질을 신으로 믿는다. 허나 폴란드 망명국가의 지폐들을 보라. 국가가 사라지는 순간, 그 지폐들은 사라진다. 마술환등의 배터리는 언젠가 꺼지게 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마술환등에 빠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을 마술환등에 빠졌다고 봐야 한다. 물건을 사고 파는 주체라고 여기지만 사실 인간은 취업활동에 스스로를 내보내면서 인간의 존엄성까지 폐지한다. 결국 상품으로 자신을 내보낸다. 허나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촛불집회도 마찬가지다. 집회에 가면 검찰에 잡혀서 직업활동에 영향을 받고 감찰을 받으니 절대로 하면 안된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인다. 좌파 우파를 가르자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 나라 우파는 우파가 아니다. 그냥 불법 점거한 망나니들인 것이다. 진짜 우파라면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지켜야 한다. 품위도 없다. 일명 '모닝구 무스메'를 보라.


 

 

 

 

 이 영화, 영상이라고 부르겠다. 영상에서는 '민주노동당'에 든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운동을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간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농촌에 와서 살아라, 시집와라가 아니라 이들의 존재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시민이 아니다. 농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도시에 가서 집회할 권리가 있다. 허나 톨게이트에서 경찰들이 막는다. 꼭 이주민들을 막는 몸짓과 유사하다. 다른 사람들은 가도 좋지만 당신들은 타자이기 때문에, 불온한 타자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식이다.
 이들은 청와대에 테러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순신 동상의 검을 빼앗으러 가는 게 아니다. 청계천 콘트리트를 깨러 가는 게 아니다. 그냥 시위하러 가는 거다. 시위할 때 전경을 때리려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를 뒤엎으려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를 뒤엎는 건 이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다. 그래서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미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들을 막는다. 마술환등은 이 권위의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을 도로를 점거한 불온세력으로 보지만 이는 단순히 위장에 불과하다. 검찰의 정당화인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어느 당에 소속되어 있는지 찍는 건 삼가했어야 한다. 극으로 꾸미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민노당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저들이 좌파이기 때문에 저럴지도 모른다는 편견에 빠져 버린다.
 물론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편견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땅의 여자'들은 마술환등에서 튀어나와 있다. 그들이 만약 농촌 공동체로서 여러분 농촌으로 오세요! 라고 했다면 그들도 나름대로의 마술환등에 빠져 있는 것이다. 허나 이들은 굳이 오라고 하지 않는다. 농사에 소질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해도 좋고, 오든 말든 자유라고 한다. 그냥 이 영화를 보고, 자신들도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한다. 우리는 무조건 한 대상을 파악해서 우리의 틀로 끌어 들어와 호불호, 혹은 우위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건 폭력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이해는 평생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이해'를 해야 한다. 그 노력을.
 또한 여기서 나오는 '땅의 여자'들은 '도시의 여자'들과 그 세부사항이 다를 뿐, 유형이 비슷하지 않은가. 희주는 맞벌이를 하면서 남편과 갈등을 빚는 아내를, 은주는 시어머니와의 알력 다툼을 벌이는 며느리를, 그리고 선희는 아픈 남편을 두고 정치로 나서면서 그 아픔을 겪는, 어떻게 보면 똑같다. '도시의 여자'들도 알듯이, 여기에는 해답이 없다. '꿈'이 이뤄지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꿈'을 계속 가지고 행하는 것, 그게 '땅의 여자'들이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말이다. '마술환등'에서 빠져나오려면 그 '마술환등'에서 빠져나오려는 꿈을 꿔야 한다.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그게 '땅의 여자'가 영상이 된 이유다.

 

 

 

소풍

 

 '땅의 여자'는 그냥 즐겁게 볼만한 영상은 아니다. 모두들 집중해서 봐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짜증을 낸다. 재미가 없으면 왜 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영화를 보면 좋다. 인셉션도 보면 안된다. 왜냐고? 그 영화는 생각하라고 만든 영화지 멜이 쩐다 이러면서 볼 영화는 아니다. 그러면 스틸컷으로 보면 된다. 영화의 권위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벤야민은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차 도착 같은 단순한 영상이었고, 사람들이 이에 놀라 도망치는 충격 효과가 있었지만. 우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영화는 아주 예리하게 잡아 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거대한 림보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대중들이 보고. 과거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만 예술을 감상할 수 있었다. 허나 영화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영화는 소통하려는 움직임이지 나 졸라 짱셈을 표현하려는 나르시즘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가 소풍을 갈 때 우리는 정신없이 막 즐기지는 않는다. 정신없이 막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깽판을 치다보면 남는 건 경찰서의 호출과 뻐근한 허리밖에 없다. 우리가 소풍을 가는 이유는 휴식을 위해서다. 이 바쁜 세상에서 휴식을 위해, 잊어버리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휴식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순간이다. '땅의 여자'는 소풍을 가듯 보러 가는 게 좋다. 이 영화는 그냥 농촌으로 오라는 권유 영화도 아니고 농촌이 최고라는 영화도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영화는 '농촌'이 단순히 타자로 편입되려는 순간을 부정하고, 전혀 다를 것 없이 여기서도 인간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소풍에서 우리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롤러코스터에 태워 고통스럽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롤러코스터 못 타면 안 타면 된다.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그저 '농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집터로 생각해선 안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의 선택여부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도시>>>>>>농촌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기 때문에, 그 생각, 편견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에서 앤은 소풍을 가고 싶어서 머릴러에게 브로치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한다. 허나 앤은 가지 못한다. 우리는 소풍을 가고 싶다. 허나 소풍을 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생각을 하고 싶을 뿐이다. 허나 편견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소풍을 가고 싶으면 편견의 방식대로 생각한다고 말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결국 소풍을 가지 못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사실 가장 빛났던 순간은 바로 선희의 '꿈'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선희는 그녀를 지지해주던 남편이 죽고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 영상이 영화가 아니라는 것, 온전한 극영화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위로받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포기한다. 집 때문에,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허나 선희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려 한다. 왜 꼭 우리는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가?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온 건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지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시와 수많은 현실들은 우리를 그저 폭풍 속에 휘말리게 해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나아가게 하려 한다. 그러나 이 앞에 무엇이 있는가? 폭풍? 낭떠러지?
 '마지막 휴양지'라는 그림책에서는 고갈된 많은 사람들이 한 휴양지로 와서 휴식을 취하고 새롭게 나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꿈 속, 환상거리가 아니다. '마지막 휴양지'에서 우리는 '휴식'이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재충전이고, 틀린 무언가를 비워내고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선희'는 떠밀리지 않는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로 나아간다. 언젠가는 폭풍도 지쳐 스러질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렇게 소풍을 가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이 말했듯, 후에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게끔. 모든 게 마무리되는 그 순간 웃으면서 갈 수 있기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전문-

 

 


 인간극장만이 오렌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마냥 좋다는 건 아니다. '타자'의 이해로서 한번 보는 게 좋기는 하지만 사실 조금 편집 라인이 지루했다. 서사는 충분히 좋았고 감명깊었으나 영화를 의식한 듯한 교차편집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나레이션이나 자막이 한번 나온다면 조금 진득하게 나오던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 영상을 보고 친구는 '인간극장'을 말했다. 인간극장과 별다를 게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전반부를 조금 줄이고 그 집회에 갈 때 어떻게 막히게 되는지를 늘이는 게 낫다. 정치적 색이 너무 짙은 게 아니냐고? 이 영화는 '타자'의 이해지 좌파 우파 중 뭐가 옳은지 물어보려는 게 아니다.
 정치적으로 치우칠까봐 '인간극장'같은 전반부를 늘였을까? 허나 대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풍을 온 것처럼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이 영상에서 이 장면은 커다란 전환점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선희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절정에 해당하고.
 재닛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에서는 독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한 소녀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향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서사가 나온다. 이 '땅의 여자'도 현재 분류되고 있는 '타자'가 사실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확실히 드러내야 한다. 이 상황은 솔직히 말해서 좀 약했다.
 인간극장과 같은 서정성도 좋다. 허나 인간극장은 너무 꾸몄다는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서정성에 치우치다 보니 약간의 위장도 생겨나는 것이다. '땅의 여자'는 그래선 안된다. 꾸미는 것도 좋겠지만 부부 인터뷰를 할 때 서로 다정하게 밀치고 아웅다웅하고 결국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이, 그 진실이 이 영상을 빛나게 한다. 버스가 막혔을 때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이 영상을 빛나게 한다.
 인간극장만이 해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 다큐멘터리처럼 해학적으로만 나가라는 것도 아니다. '땅의 여자'만의 색깔이 필요하다. 그 색깔을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허탈해진다.
 내 경우에는 농촌과 도시가 반반 섞인 곳에서 살기 때문에 평일에는 도시에 나가서 살다시피하고, 주말에는 밭을 매고 씨앗을 뿌린다. 무도 뽑고 열매도 딴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의 편견은 반반으로 갈린다. 그 편견들을 볼 때마다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느낀다. 이 '땅의 여자'는 풍크툼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틀에 갇혀서, 뻔한 도식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예리하게 그 약점을 찔러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리게 하는 풍크툼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진실, 바로 '농촌'이 '진보하지 못한 곳'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일 뿐이라는 것을.


 

 

 

 

**********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이 '땅의 여자'들이 직접 수확했다는 '밤'을 받고 즐거워했다. 나는 못 받아서 슬퍼했다. 밤 맛있었을텐데. 여튼 잘 되면 다음에 쌀 보내주시겠단다. 사실 이렇게 '나누면 욕 못한다'라고 농담조로 말하지만, 어쩌면 이 영상이 극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몸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우리 이야기야. 우린 진실을 말했어. 우리 마음은 이런데, 너희는 어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밤을 못 받았고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땅의 여자'를 추천하고 싶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Lamp-먹오딧빛으로 물들은 8월의 시정

 

 

 

 

 

 

 

 

 

 이번 8월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색 고운 낙엽과 늦여름의 정취가 묻어나는 저녁을 기대할 법도 하건만, 갑작스런 폭풍 때문에 그마저도 미뤄졌다. 그냥, 여름이었다. 늦여름은 9월에서야 왔다. Lamp의 '8월의 시정'은 '9월의 시정'이 되어버렸다. Lamp의 노력과 목소리가 미뤄진 것이 조금 씁쓸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8월보다 9월이라는 어감이 더 좋지 않은가?
 Lamp의 음악을 들은 건 '사랑의 단상' 앨범에서였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모여진 목소리들, 그 와중에 끼여 있는 Lamp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허나 일본어? 어쩌면 나는 일종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음악에는 언어가 없다. 가사는 단지 조금 더 말하고자 하는, 욕심일 뿐. 사실상 멜로디로 모든 세상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소메야 : 예를 들어 안토니오 카를로스 죠빔은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만, 세계 공통의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자신의 관점, 자신의 리듬감으로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있는 거죠. 거기에 세계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 이런 건 차치하고서라도요.
                                                                               
                                                                                -Lamp, 인터뷰 中-
 
 글을 쓰는 나로서는 그 멜로디로 소통하는 것이 부러웠다. 미술도 그렇다. 오로지 문학만이, 번역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예술과 소통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문학의 약점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약점. 골방에 틀어박혀서,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순간. 허나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에 다리가 놓여지면서, 끝과 끝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났다. 노란 머리의 직녀와 검은 머리의 견우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 소설은 이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보여주려 한다. 음악 또한 가사로 전달하는 것 외에, 이제 전달하려 한다. Lamp의 시정은 단순히 가사로만 이어지는 시정이 아니다. 이제 음표로, 화음으로 시정이 구성된다.
 
 Lamp는 보사노바와 일렉트로니카, 그리고 수많은 음악들을 겹치고 포갠 일본풍의 음악이다. 일본풍이라 하면 왠지 모를 하와이안, 밝고 경쾌하나 동시에 가볍고 몇겹의 멜로디를 겹쳐낸, 어떻게 보면 얇은 천과 천 사이에 오묘하게 띄운 색이 일본풍이라 할 수 있겠다. 허나 일본풍이라고 하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커넥션(접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본와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라, 유럽, 티베트, 중국까지. Lamp의 기타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떠오를 정도로 서정적이며 감정이 풍부하게 넘쳐나고, 플루트는 꼭 새소리처럼 클래식한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다. 퓨전이되, 너무 과하지 않은 퓨전. 너무 심한 퓨전은 오히려 음악에 부담감을 준다. 배탈이 나는 것이다.

 배경에 스며드는 음악, 영화를 찍을 때 유난히 스가 시가오와 Lamp의 음악을 배경음악에 골라 놓곤 했다. Lamp의 음악은 마치 리트머스 종이에 스며드는 요오드처럼 풍경 속에 스며들어 고유한, 너무 튀지 않는 색깔을 낸다. 이야기를 하거나 걸으면서 생각할 때, Lamp의 음악은 당신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흔히 노동요라고 말하는 우리 나라의 가요들은 '빨리' 혹은 '사랑하던가 이별해라'라고 강요하는 반면, Lamp의 음악은 마치 돛단배의 등 뒤를 밀어줄 뿐, 그 진로는 결정하지 않는 산들바람 같다. Lamp의 음악이 우리 나라, 그리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앨범에 참여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다른 비슷한 풍의 음악도 있지 않느냐고? 허나 Lamp의 음악은 너무 앵앵대지도 않고, 너무 우울하게 되지도 않으며 너무 가볍지도 않다.


 그런 만큼 Lamp의 음악은 어느 계절 할 것 없이 다 맞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사람에게든 가만히 스며들어 포근하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조금 낯간지러울 지도 모르겠다. 허나 기타의 스트로크는 너무나도 경쾌하고, 플루트는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가 높이 날아오른다. Lamp의 색은 그러면 무색일까? 아니, 나한테 이 앨범의 색은 수줍은 주홍빛도, 노란빛도 아닌 먹오딧빛이다. Lamp의 음악은 투명하게 모든 상황을 비추면서도 이내 진하게 가라앉아,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숨을 바로 하게 한다. 왜 서정주의 시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서로 소통하려는 두 예술이 만나는 순간 수많은 불꽃놀이들이 터진다. Lamp의 먹오딧빛 하늘 위로 우리는 수많은 우리의 추억들로, 수놓는 것이다. 아름답게.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전문-


  나는 굳이 Lamp의 8월의 시정만 들으라고 추천하지는 않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Lamp의 곡은 바로 雨降る夜の向こう(비 오는 밤의 저편)이다. 특출나게 음악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다. 허나 감성만으로 접근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관심이 간다면 좀 더 공부할 수도 있을 사람들을 위해 리뷰를 이렇게 썼다. Lamp의 음악은 4집 이전에는 투명했고, 그 이후로 점점 깊어져서 먹오딧빛이 되었다. 모든 것을 아른아른하게 비추면서, 자신들의 속내를 깊은 곳부터 우러내는. '8월의 시정'은 애달픈 순간들을 그려낸다. 더운가 하면 추워지는 이 환절기에, 그리고 마지막 수박을 먹는 여름의 옷자락 끝에 우리는 이 음악으로 거리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예감케해주는 계절, 너를 만났다'라는 가사가 맘에 들었다고 말하는 건 과언이 아니다. 배경에 스며들 만한 음악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가사가 우리 나라 가사가 아니라는 것만은 아니다. 일본 가사도 마치 시처럼 조용히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이리와, 안아줄게. 이 세상 끝까지.

 

 미지근한 비가 주위를 다정하게 두드리니
 마지막 계절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Lamp, 8월의 시정 중-

                             


 너울거리는 마지막 계절, 추억의 마지막 계절이다. 이별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만남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이 모든 계절에 시정을 느끼길 바란다. 저물어가는 초록빛 노을 끝에서, 주홍빛 얼굴로 끝없는 감기에 걸려, 시정을 훌쩍거리면서.

 

 

  

 

 

2010년 9월 7일 화요일

우리는 끝없는 백지 위를 달리고 있지

 

 

우리는 끝없는 백지 위를 달리고 있지

그리고 우리가 지나간 그 뒤에는 무언가가 남을거야

겨울이 오고 백지가 또 새하얗게 뒤덮여서 지워지더라도

그 당시에 무언가 남았다는 게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거지

이상적인 소리로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한테 이상 빼면 남은 게 없어

인간과 짐승을 꼭 구분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차이를 대라고 한다면

'이상'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카루스처럼 몇번씩 떨어져도 계속 날아오르려고 하다가 날개에 불붙는 게 바로 인간이 아닐까 싶어

그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가늠할 수도 없고

 

 

 

 

 

 눈물에 대하여

 

                                문태준

 

 

 

 어디서 고부라져 있던 몸인지 모르겠다

 골목을 돌아나오다 덜컥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이

 목하 내 얼굴을 턱 아래까지 쓸어내리는 이 큰 손바닥

 나는 나에게 너는 너에게

 서로서로 차마 무슨 일을 했던가

 시절 없이

 점점 물렁물렁해져

 오늘은 더 두서가 없다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

 

 

 

2010년 8월 31일 화요일

이 책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극한의 협상, 찰나의 설득'의 저자 케빈 더튼은 책 제목만큼이나 자신 또한 설득에 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보면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는 제 3자인 친구가 어떻게 풀었는지, 그 마법같은 순간을 말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나도 당신들처럼 설득을 당한 적이 있다. 이건 그가 말했던 일종의 '눈높이 맞추기', '공감성 획득'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공통 키워드는 '공감성'이다. 우리가 공감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 설득은 다 무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물론, 위협도 있다. 허나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라. 어떻게 범죄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허를 찌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이 사람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경찰이 자살하려던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청하는 방법이 어떤가에 따라 그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표시를 취할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그저 직장인들, 협상을 자주 하는 직장인들에게나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리한 아이들은 어른도 꼼짝 못 하게 만든다. 12월 마지막 날 친구 집에서 열린 송년파티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 친구가 아홉살짜리 아들에게 자러 가라고 하자 아이가 사정했다.
 "엄마, 8시 반밖에 안 됐는데 조금만 더 놀게 해 줘요."
 하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너 밤에 늦게 자면 다음에 어떤지 알잖아. 며칠 동안 피곤하잖아."
그러자 그 아이는 금방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내일 엄마가 자고 있는데 아침 7시부터 뛰어다니면 좋겠어요?"

 

                                                                -극한의 협상, 찰나의 설득 中-

 

 케빈 달튼은 서양인이고, 우리는 동양인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부장적인 권위가 강한 한국인이다. 저런 말을 한다면 아마 백퍼센트 맞지 않을까 싶다. 영국과 미국의 코미디 드라마와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저런 경우로 대본이 짜여져 있다. 묘하게 허를 찌르면서도 사람들에게 너무 불쾌하지 않게 절제를 한다. 사실 절제라고 하기에도 뭣하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의 수위는 높고 다양한 소재들을 마음껏 사용하며, 프로그램들은 성적소수자와 그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비꼬면서 동시에 똑같은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우리 나라가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영국을 보라. 영국은 신사의 나라지만, 그 나라의 SNL이라는 프로그램은 코미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이 나라를 까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개그콘서트나 웃찾사같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 정치인이 개그 프로그램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동혁이형은 너무 직설적이었다. 허나 그 직설적인 게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일종의 의외성이었고 그 의외성에 타격을 받은 정치인들은 저도 모르게 '프로그램'에 시비를 걸게 된 것이다. 찔리는 놈이면 제가 먼저 자수를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젝의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에서 보면 우리는 우선 진지함에 속고 그 다음에는 희극에 찔린다.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를 외칠 때 한여름밤의 꿈속 요정인 퍽은 우리에게 모든 걸 잊어버리고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라고 날카로운 충고를 던진다.

 

 

 

 이 책에서는 그 날카로운 충고를 잊지 않고 말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달콤한 말로 이들이 말하는 대로만 하면 모든 게 다 뜻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지만, 실상 그 책들의 공통된 모토는 다 이거다. 노력해라. 노력하지 말라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이야 말로 읽을만한 책이다. 저자는 자기계발서에 관해서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말한 '설득의 방법' 중 자기계발서의 방침이 있다. 바로 아래로 낮추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는 공감을 하거나 아래로 낮추는 게 우선이다. 읽는 독자에게 이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표지에 박아 보여주고 첫장을 펼치면 그들이 독자들보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책보를 매고 학교에 얼마나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는지. 그리고 자기가 비행청소년이었거나 타락한 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케빈 달튼이 '상사에게 단 한번도 해를 입지 않은 남자'에 대해 서술했던 것 그대로다. 아주 아래에 처박혀서 너보다 못한 벼룩과 빈대와 같은 존재였고, 그래서 당신들은 당연히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건 바로 '사이코패스'에 관한 글이었다. 우리는 보통 사이코패스라 하면 국가에 특정한 관리를 받거나 범죄자로 치닫기 일쑤라고 생각한다. 허나 어떻게 보면 우리가 바라는 신은. 바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고, 흔들리게 한다. 당연히 우리의 믿음은 부서져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쉽게 내버리고 절벽으로 던져버린다. 달튼의 친구 '폴'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저 사람도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이, 어떤 한 방향으로 가는 순간 타인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카드에는 조커가 없다. 허나 저들은 우리의 손에 조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커의 존재조차 모른다.

 

 

 달튼은 그가 '사이코패스'와 직면했을 때, 얼마나 큰 감정의 기복을 느꼈는지 말한다. 이 혐오는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처럼 대치되는 '숭배'와 한 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사람들은 음모론으로 치부하지만 우리는 계속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 묻고 물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이 책의 제목대로 '극한의 협상, 찰나의 설득'은 그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그 속을 예리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선, 그 시선의 획득을 요하는 것이다.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의사가 무슨 말을

 

 

 의사는 나한테 말했다.

 

   발끝부터 3분 요리 패키지에 든 냉동닭처럼 잘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하얗게 식어가는 기분이 어때요?

  

 나는 이게 바로 죽음으로 향하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주변에는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도 있지만 살고 싶어서 버둥거리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노라면 왠지 나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쏘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하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라는 것. 그런데 솔직해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권력자가 아니라 그저 초라하게 서 있는 인간, 짐승과에 속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난 시방 짐승이다. 그냥 이름 붙이고 부르고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성에 차고 그러면서도 계속 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짐승. 아이들은 내가 약간 중2병에 걸렸거나 조증에 걸린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한없이 행복하고 한없이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렸을 때 우리 집안의 모토는 '잘한 것도 없는데 울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타인의 통증에 민감하다. 그 사람이 울고 속상해 하는 게 얼마나 힘들면 울고 속상해할까 싶다. 허나 나는 묘하게도 제 때 울질 못한다. 울고 떼쓰는 아이가 부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이 의외로 이 사회 속에 많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자루

 

                         문태준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봄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家長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러워요 내 몸이 무러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온 영원을 생각하오니

 

(중략)

 

 

 

 

 왜 문태준의 시를 읽다가 저 첫 문구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는 말이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문학적 재능도 없고 묘사력도 없고 있는 건 그저 막장 스토리를 지어내는 것밖에 없으나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을 담든 간에 내 자루는 남에게 꿔온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친구는 나에게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것저것 대답했지만 사실 친구의 말도 내 말도 그저 공기 속에 떠다니는 세포들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다가가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재능을 달라고 했다. 허나 나도 재능이 없다. 그녀에게 줄 재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재능이라곤 그저 뭐 하나 없이 읽어내려가는 것밖에 없다. 그녀에게 한 말마따나 나는 내가 40세 이후로 어떻게 살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예전 무당집 아들은 그런 생각을 하다간 단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단명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수하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파괴욕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쓴다.

 그것밖에 할 수 없으므로.

 그게 나쁜지 안 나쁜지는 나중에 가서 알 일이지만

 그 결과를 보기 두려워해 자살한 이들은 과연 지금쯤 행복할지 아니면 그저 썩어들어갈지

 딕슨 카의 소설처럼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냐고 빈정거리고 있을런지

 

 

 선배 저는 거울같은 사람이예요 선배가 저를 미워하면 저도 선배를 미워하고 선배가 저를 좋아하면 저도 선배를 좋아하고 그래서 저는 선배한테 더이상 줄게 없죠 왜냐하면 받은 선물을 도로 돌려주니까요 그러니까 저한테 대고 백설공주를 죽일 방법을 물어보신다면 그 말밖에 할 게 없어요 죽이라는 그 말밖엔

 

 담은 게 없어서 슬프다. 내 자루에는 아무래도 구멍이 뚫려있는 모양이다. 이자는 점점 쌓이고 쌓여 나는 곧 있으면 사채업자들한테 쫓기는 신세가 될 것 같다. 학교 선배는 뚱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안다. 내 말마따나 나는 거울같은 사람이었다. 호의를 호의로 답했고 적의를 적의로 답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질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를 들어 외동딸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라 했지만 이상하지, 어렸을 적의 나는 다른 사람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붙이고 친구가 되곤 했는데.

 

 언니 왜 눈에 그렇게 떡칠을 해요?

 친절해 보일까봐

 

 금자씨의 두려움을 알게 되고 나니 이제 내 앞에 있는 건 두려운 것들 뿐. 친구야. 쓰지 않고 말하는 건 어떻게 보면 위선이고 슬픈 아리아야. 혼자 부르는 아리아. 그런데 끝에는 도돌이표만 있을 뿐 마침표가 없어. 우린 그냥 써야해. 쳇바퀴의 나사가 헐거워질 때까지.

 

 

 아버지는 내가 정치의 개좆도 모르면서 정치에 관해 논하는 게 어이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사실 저는 정치가 개좆보다 더 싫은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정치없는 세상은 없을까요?

 

 정치라는 의미는 왜 그렇게 변질되어 버린 걸까. 어떻게 보면 정치가 하나의 분야로 나왔을 때부터 더러워지는 게 당연하다는, 그런 관례를 따르게 된 것 같다. 순수한 유니콘의 성처녀는 미아리 고개로 간다.

 

 

2010년 8월 24일 화요일

미안한데 이거 다 거짓말

 

 

 

 연관 검색어에 왜 탑블레이드가 뜨나 했더니 내가 포스팅 제목을 탑블레이드라고 적어 놓은 게...

 선배가 나한테 '제목을 내용과 연관지어서 좀'이라고 했는데 나름 인셉션의 코브 토템이 탑블레이드스러워서 그런 것 뿐인데...끼낑

 구글로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확실히 구글 텍스트 큐브라 그런가...

 구글 검색이 안 되는 티스토리로 옮겨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텍스트큐브라는 어감이 좋아...

 

 

2010년 8월 16일 월요일

탑블레이드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은 주변인이거나 주변인보다도 더 가까운 누군가다. 미워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오히려 대화의 가능성이 숨어 있는 것이고, 미워하는 건 이유가 없다. 그래서 차마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다. 결국 계속 미워하면서도, 지금 미워하는 자신이 정당하지도 않고 뒤틀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미워한다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이유를 찾아내고 갖다 붙인다. 엉망이 된 스크랩북, 일그러진 모자이크. 자신한테 끝끝내 속지 못해 결국 또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그래. 나는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웰컴 투 지젝월드

 

 

 

 감추고 속이고 들춰내고 까발려!

 토할 것 같다 이 놈의 세상!

2010년 8월 14일 토요일

과달루페, 생일 축하해!

 

 

 

 하루 종일 비가 왔다가, 해가 떴다. 언제쯤 이 지루한 도돌이표가 끝날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두워지자 마자 비만 줄창 내리기 시작한다. 휴지 조각처럼 하얗게 번개가 갈라지고, 왠지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서는 우주 전쟁에서 외계인의 등장 때 효과음으로 썼던 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컴퓨터 웹서핑도 하고 하잘것 없는 게임도 해봤지만 전혀 채워지지 않는 것. 결국 나는 책으로 돌아간다. 글을 써야 하는데 지금 이 자세에서는 오래 쓰기도 힘들다. 커다랗고 깨끗하고 넓은 책상과 뻣뻣하고 엄격하게 나를 붙잡을 의자, 그리고 넷북을 꽂을 콘센트가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까다로운 생물이다.

 

 

 

2010년 8월 9일 월요일

트위터 개장

 

 

http://twtkr.com/telmailing

일광욕하는 사람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테드 휴즈 '시작법' 5장을 기반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일광욕’,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미적 장소란 과연 무엇인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영감을 주는 곳? 테드 휴즈는 시의 '풍경'을 '야생'으로 한정짓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근대 회화에는 풍경화가 많다. 왜 풍경화가 많았을까? 화가가 캔버스와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가 풍경에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으며 그 감동을 그대로 녹여내고 싶었던 것이다. 르누아르와 모네가 그렸던 호수의 풍경화에는 그들이 캔버스를 두고 풍경과 마주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발생한 감동이 담겨 있다. 그 감동은 다시 우리 눈앞에서 재생해 낼 수 없다. 그들의 눈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감동을 잡아내기 위해 인상파의 스케치와 같은 회화가 나타났다. 소설 또한 자연주의적인 소설이 나온다. 모든 인간관계의 꽃들은 다 시골과 자연 속에서 피어난다. 테드 휴즈는 '확실히 우리 모두가 전원과 은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차마 풍경이 주는 감동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떤가? 각 나라에서는 산업 혁명에 반하기라도 하듯 자연주의적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나 이는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쪽으로만 나타나진 않았다. 나다니엘 호손의 '블라이드 데일 로맨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지닌 젊은이들을 다룬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가 잘 이어져 나가는가 싶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온 농촌에 젊은이들은 당황하고 손을 내젓기에 바빴다. '풍경'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되는 소설이라곤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유토피아와 개척지를 꿈꾸는 모험 소설, 연애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테드 휴즈가 '야생적'이지 않은, 그래서 영감을 억압하는 도시는 어떤가? 이 당시 테드 휴즈가 있던 영국에서는 문명이 상대적으로 낯선 것이었고, 빈민과 노동자들을 생산해 내는 곳이었다. 제대로 쉴 수 없는 곳, 끊임없이 격식과 유행에 얽매이는 곳. 트루먼 카포티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문명 속, 부르주아지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썼으나 그의 소설로 인해 사교계에서 힘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다른 작가들도 도시에 대해 비정하고 매몰찬 이미지를 강조한다. 허나 현대 소설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된다. 일본 문학 속에서의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색다른 소통이 가능한 곳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삼포 가는 길'에서 주인공은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파괴되고, 그 곳에 있는 건 그가 떠나온 도시 뿐이다. 박성원의 '얼룩'과 대칭되는 '캠핑카를 타고 올란바토르까지'를 보면 주인공 남자가 떠난 누나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시골 구석에서 '얼룩'을 피해 도망친 여자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김사과의 '정오의 산책'에서 나오는 화자는 아무도 없는 '티베트'를 꿈꾼다. 이제는 없는 고향이나 모든 이들이 떠나버리고 그림자만 남은 시골, 혹은 수많은 소설에서 클리셰로 등장한 구원의 장소 '티베트'. 그러나 이 자연들은 이제 다 '뜬금없거나' '비현실적' 장소에 가깝다.

 오히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이제 고향에 또다른 예시가 덧붙여진다. '도시'다.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지나쳤던 도시 속의 의미를 찾아낸다. 김애란의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도시 속에서 맞부딪치는 인연에 대해서 서술하며, 비슷한 예로 박민규의 '갑을 고시원 체류기'에서는 판옵티콘 속의 판옵티콘에 대해 묘사한다. 근대에는 '자연'에서만 모든 진정한 작용들이 일어난다고 봤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서울의 비정한 면모가 드러났다. 현대 문학 속의 서울은, 이제 그 비정한 이미지에서 조금 더 완화된 모습을 보인다. '회색 숲'은 이제 문학의 또 다른 모태가 되는 것이다.

 테드 휴즈가 '풍경'이 시각적인 묘사를 통해 제시된다고 했던 반면, 그가 예시로 든 그의 아내 실비아 플라스의 '워터링 언덕'은 그녀의 개인적 서사와 버무려져 다른 워터링 언덕의 묘사보다 더 처절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소설 속 '풍경'과 가장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소설 속 풍경은 플롯이 없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플롯은 주로 화자가 이끌어간다. 허나 가장 찾기 쉬운 화자인 1인칭 시점에서, 이제 현대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풍경화를 떠올리게 한다. 풍경화 속에는 인물이 간간이 등장하나, 그 인물들은 풍경 속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인물들이다. 허나 이제 오컴의 면도날처럼, 캔버스 안에 담길만한 가치가 없는 플롯들을 현대 소설들은 냉정히 잘라낸다.

 산업화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는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티베트', 다른 외국에서 구원의 장소를 찾는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나 다른 여러 기행기를 보면 '여기서 나 자신을 찾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곳에서는 진실된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일까? 이는 일종의 배제에 의한, 반대항에 의한 폭력적인 정체성 확립에 가깝다. 이제 현대 문학 속에서는 풍경이 어떻게 드러날까.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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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구원'은 어떻게 장소로 형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는 '북극점'에 대해 말할 때, 캔버스 바깥의 소실점을 들어 비유했다. 어떻게 보면 풍경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절박함을 가지고, 또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테드 휴즈의 '시작법'에서 예시로 '실비아 플라스', 그와 영원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미완의 인생을 본다면 이는 아이러니컬한 대치를 이룬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테드 휴즈는 직접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작법 전반에 걸쳐 보면 그는 일종의 '구원', 자신을 구제해 줄 진리를 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참고로 이 글은 공적으로 사용된 글이니 퍼가거나 도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과제용으로 참고할 만한 퀄리티도 아니예요.


 

2010년 8월 2일 월요일

즐거운 사라

 

 

 

 카페에 나와서 커피 마시고 홍차 마시고 빵 먹고 다 쓴 글에 기뻐하다가도 앞으로 쓸 글에 대해 한탄하고 오늘 내로 읽어야 하는 책에 한없이 두근거리다가 이내 소란스러움에 정신이 팔리는 지금. 즐겁기만 해라. 하지만 이 순간을 너무 넋없이 흘려 버리면 안되겠지. 안 되겠거니.

 

 

글을 정말

 

 

 발로 쓰나

 머리가 아니라 발로 쓰는 느낌이다.

 한 때 레포트 기계로 불렸을 정도로 레포트가 쌓이고 쌓여 하루만에 후닥닥 처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대충 소주제와 간략한 메모만 해놓고 레포트를 써서 내고 써서 내고 했는데 이번 리뷰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인셉션'을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읽어보고 싶었는데 도중에 이상한 생각들이 끼어들어서 교통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1차로 끝내버렸다. 2차로 들어가서 아예 림보에서 뒹굴어야 하는데. 누가 어설픈 1차에서 빠져 나오게 킥좀 해줘!

 정말 다행인 것은 여기에 오는 친구는 내 글에 뭐라고 딱히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매번 아슬아슬하게 피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에? 글의 질에. 글의 퀄리티에. 다른 방문자들도 그렇다. 사실 매번 검색어에 걸리면서 오는 사람들이니 그렇지. 그런데 미안하게도, 글 제목에 따르는 글 내용에는 그들이 찾는 정보가 없다.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가기도 힘들고 글을 쓰기도 힘들다. 파리 꽁무니만 봐도 놀란다. 삭삭 귓가를 스쳐가는 것도 짜증이 나고. 이상하게 글이 절정에 달했다 싶을 때면 파리가 광속으로 귓가를 스쳐지나간다. 결국 쓰려던 것을 놓치고 만다. 동상에 걸려서 덜덜 떨어도 좋으니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이러고선 겨울에는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고 할 생각이지.

 '미사고의 숲'을 읽는 중인데 묘하게 졸리다. 요즘에 소설을 안 읽고 시를 읽어서 그런가. 이게 다 조영남의 '이상론' 때문이다. 그걸 읽고 나니 다른 책을 읽고 싶지 않아졌다. 그만큼 좋았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최악이라서 텍스트를 당분간 거들떠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스티븐 킹은 묘하게 페미니즘 분위기를 풍긴다.

 검은콩차를 어떻게 끓이나 궁금해서 어머니가 콩 삶는 옆에서 기다렸다가 그 끓인 물을 받아마셨는데 정말...교탁 씻은 물맛이 난다. 직접 마셔본 건 아니지만. 무리수 돋는 비유는 하질 맙시다.

 

 

놀란의 세계-크리스토퍼 놀란 '인셉션' 리뷰

 

놀란의 세계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일본에 어학연수차 갔다온 내 친구는 일본 거리에 '인셉션' 광고가 지천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이 나라도 그랬지. 마침 친구와 함께 '인셉션'을 보고 나왔던 참이었다. 둘 다 꿈에서 덜 깬 듯이 비틀거리면서 앉아 있을만한 카페를 찾아 명동 거리를 헤매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중에도, 평소에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후닥닥 나가버렸을 사람들이 정지 버튼이라도 눌렸는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원래 크레딧까지 보는 성격이다 보니 그대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그대로 앉아 있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꼭 크레딧이 끝나고, 무언가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나올 것만 같았다.
 요즘 들어 A-특공대, 엑스페리먼트 등 주인공 외에 조연들이 여럿 나오는 영화가 많아졌다. '인셉션'도 그 중 하나다. 보통 등장인물이 많으면 등장인물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플롯을 고르게, 어느 인물 하나 묻히지 않도록 신경쓰는 게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인물성이 플롯보다 더 도드라지게 된다. '트랜스포머'와 '트랜스포머2'를 보면서 든 생각이 그랬다. 플롯의 개연성보다는 인물을 부각시키는 데에 주를 둔 작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플롯'보다 '캐릭터'를 보러 극장에 가게 된다. '플롯' 때문이라면 조그만 화면이라도 괜찮지 않겠냐는 관객들 덕에, 영화들은 이제 인물의 특성에 주를 둔 작품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영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허나 어느 정도의 '플롯'이 없다면 말 그대로 망한다. '플롯'을 무시하고 캐릭터에만 중점을 둔다면, 심형래의 '디 워'같은 수작이 나온다. 플롯을 포기했더니 캐릭터도 망한 것이다. 플롯은 한 인물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인물이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나오고 소설이 나온다. '인셉션'은 어떨까. 몇몇 사람들은 '설정'에 비해 깊이가 없다고 투덜댔고, 'CG'에 업어간 블록버스터, 그리고 '인물성'은 여럿 있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입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플롯과 인물을 어느 정도 균형있게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깊이'가 없다고 말할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다크나이트'를 본 사람들은, 인상깊은 장면을 말하라고 하면 제각기 말하는 장면은 다르나 대부분 자신있게 답한다. 이는 주관성이 개입되어도 관객 각각에게 나름 '핵'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인셉션'은 어떤가? 사실 나는 '인셉션'에서 인상깊은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플롯과 미장센이 맞아 떨어지면서 묘한 감동을 자아내는 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처해질 것 같다. 컷에서 불러내는 놀라움은 감동이 아니고, 인물들이 서로 부닥치는 장면에서는 즐거웠으나 그마저도 감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 ...없는 자 돌을 던져라


 하지만 우리는, 차마 이 '인셉션'이 졸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돈을 많이 들였다던가 감독이 유명하다는 것을 떠나서, 놀란의 세상은 우리를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든 그럴 수 있다고? 그렇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모두들 왜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을까. '나는 앉아 있지 않았다'고는 해도, 계속 엔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찾아보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본 사람이라면 '중독'이라는 단어에, 떨떠름하게나마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중독'은 우리가 자면서 꾸게 되는 꿈, 돈을 얼마 들이거나 공부를 하지 않아도 꿀 수 있는 '꿈'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중독'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 이는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의 단점으로 쉬이 치부될 수도 있으나 실은 '꿈'이라는 그 소재부터가 아무리 깊어도 그 깊이에 다다르지 못하는, 무한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는 '놀란'의 거대한 꿈이다. 꿈에 대해 온전히, 수많은 이들을 잠재운 작품은 연극 무대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지만, '인셉션'은 가상도 아니다. 거대한 꿈인 것이다. 우리가 그 위력을 알고, 추출자의 존재를 두려워 하게 되는 '꿈'. '깊이'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한없이 불안해한다. 놀란이 우리도 모르는 새에 우리의 꿈속에 '씨앗'을 뿌려두었을까봐. 그리고 그 '씨앗'이 움터서, 무엇으로 자랄 지 모르니까.
 이 영화가 인터넷에서 한참 논란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엔딩' 때문이다. '엔딩'은 또한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 '이게 과연 꿈일까?'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타인의 의견을 무시한다. 아이들의 나이까지 대조하고 반지를 보여주면서 세세하게 논한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이 의문을 느낀 나는 어떨까. 어느 쪽도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답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감독이 입을 열어 제대로 말하기 전까진, 공식적 엔딩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공식적 엔딩이 나온 순간 이 거대한 '인셉션'의 꿈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꺼져 버리고 만다. 이는 시를 쓴 시인이 입을 열어 제 시를 스스로 해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떻게 보면 명쾌한 답이지만, 세상은 명쾌한 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저마다의 답을 내놓으면서도, 무의식 중에 답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망설이는 순간을 지지한다. 놀란의 '인셉션'은 바벨탑과 같다. 수많은 가설들을 쌓아 올려 꼭대기까지, 진실에 와닿으려고 하지만 사실 진실은 없다. 꿈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화살을 감독에게 돌린다. '노력하면 다 된다'는 선진국의 우민 논리가 부딪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허나 솔직하게 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매 순간마다 명쾌한 답을 내놓았던가? 우리의 꿈은, 얼마나 믿을만 했던가?
 
 
 마그리트의 세계

 

꿈이란, 당신을 잠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우려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는 꿈의 이미지를 거부했다. '초현실주의'니까 꿈에 관대하지 않을까? 라고, 피상적인 물음으로 다가가선 안된다. 마그리트는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을 거부했다. '꿈의 이미지'를 내세워 사람들은 2차 대전을 한낱 환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묻힌 수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잠들기를 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와 프리모 레비의 저작들을 보면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를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다. 우리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유태인들을 유태인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다르다. 그들은 돌아온 직후 제대로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눈을 감으면 수용소의 끔찍한 악몽이 찾아든다. 결국 사람들은 영원히 잠들거나, 영원히 잠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인셉션'에서 유서프의 지하실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라. 노인은 코브에게 말한다. 그들은 꿈을 꾸기 위해 잠든 게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든 것이라고. 그들에게 우리가 보는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다. 노인의 말에 코브는 차마 대꾸를 하지 못한다. 이는 코브와 멜이 다투었던, 그리고 서로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던 말이기 때문이다.
 1차, 2차, 3차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꿈은 더더욱 혼란스러워 진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 림보 속으로 치닫는 걸음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 '림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허나 코브는 다르다. 그는 림보에 빠져본 적이 있기 때문에, 림보의 유혹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아내가 죽은 현실로 돌아가는 게 코브에게 과연 구원이 될 수 있는가. 필리파와 제임스는 그의 구원이 되어줄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마저도 꿈이면 어쩌냔 말인가.
 사이토의 꿈 속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사이토를 속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사이토는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꿈은 이렇게, 가짜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진실'을 역력하게 깨닫게끔 한다. '꿈'은 그들이 다룰 수 없는, 거대한 고래같은 존재다. 고래의 위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딛다가도, 언제 고래가 제 몸을 뒤집거나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갈 지 몰라 불안해한다. '가짜'를 겪으면 겪을 수록,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코브는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아리아드네에게 요구한다. 절대로, 기억을 꿈 속에 섞지 말라고. 그와 멜의 파국은 그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허나 어떻게 보면 코브와 멜은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꿈에 발을 디뎠고, 꿈은 너무나도 황홀하고 새로운 '현실'이었다. 피셔에게 '인셉션'이 성공했는지 성공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일종의 씨앗 심기로, 이제 어떻게 자라날 지는 피셔의 마음에 달렸다. '현실'을 심는 것, 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발을 디디는 것도 '꿈'이기에 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코브는 자신이 '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허나 그 '꿈'은 오히려 코브를 삼킨다.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마그리트의 세계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와는 피상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허나 우리는 마그리트의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 그 순간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꿈' 또한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왜 스크루지 영감이 꿈에서 깨어나 그 꿈의 영향을 받아 행동했는지 기억해보라. 사실 나는 그 순간마저도 꿈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루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가 다시 되살아나 착한 일을 했던 건 다 꿈이었던 것이다. 죽기 직전의, 빠르게 지나가는 환상. 우리는 그 꿈을 꿈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진실' 같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도, '진실' 같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브이 포 메타포


 정말 놀란의 세계다. '인셉션'에서는 수많은 메타포들이 나온다. 겹겹이 겹쳐진 이 메타포들은, 놀란이 오랫동안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자라나면서 축적해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모은 조각, 그 완성은 '꿈'이었다. 우선 사람들이 가장 쉽게 발견해 낸 아리아드네와 미로의 메타포를 보자. 코브는 아리아드네를 만났을 때 테스트 겸으로 미로를 그리게 한다. 이는 어렸을 때 책 좀 읽는다 하면 읽어봤을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아리아드네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도 아리아드네라니.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패를 줘서 미로에서 괴물 미노스를 해치우고 나오게 한 공주다. 그리고 미노스는 사실 그녀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게끔 하는 여인. 아름답고 가녀리지만 그 꿈은 드넓고 무서운 존재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한번 신화에 꿰맞춰 보자. 아리아드네의 테세우스는 누구인가? 테세우스는 미노스를 무찌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리아드네 덕분에 살아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테세우스를 '코브'에, 미노스를 '멜'에 맞춰 본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멜'은 '코브'의 꿈에 갇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코브'가 해방된 것이 아니라 '멜'이 해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노스는? 코브다. 코브는 살아 있는 인간이고, 그의 림보는 한없이 깊다. 멜은 그의 림보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한다. '멜'은 무의식에서 죽지만, 이는 곧 정신적 해방을 의미한다. 코브는 '멜'이 무의식 중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꿈에 들어갔다. 테세우스-미노스의 존재는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들이다. 미노스가 없다면 영웅 테세우스는 없다. 영웅 테세우스가 없다면 미노스는 해방되지 못한다. 괴물이 아니라 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코브'가 테세우스라면 완전히 해방되어야 할 터인데, 그는 계속 미로를 헤매인다. 현실의 판옵티콘에 영원히 갇힌 건 미노스다. 어떤 게 꿈인지 알지 못하고, 이게 현실인지 차마 확신할 수 없는, 무의식 중에 꿈을 만들어 내는 괴물.
 또한 '인셉션'의 기차 장면, 코브가 멜과 함께 선로에 누워서 멜에게 거듭 말하는 그 대사. 당신은 한 기차를 기다리지. 그 기차는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갈거야. 그 기차가 어디로 데려갈지 당신은 확신할 수 없지. 그렇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허나 깨어난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는 그 말은 족쇄가 되어버린다. 멜은 혼자서 죽지 못하고, 코브마저 죽음에 가까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라캉의 '진정한 성관계는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모두들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사랑은 족쇄가 되어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라진다. 무의식 중에 편입한 멜이 바로 그 모순을 보여준다. 실비아 플라스의 '은유'라는 시가, 기차의 행로에 대해, 미묘한 엔딩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다.

 

 난 아홉 음절로 된 수수께끼
 코끼리 육중한 집
 두개의 덩굴손 위에서 거니는 멜론
 오 붉은 과일, 상아, 좋은 재목들!
 발효되느라 크게 부풀어 오른 이 빵덩어리
 이 두둑한 지갑에서 새로 주조된 돈
 난 수단이고 무대이며, 아기밴 암소
 난 녹색사과 한 부대를 먹고는
 내릴 수 없는 열차에 올라탔어

                                           -실비아 플라스, '은유' 전문-

 

 실비아 플라스는 시인 테드 휴즈를 남편으로 맞았다. 그녀는 재능이 있었지만, 동시에 열등감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 열등감은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테드 휴즈의 곁에서 메아리처럼 증폭되어 플라스를 공격했다. 결국 그녀는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어디론가'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라탔다. 허나 그 열차는 어디로 갈 지 모른다. 이는 영화에서 '킥'할 때 나오는 라 비앙 로즈와 묘하게 엇갈린다. 에디트 피아프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장밋빛 인생을 살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인생은 과연 장미빛이었던가. 또한 엔딩크레딧에서는 음악과 함께 기차 소리가 묘하게 합치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했다.
 또한 '토템'이라는 것도 대놓고 메타포를 발라 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템'이란 과거 원시신앙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 토템을 통해 세상을 봤고, 그 토템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는 '인셉션'을 보면서 생각한다. 과연 이 '토템'도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혹시 그 팽이 자체가 꿈이었다면 어떨까? 조그만 조각 하나로 우리는 진실과 꿈을 판단할 수 있는가?
 유서프의 지하실은 마치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게 한다. 진실은 지하실에 있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그 순간에 있다. 그 곳에 조용히 잠든 사람들은 '진실', '현실'을 현실로 여기지 못하고 잠든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는 이 시대의 거대한 비유와 같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다. 어디에서? 인터넷, 텔레비전, 가상이 통하는 곳 그 어디에서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그 프로그램 속 인물들이 진짜 사귀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쓴 게시물들이 많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지만, 깨어나지는 못한다. 계속 매여 있다. 장자의 꿈,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을 생각해보라.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였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를 상상계로 치부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상상계 속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 나름대로의 진실을 찾아, 그 돛을 세워야 한다. 폭풍 속에 휘말려 허둥거려봤자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꾸는 꿈 자체가 메타포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만. 폭풍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꿈도, 차가운 설산에 있는 비밀 금고도 다 메타포다. 그 은유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 '꿈'.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비밀스러운 것. 어떤 답도 답이 되지 않는 것.

 

 

 '기억'이 아니라 '상상력'을 이용해서-라는 코브의 충고는 '상사'를 떠올리게 한다. 전혀 매치될 것 같지 않은, 뜬금없는 존재들의 결합. 타인과 타인 사이의 거리를 좁혀 버리는 '꿈'들. '상상력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말처럼,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갈구한다. 림보는 '상상력'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존재들의 감옥이다. 게다가 그 꿈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모르는 존재라면 더더욱. 코브는 사이토에게 총과 팽이를 보여준다. 더 깊은 림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현실로 깨어날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현대인들의 선택지를 내놓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림보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타인을 이끌고 들어가면 타인의 파괴를 수반하고, 자신 혼자 들어가면 그 혼자만의 외로운 감옥에 처박히는 림보. 당신은 어떤 쪽을 선택하겠는가? '인셉션'은 대놓고 당신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 중에. 그 씨앗을 심어놓는 것 뿐이다. 조그맣고도 거대한 은유의 씨앗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