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8일 수요일

김언희 '트렁크' 中

 

 

 이봐, 오늘 내가

 

 문이, 벌컥

 열리고 헐레벌떡 추억은

 되돌아온다 마치 잊은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추악한 삶보다 끔찍한 것은 추악한 추억

 까마귀 고기를 먹어가며 추억은

 정욕과 망각의 까마귀 나를

 구워 먹으며 추억은

 나보다 오래

 살 것이다 헐떡거리며 추억은 백살까지

 발기할지 모른다 이미

 백살일까, 이봐

 오늘 내가

 백살이야?

 

 

 모나리자 화장지

 

 그 여자, 입 없는

 그 여자, 이빨도 혓바닥도 없는

 그 여자, 혀를 주면 혀를 삼키고 삼키고 삼키고 삼켜서

 두루마리 혓바닥으로 감겨 있는

 그 여자, 살균표백된

 그 여자, 희고 부드러운

 그 여자, 하늘하늘 풀려내리는

 그 여자, 적당한 길에서 당신이 쓰윽

 끊어

 

 뒤를 훔치는

 

 

 

 음화

 

 인형이

 있었다 눕히면 눈을

 감았다 치마를 들치고 사내아이들이

 연필심으로 사타구니를 꾹꾹 찌르며 킬킬거릴 때

 눈을 감고 미동도 않던 인형이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책상 모서리에

 패대기쳐지며

 터진 뒤통수에서 지푸라기를 꺼내 보이던

 비명도 한번 안 지르던 인형이

 있었다 머리채를 끄잡혀

 질질 끌려가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걸레쪽처럼 칼질 될 얼굴이

 있었다 쓰레기더미 위에서

 제 몸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둥근

 눈이

 

 ......있었다.

 

 

 빨래

 

 부저가 울리면

 뚜껑을 열고

 가족들을 끄집어낸다

 분당 칠백회전

 와류식 세탁조 속에서

 얼마나 서로를 붙들고 늘어졌던지 식구들은

 근친상간의

 사람 똬리를 틀고

 팔다리가 엉겨 떨어지지도 않는다

 표준탈수

 침도 땀도 흘리지 않는 식구들을

 빨랫줄에 널어 걸치며 단단히

 일러준다 줄밖은

 낭떠러지야

 쓸개나 허파야 뒤집혔건 말건

 여벌의 팔다리 있는 전부로 턱을

 걸어, 바람을 핑계삼아

 늘어진 넓적다리로

 친친 휘감아도 버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허공을

 팔다리로 흔들어가며

 걸어야 한단 말야

 하루 종일

 

 

 

 마리아의 노래

 

 본 적이 있어?

 길바닥에 서서 애 낳는 여자

 양수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출산을?

 신호가 바뀔 동안

 껌을 짝짝 씹어가며

 마른 아이를 낳아본 적 있어?

 부츠 속으로 흘러들어간 아이를

 끄집어내어본 적이?

 건드리면 모가지가 떨어져 버리는 지장아를

 안아본 적이 있어?

 자궁 속에서 이미 구겨박질린

 꾸깃꾸깃한 종이아이를

 손아귀에

 뭉쳐 쥐어본 적이 있어?

 가까운 휴지통에 던져넣어본 적이?

 신호가 바뀌면

 씹다 만 껌을 다시 씹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본 적이

 있냐구, 넌?

 

 

 

 

 김언희의 '트렁크'에 실린 시들은 왠지 모르게 최승자와 김혜순을 떠올리게 한다. 최승자라기보다는 김헤순에 가깝다. 최승자는 여성성을 남성을 향한, 무기처럼 휘둘러 댔고 김혜순은 깔깔거리면서 여성성을 신나게 드러냈다. 최승자가 무미건조하고 투명한 푸른빛에 가깝다면 김혜순은 진분홍빛, 핑크에 가깝다. 김언희는 생리혈처럼 붉다. 어떻게 보면 소녀적 감성이라고도 보이다가 창녀에 대한 시를 몇번이고 연작으로 쓰고,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그녀는 성녀 마리아고 명작 속 여주인공 모나리자고 다 노골적인 존재, B급 영화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무슨 말을 더 쓰고 싶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좀 쉬고 싶다. 책읽고 글쓰고. 천천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험이 끝나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그냥 조용히 입닥치고 쉬는 기간이었는데 이번에는 곧장 여행을 다녀왔더니 그 후유증이 더 심하다. 어제 인간 심리 강의 시간에는 거의 울다시피 했다. 자던가, 아니면 수업을 듣고 싶었는데 둘 다 할 수가 없었다. 졸다가 쓰고, 졸다가 쓰고 하는 꼴이 한심했다. 피곤함이 극도에 달하니 무슨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소설창작시간에는 좀 나았다. 합평문을 발표했는데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한다는 말에 좀 속이 나아졌다. 그게 걸렸는데. 나와서 사람들이랑 밥을 먹다보니 다른 누군가에게 맞춰 준다는 게 참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까스를 두 번이나 먹으러 갔으니 속이 느글느글할 만도 하지.

 결국 어제 미나와 만났지만 별 이야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쇼핑 도와주고 커피 마시고 헤어졌다. 사실 말하는 데에 지쳤던 차였다. 문익촌 이야기에 깔깔대고 웃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다동커피집에서 마신 에티오피안 코케가 그나마 맛있어서 기운이 났다. 오랜만에 얼굴 봐서 반갑기도 했지만. 조용히 있어도 된다는 것, 상대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편할 수 있다는 인간관계는 맺기 힘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책 반납일을 처음으로 어겼다. 다음주까지 못 빌린다. 그런데 오히려 홀가분하다. 아마 과제책이라서 그런 걸지도. 사실 거의 기계처럼 과제 책을 읽다시피 했다. 안 읽고 대충 챕터만 읽고 건너뛰고, 순식간에 보고. 아랍 문화에 관련된 책을 두권인가 빌렸는데 두께가 꽤 되었다. 그런데 한 이십분만에 두권 다 보고 레포트를 여섯장 썼다. 사실 서브텍스트가 더 많았다. 사람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건 이렇게 쓰기 귀찮을 때 서브텍스트로 인용해서 뭐 있는 것처럼 활용하라는 거다.

 

 학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장사가 안 되는지 와플과 나뚜루 아이스크림 한컵 세트로 사천원에 판매하는, 아주 이상한 메뉴를 개발했다. 다음에 녹차 아이스크림이나 한번 먹으러 가야겠다.

 

 

 박성원의 '얼룩'과 '울란바토르...'는 재미있었다. 내일 학회에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가 피곤해서 곯아 떨어지던가 둘 중 하나겠군. 어쨌든 오늘은 무조건 일찍 잔다.

 

 

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우리가 신곡을 읽지 말아야 하는 이유

 

 

 

 뜨거운 감자의 '시소' 앨범 정말 좋다.

 

 오늘은 일찍 집에 와서 쉬려고 했건만 어쩌다 보니 종각 다동커피집에 가서 커피를 마실 때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날씨가 날 놀리는 건지, 햇빛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갈팡질팡하다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흐려지는 하늘

 

 움베르트 에코는 위트가 있다. 그래서 좋다.

 저번에 읽었던 책을 몇번이고 다시 읽는다.

 

 사람들과 말하는 것보다 가만히 듣고 있는 것, 혹은 침묵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만큼 재미없는 인간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우스워졌다.

 

 신랄하게 비꼬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

 

 어머니가 국수를 한 상자 시키셨다. 아마 이번 주 휴일부터 점심은 무조건 비빔국수 아니면 물국수가 될 것이다. 그래도 몇달만에 본 국수냐. 게다가 면발이 혀끝에서 탄력있게 튕기는 맛이 일품이다.

 

 커다랗고 포근한 소파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서 책읽게. 놓을 자리도 없지만.

 

 다정이 생일 선물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잊어버린다. 미안해.

 

 5월 3일까지 소설을 써내야 한다. 미학의 이해 과제 레포트도. 대중음악과 예술음악의 차이에 대해 쓰는 것인데.

 

악몽

 

 

 띄어쓰기와 맞춤법, 인용만이 글쓰기의 전부라면 나는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글을 쓰지? 그냥 미친 척하고 꽃꽂고 돌아다니다가 어디 한강 저수지 같은 데에 빠져 죽으면 될텐데. 그러기엔 너무 안 예쁘다. 예쁜 게 중요하다. 전라북도의 낙안읍성은 너무 고즈넉했고 아름다웠다. 남원 쪽으로 가면서 본 호수도 넓고 달콤해 보일 정도로 푸른빛을 띄고 있어서 저 속에 빠져도 아무 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과거를 인용하고, 미래를 인용하고, 현재를 인용한다. 왈츠 스텝처럼 꼼꼼하게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어 써야 하고, 어떤 건 부드럽게 연결해 빙글빙글 돌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다.

 

 사촌 동생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고릴라를 붙잡고 부드럽게, 이 사이로 침을 튀기지 않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법도 아니고, 누군가의 팔을 악 소리가 나도록 꽉 움켜쥔 채 협박의 말을 읊조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능영역 언어, 오지선다의 지옥이다. 어떤 것도 지옥을 빠져 나오는 문이 될 수가 없다. 고등학교 4학년으로 무사히 진학하길 바래. 동생은 아무 꿈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외삼촌이 한 말이다. 외삼촌은 그 애를 토목과에 보내 자신이 하는 일을 시키겠다고 했다. 그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 아이는 이어폰을 낀 채로 오아시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천천히, 물에 젖은 솜처럼 푹 수그리게 된 뒤-나중에 바짝 말라서 엉킨 머리카락처럼 번잡하게 일어나게 된다면 어떨까. 그 아이는. 걱정이 된다.

 

 

 걱정이란 일종의 오지랖, 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가까운 사람 외에는 걱정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걱정이란 자신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일종의 기제라고 생각한다. 방어 기제 중에는 이타주의적 기제가 있고, 이건 성숙된 기제라고들 하는데 자신의 고통을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행동하면서 이겨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의 차가운 외면이 있다면 어떨까. 과연 그 봉사가 봉사로 남을 수 있을까? 기독교의 선교 활동, 예스미들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청준의 걸작은 '벌레 이야기'다. 단 몇 페이지도 안 되는, 몇줄도 안 되는 글로 이청준은 파국의 벌어진 틈을 펜대로 헤집어서 썩어 문드러져 푸른빛으로 변한 살결과, 움찔거리면서 기어나오는-통통하게 살이 오른 흰 굼벵이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그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걸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 비극은 더 잔인하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죽음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죽음에 다가가지 못한다. 자살을 밥먹듯이 예고하는 사람들 중에 자살하는 사람은 몇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방치해 둘 일은 아니다. 그 방치가 우물쭈물하고 있던 사람의 등을 밀어, 둥그런 원 안으로 밀어넣기 십상이니.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테이프로 손잡이 만드는 방법

 

 

 

 

임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다섯시. 보통 때면 유가 먼저 와서 임의 등을 쿡 찌르면서 저녁 먹으러 가자고 말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유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임은 매대 뒤에서 가방을 꺼내들고 유가 있는 매대 쪽으로 갔다. 저녁 시간에 임이 먼저 유에게 간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유는 매대에 없었다. 밥 먹기 전에 쉬려고 그러나? 화장실을 갔나. 아니면 창고에 갔나. 임은 유의 매대를 훑어본다. 매대에는 물건이 어느 정도 쌓여 있었다. 딱히 창고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닌데. 임은 유의 건너편 매대에서 다른 브랜드의 생리대를 판매하는 도우미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임의 말에 도우미가 새침하게 돌아본다.

"저기요. 언니. 혹시 이쪽 매대에서 일하는 언니 창고 가셨어요?"

"몰라? 오늘 잘렸잖아. 아까 갔어."

네? 멍청하게 임이 되묻자 답답하다는 듯 말을 되풀이한다. 잘렸다구.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방긋 방긋 웃으면서 고객들에게 멘트를 던진다. 고객님, 그 날에도 산뜻하게, 피부를 지켜주는 피트...임은 고개를 몇번 흔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혹시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황급히 식당 쪽으로 걸어간다. 가는 도중에, 주가 웃으면서 아이와 함께 온 손님에게 요구르트에 철분 성분이 얼마나 풍부한지 쾌활하게 설명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임은 식당 문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춘다. 어떻게 된걸까. 유는 이 마트에서 꽤 오랜 기간 일했다고 했다. 게다가 생리대도 가장 많이 팔았고. 유는 그걸 늘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그리고선 뒤늦게서야 겸손한 척, 늘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니. 임은 갑자기 유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유의 전화번호가, 임에게는 없었다. 혹시 주라면 알까. 임은 도로 매장에 내려가 주에게 유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라고 해서 알 리가 없다. 주가 안다고 해도 유가 임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은 이상, 임이 딱히 유에게 전화할 이유도 없었다. 임은 한숨을 쉬며 식당으로 들어간다.

 

                                               -습작,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테이프로 손잡이 만드는 방법'-

 

 

 

 사실 저 '방법'은 글 속에 몇 줄 차지하지도 않는다. 그냥 손잡이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우미에게 부탁하거나 '시키면' 된다. '원래 그런 걸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사람 어느 누구도 테이프 만드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평생 배우지 마라. 씨발.

움베르트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그는 나에게 파피니의 '끝장난 사람'을 빌려 준다. 아마도 정신의 유혹이 나를 육신의 유혹에서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아이로 살았던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의 고백이다. 그는 생각이 많고 괴팍한 늙은 두꺼비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점에서 나하고는 다르다. 나는 햇볓 바른 곳-nomen omen(이름은 징조이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지옥같은 단 하룻밤에 어린 시절을 잃고 말았다. 내가 읽고 있는 이야기 속의 괴팍한 두꺼비는 맹렬한 지식욕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는 <초록색 책등이 해지고 구깃구깃한 책장은 습기 때문에 불그죽죽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는 반쯤 찢어져 있거나 잉크 얼룩이 묻어 있는> 커다란 판형의 책들을 탐독한다. 이건 바로 내 모습이다. 솔라라의 다락에서 시간을 보내던 내가 그러했고, 훗날 책을 다루는 직업을 선택한 내 삶이 그러했다. 나는 책을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잠을 자면서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지금, 나는 그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벌써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태어나자마자 삶이 끝장났다는 그 남자는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기도 한다. 나 역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리 나지 않게 다리를 끌며 바다 밑바닥을 돌아다니는 괴물들 속에 내 괴물을 보탤 수도 있으리라. 그 남자는 터키 커피처럼 앙금이 많이 생기는 진흙 같은 잉크로 자신의 강박 관념을 꼼꼼하게 적어 나가다가 눈을 버렸고, 도서관의 희미한 빛 속에서 눈꺼풀이 벌게지도록 책을 읽다가 눈을 버렸다. 그는 도수 높은 안경에 의지해서 글을 쓰며, 자기가 장님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장님이 되지 않으면, 마비환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신경이 망가져 있다. 한쪽 다리에는 저릿저릿한 통증이 있고, 손가락들은 제멋대로 움직이며, 머리는 늘 지끈지끈 아프다. 그는 두꺼운 안경이 종이에 스칠 듯한 자세로 글을 쓴다.

                                                                -움베르트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中-

 

 

 움베르트 에코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시험 기간 동안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김춘수의 시론과 김수영의 온 몸으로 쓰는 시에 대한 주장을 읽다 보니 왠지 인용이 잔뜩 달린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실망하는 책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보이는 책이 읽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만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벤야민의 역사시학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파편들 속에서 미래의 답을 찾는다. 그러나 코마 상태에 든 '나'에게는 그 순간이 연속적으로 떠오르고, 이는 벤야민의 예시와는 조금 다르기는 하나 '릴라 사바'를 찾아-끝을 보겠다는 그 순간은.

 보도니가 걸린 병은 바로 '해리성 둔주'로, 여행성 기억 상실증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기억-지식 기억은 남아 있지만 대신 자신과 관련된 기억-일화 기억은 깔끔하게 지워지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그 주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을 시 우리는 해리성 둔주와 비슷한 상태에 빠진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보도니도 그렇다. 릴라 사바와 연결된 모든 세상, 파올라와 시빌라까지. 그녀의 죽음 이후로 그는 이질적인 세상에 갇힌다. 모든 것이 그의 문학적 낭만 속에 갇혀 시라노처럼 아이러니컬하게 돌아갔다. 몇번이고, 그는 꿈속에서라도 찾으려고 애쓰지만 암전과 함께 그 시도마저 끝나버린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만화 주인공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불꽃을 결국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제발트의 '아우슈터리츠' 또한 움베르트 에코의 이 소설처럼 사진과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제발트의 이미지는 상황들의 제시, 그리고 은유들로 집약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하는 반면 움베르트 에코는 사람들이 격이 높다고 생각하는 텍스트에 대중문화적 이미지를 결합해 꼭 팝아트를 보는 것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그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 그리고 시각의 차이.

 존 버거 또한 이미지를 제시하나, 그는 이미지 너머의 텍스트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제발트는 이미지 이전의 텍스트들-파편화된 텍스트들을 제시해 이미지로 응집하고, 움베르트 에코는 텍스트 중간 중간을 이미지로 용접한다.

 

 

 만약 움베르트 에코의 작품을 딱 두 편만 읽어야 한다면 '장미의 이름'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추천하고 싶다. 사실 내가 '푸코의 진자'를 상편 읽고 하편을 도서관에서 찾다가 영영 못 찾게 되어서 하는 말이 맞다. 허나 어떻게 보면 찾지 못한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기는 하다. 그 이후의 내용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즐거워하다가, 정작 진짜 내용을 보고 바람빠진 풍선처럼 현실로 내려앉을까봐.

 

 

 위의 인용 부분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감정의 교감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하급 예술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어떤가.

 

 

 어쩌면 나도 마지막 순간에 로아나 여왕의 불꽃처럼, 내가 잃어버렸던 과거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헤매일지도 모른다. 전라북도 순천에서 할머니의 강요에 의해 샀던, 검붉은 빛의 구슬과 투명한 구슬이 번갈아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팔찌를 들여다 보면서-물론 그 할머니는 크리스탈이라고 했고 가격도 비쌌지만 내 생각엔 어림도 없는 일이다-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불기를 찾고 있다. 아직도. 그리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