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파피니의 '끝장난 사람'을 빌려 준다. 아마도 정신의 유혹이 나를 육신의 유혹에서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아이로 살았던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의 고백이다. 그는 생각이 많고 괴팍한 늙은 두꺼비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점에서 나하고는 다르다. 나는 햇볓 바른 곳-nomen omen(이름은 징조이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지옥같은 단 하룻밤에 어린 시절을 잃고 말았다. 내가 읽고 있는 이야기 속의 괴팍한 두꺼비는 맹렬한 지식욕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는 <초록색 책등이 해지고 구깃구깃한 책장은 습기 때문에 불그죽죽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는 반쯤 찢어져 있거나 잉크 얼룩이 묻어 있는> 커다란 판형의 책들을 탐독한다. 이건 바로 내 모습이다. 솔라라의 다락에서 시간을 보내던 내가 그러했고, 훗날 책을 다루는 직업을 선택한 내 삶이 그러했다. 나는 책을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잠을 자면서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지금, 나는 그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벌써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태어나자마자 삶이 끝장났다는 그 남자는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기도 한다. 나 역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리 나지 않게 다리를 끌며 바다 밑바닥을 돌아다니는 괴물들 속에 내 괴물을 보탤 수도 있으리라. 그 남자는 터키 커피처럼 앙금이 많이 생기는 진흙 같은 잉크로 자신의 강박 관념을 꼼꼼하게 적어 나가다가 눈을 버렸고, 도서관의 희미한 빛 속에서 눈꺼풀이 벌게지도록 책을 읽다가 눈을 버렸다. 그는 도수 높은 안경에 의지해서 글을 쓰며, 자기가 장님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장님이 되지 않으면, 마비환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신경이 망가져 있다. 한쪽 다리에는 저릿저릿한 통증이 있고, 손가락들은 제멋대로 움직이며, 머리는 늘 지끈지끈 아프다. 그는 두꺼운 안경이 종이에 스칠 듯한 자세로 글을 쓴다.
-움베르트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中-
움베르트 에코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시험 기간 동안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김춘수의 시론과 김수영의 온 몸으로 쓰는 시에 대한 주장을 읽다 보니 왠지 인용이 잔뜩 달린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실망하는 책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보이는 책이 읽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만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벤야민의 역사시학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파편들 속에서 미래의 답을 찾는다. 그러나 코마 상태에 든 '나'에게는 그 순간이 연속적으로 떠오르고, 이는 벤야민의 예시와는 조금 다르기는 하나 '릴라 사바'를 찾아-끝을 보겠다는 그 순간은.
보도니가 걸린 병은 바로 '해리성 둔주'로, 여행성 기억 상실증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기억-지식 기억은 남아 있지만 대신 자신과 관련된 기억-일화 기억은 깔끔하게 지워지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그 주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을 시 우리는 해리성 둔주와 비슷한 상태에 빠진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보도니도 그렇다. 릴라 사바와 연결된 모든 세상, 파올라와 시빌라까지. 그녀의 죽음 이후로 그는 이질적인 세상에 갇힌다. 모든 것이 그의 문학적 낭만 속에 갇혀 시라노처럼 아이러니컬하게 돌아갔다. 몇번이고, 그는 꿈속에서라도 찾으려고 애쓰지만 암전과 함께 그 시도마저 끝나버린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만화 주인공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불꽃을 결국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제발트의 '아우슈터리츠' 또한 움베르트 에코의 이 소설처럼 사진과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제발트의 이미지는 상황들의 제시, 그리고 은유들로 집약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하는 반면 움베르트 에코는 사람들이 격이 높다고 생각하는 텍스트에 대중문화적 이미지를 결합해 꼭 팝아트를 보는 것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그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 그리고 시각의 차이.
존 버거 또한 이미지를 제시하나, 그는 이미지 너머의 텍스트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제발트는 이미지 이전의 텍스트들-파편화된 텍스트들을 제시해 이미지로 응집하고, 움베르트 에코는 텍스트 중간 중간을 이미지로 용접한다.
만약 움베르트 에코의 작품을 딱 두 편만 읽어야 한다면 '장미의 이름'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추천하고 싶다. 사실 내가 '푸코의 진자'를 상편 읽고 하편을 도서관에서 찾다가 영영 못 찾게 되어서 하는 말이 맞다. 허나 어떻게 보면 찾지 못한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기는 하다. 그 이후의 내용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즐거워하다가, 정작 진짜 내용을 보고 바람빠진 풍선처럼 현실로 내려앉을까봐.
위의 인용 부분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감정의 교감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하급 예술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어떤가.
어쩌면 나도 마지막 순간에 로아나 여왕의 불꽃처럼, 내가 잃어버렸던 과거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헤매일지도 모른다. 전라북도 순천에서 할머니의 강요에 의해 샀던, 검붉은 빛의 구슬과 투명한 구슬이 번갈아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팔찌를 들여다 보면서-물론 그 할머니는 크리스탈이라고 했고 가격도 비쌌지만 내 생각엔 어림도 없는 일이다-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불기를 찾고 있다. 아직도. 그리고 계속.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