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0일 월요일

뒤늦게라도 받았다는 게 어디야! 위드블로그의 크리스마스 선물

 

 

 위드블로그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리뷰를 얼른 등록해 달라는 운영자 분의 애타는 문구에 나 또한 맘이 절로...그것보다 선물을 제대로 받지 못해 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택배 아저씨가 내가 없는 새에 옆집에 맡겨 놓고 가셨더라. 옆집에서는 왜 말을 안 해준 건지 모르겠지만...잊어 버렸다고 하면서 미안해 하는 모습에 뭐라 할말이 없었다. 위드블로그를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새해 넘어서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기쁘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머니께는 혈액순환제를 받았고ㅡ어찌 보면 내가 어머니께 선물해 드려야 할 것을ㅡ사촌들과는 식사를, 극히 모범적인 가족과의 크리스마스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상자를 뜯었더니 안에는 책 한권과 핸드폰에 달 수 있는 액정 닦는 쿠션, 그리고 'SIRO SKY'의 'The orbit'. 사실 시로스카이는 위드블로그에 리뷰 이벤트 떴을 때부터 꼭 들어보겠다고 다짐했던 뮤지션이었다. 이벤트는 떨어진 것으로 기억하지만. '치열하게 읽고 다르게 경영하라'는 책은 사실 내가 경영서적에는 거의 문외한이고 어려워하기는 하지만 모처럼 책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꼭 읽어봐야지.

 

 사실 무엇보다도 감동했던 건 저 카드였다. 카드 안에 분명 인쇄한 A4 종이 한 장 끼워져 있을 줄 알았다. 카드를 보내줬다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그 안에 예쁘게 편지를 써주셨다.

 

 아무래도 이번 해는 좋게 시작될 모양이다. 조짐이 이렇게 좋으니. 나도 다른 사람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라도 써줄걸, 새삼 후회가 된다. 고마워요. 위드블로그!

 

 

2011년 1월 9일 일요일

'꿈의 도시'-오쿠다 히데오의 길고도 짧은 해답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봤을 때, 과연 이 작품이 인기를 끌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물론 재미있고 톡톡 튄다. 아무리 무거운 개념과 생과 사의 문제도 공중그네 속의 의사에게는 '공중그네'가 가장 위로 치켜 올라가고 타인의 손을 믿고 잡았을 때처럼 사소한 '믿음'으로 해결된다. 우리 나라에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라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 등 묘하게 밋밋하고 새침 떠는, 혹은 알 수 없는 외래 문화들을 읊는 문학들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일본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요시다 슈이치와 다른 작가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 중 나타난, 혜성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겐지와 겐이치로' 작품으로 블랙 코미디를 보여준 모 일본 작가만큼이나 오쿠다 히데오도 말빨 하나는 끝내준다. 그는 그 '끝내주는 말빨'로 우울증에 빠져 허덕이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본래 희극의 정의란 '어떤 어리석은 이를 풍자하며 희화화하는 것'이었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 희극의 정의에 걸맞는, 뛰어넘는 작품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시험대 위에 올려진다. 그 시험대는 어느 누구만을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 서사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본다. 단순한 농담 따먹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건 바로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서야, 실컷 웃고 난 뒤에서야 가능하다. 그제서야 우리는 자못 심각하게 '혹시 이거…'라고 의심의 말줄임표를 나열하게 된다. 우리는 오쿠다 히데오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오지랖 넓게 오쿠다 히데오의 앞날을 걱정했던 나 또한 마찬가지로 '한 방' 제대로 먹었다. 그는 재빠른 잽과 펀치로 내내 느리게 움직이는 복서들을 쓰러트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의 서사적 위력을 아낌없이 발휘한 작품이 바로 그의 장편소설 '꿈의 도시'다.

 

 

 내 눈을 바라봐 너는 행복해지고

 

 '꿈의 도시'에서는 새롭게 태어나는 '유메노 시'에 이전부터 살아왔던 다섯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서술된다. 우선 '유메노 시'로 승격되기를 기다리며 무료함을 느끼는 공무원 아이하라 도모노리,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유메노 시'를 벗어나기를 바라는 구보 후미에, 노인들을 상대로 배전반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가토 유야, 사슈카이 교단에 소속된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마트 보안 요원 호리베 다에코, 조그만 지방 정치가에서 이제 중심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야마모토 준이치. 이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행복해질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도모노리는 '몇 개월 뒤'면 새롭게 다른 부서에 편입될 것이며 좀 더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후미에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만 합격하면' 이 구질구질한 도시를 벗어나 멋진 도쿄 여대생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유야는 얼른 'A'등급이 되어 멋진 '페어레디Z'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한다. 준이치는 이제 본 정치로, 다에코는 사슈카이 교단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허나 이들의 욕망은 깨지기 쉽다. 글을 읽는 내내 우리는 작가가 묘하게 비꼬는 어투로 이들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는 가장 건실하지는 않지만 건실하다고 느끼는 다에코의 욕망까지도. 왜냐하면 이들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거짓말은 곧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방어기제'이자 '방패' 역할을 한다. 우리는 그 방패가 얼마나 연약한 지 알고 있다. 하지만 검과 방패처럼, 방패를 꿰뚫는 검이나 검을 막아내는 방패나 둘 다 '가지가지'하는 것들이다. 결국 공격하는 것도 방어하는 것도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호리베 다에코는 '유카리'를 끌어들임으로서 사슈카이 교단에 도움이 된 것을, 그리고 유카리를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가장 두려워 하던 것, 검의 공격을 받는다. 바로 '혼자 죽어가는 것'이다.

 

 다시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도 이렇게 말라비틀어져 죽을까. 갑자기 위가 찌르르하며 구역질이 났다. 아냐, 이렇게 죽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머지않아 나 또한 피붙이들은 사라지고 돈은 떨어지고 아무도 없이 혼자 죽어갈 것이다.

 

                                                                          -'꿈의 도시' 194P-

 

  하지만 이 검은 또다시 다에코의 방패를 굳건하게 해준다. 베르테르처럼 정수리에 총을 겨누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당기는 순간 세상이 다 끝나 버린다. 후미에도 마찬가지다. 후미에는 그녀를 납치한 '노부히코'의 환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노부히코에게 죽는 순간 후미에는 후미에로서가 아니라 메일린으로서 죽고 만다. 도모노리 또한 외로운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한 여자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매춘한다고 생각하면서 애써 합리화한다. 단순히 누군가의 눈을 바라본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는 없다.
 라캉의 상상계는 왜곡된 만화경의 세계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만화경 속의 조그만 셀로판 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돌아간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사실 무언가 꺼림칙한 세계. '꿈의 도시'는 말 그대로 상상계의 도시다. 그리고 이 상상계의 도시는 소설 속에서만 현존하는 게 아니라 서사를 통해 현실로 들어온다. 사슈카이 교단과 만신 교단은 각자 진솔한 듯 보이지만 결국 '다단계' 식으로 속는 이들밖에 없다. 사이비 종교에 관련된 뉴스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많이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무시'하려고만 했다. 비리와 폭력을 일삼으면서도 자신의 손은 깨끗하기를 바라는 의원, 매사에 무기력한 공무원, 사기를 치면서도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하는 남자, 대학에만 가면 뭐든지 다 해결될 거라고 믿는 학생. 어떤가.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가.

 

 

 믿사오며, 믿사오니, 믿니?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오쿠다 히데오는 심술궂게 묻는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믿는다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동시에 어렵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다섯 명을 보라. 그들이 믿는 것은 너무나도 위태로워서 그냥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보인다. 다에코는 그녀가 알고 있던 사슈카이 교단의 면모와는 다른 이면을 보게 되지만, 애써 그 현실을 부정한다. 그녀에게는 '사슈카이'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이 인물들 중 가장 '믿음'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는 바로 '다에코'였다. 그녀는 만신교를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본거지인 도시락 공장에 방문하지만 얼떨결에 취업하게 된다. 만신교는 또다시 그녀의 새로운 믿음이 될 수 있다. 그녀는 어떻게든 '믿음'으로서, 세상이 좀 더 낫다는 환상에 빠지려고 한다. 사슈카이에서는 가족이고 친구고 다 필요없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동생'과 '어머니'를 위해서, 만신교의 정신으로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다 같은 것은 아닌가, 그녀는 의심하게 된다.
 유야와 시바타 또한 마찬가지다. 유야는 가장 위에 군림한 사장을 믿는다. 그가 어떻게든 유야의 미래를 책임져 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선배 시바타는 말한다. 언젠가 배선반 사기는 끝나게 되어 있다고. 대신 이불, 시계 등 또 다른 사기칠 거리들을 사장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어찌 보면 사기칠 항목이 '더'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점친다는 건 막막할 뿐이다. 시바타는 그 막막함을 애써 믿으면서 '뱃지'를 달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장은 시바타를 돌아보지 않고, 시바타는 사장을 죽이게 된다. 유야에게 시바타는 '동료'이자 '형'이었고 가족이었다. 그가 흔들리는 모습은 곧 유야의 미래와 일치하고, 그로 인해 유야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준이치는 야부타 형제를 '믿는다'. 하지만 야부타 형제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되려 난감한 상황에 빠뜨린다. 준이치는 여성 운동가 사카가미를 구해줌으로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지만, 야부타 형제는 그녀를 죽이면서 '납치'에서 '살인'으로 일을 더 키운다. 이 믿음들이 흔들리는 장면은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며 희극적이기도 하다.

 

 준이치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다시 한 번 사카가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크아아~!" 문득 고지가 외쳤다. 야수같은 표정으로 돌진해왔다. "교도소에는 못 가!" 작업용 방한복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은색의 싸구려 토카레프 총인 것 같았다.
 준이치는 전율했다. 고지가 권총까지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컨테이너 벽에 찰싹 붙었다.
 "고지, 안 돼!"
 게이타가 당황해서 막으려고 했지만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고지가 사카가미 이쿠코를 향해 총을 겨눴다. 준이치는 그 자리에 자지러들었다. 네발로 기어서 컨테이너 밖으로 뛰쳐 나왔다.

 

                                                           -'꿈의 도시' 562P-
 
 오쿠다 히데오는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그려냈다. 이는 일본의 쇼트 스토리의 대가, 호시 신이치만큼이나 경쾌하고 재빠르다. 웃기면서도 이내 뭔가 씁쓸해지고 찜찜해지는, 이 블랙 코미디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믿사오며, 믿사오니, 믿니?' 과연 우리는 제대로 믿고 있는 걸까? 대학을 믿고 승진을 믿고 새로운 사랑을 믿고 종교를 믿고 성공을 믿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과연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일본 문학을 읽을 때마다 사람들은 '이 이상한 인물이 과연 현실 속 인물에 가까울까'라고 묻는다. 그저 재패니메이션의 인물에 불과하지 않나 의심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차마 거두지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더 가깝다는 증거다. 어느 누구도 명료하고 간단하게 자신을 판단할 수는 없다. 심지어 죽는 것을 선택한 베르테르마저도 사실 '실패'의 경우에 속하지 않는가. 그들을 단순히 비웃을 게 아니다. 블랙 코미디의 진면목은 바로 다 읽고 난 뒤, 옆에 있는 거울을 무심코 바라봤을 때 마주친 얼굴에 있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믿고' 있는가? 아니, 자신을 믿을 수는 있는가?

 

 

 유.메.노

 

 수많은 간판들 속에 '꿈의 신도시, 유메노'라고 적힌 큼직한 보드가 있었다. '유다', '메카타', '노카타'라는 세 개 읍이 합병해 탄생한 곳이다. 각각의 머리글자를 따서 '유메노 시'가 되었다. 시의 이름에 대해 딱히 반대 운동이 없었던 걸 보면 '유메노'라는 말의 어감이 그리 나쁘지 않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무코다 군'이라는 역사적인 지명은 아예 묻혀 버렸다.
 
                                                                          -'꿈의 도시' 20P

 

  도모나리의 말마따나 '유메노' 시는 원래 있던 읍 세개를 합쳐서 만들어진 시다. 결국 진실되고 새로운 '꿈'이란 없다. 옛날 것을 꼭 새것처럼 포장해서 내놓을 뿐이다. 마트에서 오래된 물건을 새것마냥 가격표를 붙여 내놓는 것도, 유야와 시바타가 파는 배선반도, 그리고 도모나리가 꿈꾸는 새로운 사랑이란 것도. 도모나리는 매춘 장소에서 자신과 이혼했던 아내와 만난다. 게다가 그를 위협하던 하지메의 트럭도 그를 곤궁에 빠뜨린다. 1+1=2, 무엇과 무엇이 갖추어져야만 행복이다. 이는 어찌 보면 억지로 읍들을 합쳐서 '꿈의 도시'로 작명하게끔 했던 일방적인 '집합'에 불과하다. 이 폭력적인 집합은 다섯 명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내고, 결국 욕망의 끝을 보여준다. 욕망은 결국 스스로 괴멸함으로서 욕망을 이루게 된다. 살아 있는 동안 욕망은 끝이 없게 된다. 오로지 죽음만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하지메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이들이 감춰 놓았던 죽음과 현실들이 튀어나와 각자와 대면하고, 그 순간 진정한 '폭발'이 일어난다.


 "조금만 참아요." 낯선 사람들이 격려해 주었다. "구조대 금방 올 거야." "그때까지 정신차리고 견뎌내요." 필사적인 성원이 귀에 와닿았다. 내내 잊고 있던 인간의 다정함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고마움을 좀 더 일찍 느꼈더라면 좋았을 텐데.
 빛이 비쳐들었다. 다에코는 눈을 뜨고 주위를 향해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꿈의 도시' 619P

 

 '폭발'로 인해 진실이 나타난다. 다에코는 여태껏 그녀가 갈구해 왔던 것은 신의 속삭임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후미에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게 되고, 유야는 내내 숨겨왔던 비밀을 속시원하게 터트리게 되며 도모나리는 니시다 하지메에게서 살아남아 다른 사람을 '제대로' 도울 수 있게 된다. 준이치는 라스콜리니코프마냥 자신의 죄에 쫓겨 도망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보게 되는 광경은 유메노 시, 그가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던 줄로만 알았던 도시의 진면목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에 통행인은 없었다. 평소에는 울긋불긋 요란하던 간판들도 춥고 흐린 날씨 때문인지 모두 다 회색으로 보였다.
 그건 마치 이 도시의 색깔인 것만 같았다.

 

                                                                    -'꿈의 도시' 630P

 

회색빛 도시, 흑백으로는 가릴 수 없는 미묘한 도시. 소설의 말미에서야 우리는 '꿈'의 도시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준이치가 명령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그 순탄한 세상은 이제 회색빛으로 가리워져 버린다. 오쿠다 히데오는 이 말미로 자신의 해답을 내놓는다. 630페이지에 다다르는 이 장편 소설은 그 해답을 주기에 너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오쿠다 히데오의 인물들이 말하듯이 해답은 쉽게 오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단번에 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곁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것, 그렇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의 답인 것이다. 준이치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이제 읽는 사람 각자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결국 준이치는, 다른 인물들은 우리들의 또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스위치switch'-발랄, 아쉬운 발랄.

 


 영화 '스위치'를 봤다. 학교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왔다. 원체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동네라 그런지 상영관에는 사람이 나와 친구 둘밖에 없었다. 좌석은 총 66석인 소규모의 극장이었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제스쳐가 커진다. 다른 영화를 보면 오히려 더 조용해지거나 하는데 왠지 모르게 손을 내젓거나 큰 소리로 웃게 된다. 어쩌면 영화 자체에서 주는 흥겨운 분위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나 혼자면 조금 무안해지는 법이다. 친구도 열심히 웃다가 텅 빈 상영관 때문에 머쓱해져서 둘 다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미혼모', 싱글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 지 궁금했다.
 '여성'의 본능이 재생산이며 양육이라는 말은 솔직히 이전 여성학에서 여러번 번복되어 온 문제적 발언이다. '모성애'라는 건 사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는 '모성애'가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미혼모-싱글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에 대해 혐오감이 있는 사람들,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게 된 사람들. 하지만 이는 편견일 뿐이다. 오히려 '스위치'의 여성들처럼 스스로 결정하는 여성들, 물론 그만큼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남자'보다는 '아이'가 우선인, 사실 '스위치'에게 바란 건 바로 이런 면이었다.

 

 

 가끔 네가 미칠 정도로 보고 싶어질 때가 있어

 '가족'이라는 것은 모든 트라우마의 근원이고 모든 '나'의 토대이다. 기본적으로 '나'를 보호해 주는 것, 어떻게든 부정해 봐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스위치'는 새로운 가족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영화 장르상 가볍게 다루고 있기는 하다. 마치 '싱글맘'인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본능에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듯하고(계기) 아이를 갖기 위해 임신 파티를 열며(실행) 아이를 낳는 데에 성공한다(결과). 하지만 '친 아버지'라는 것은 의외로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그것도 '싱글맘'이었던 여성이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단순히 혈연적 끌림이나 직감이라고 하기에는 무책임하다. 이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이 '어려운 문제들'을 드러내면서도 '가볍게' 뛰어넘는 경쾌함이었다. 헐리우드 영화들, 로맨스 코미디들은 특히 이런 면모가 강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연애 소설을 기반으로 했지만 나름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 은근슬쩍 신데렐라 스토리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칙릿-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스위치'에서는 이 '싱글맘' 문제가 대충 얼버무려지고 만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어머니와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지 못하는 남자.

 

 이 영화에서 살아 있는 인물은 아버지, 월리 뿐이다. 월리는 본래 자기중심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는 이성적이며 솔직하다. 그가 하는 말들은 무언가 빙 둘러 말하지 않고 곧장 찌르는 바늘같은 말이다. '캐시'는 월리가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지만, 이제는 친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월리는 그 한계를 알지만 포기하지 못한다. 너무 사소한 것들은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가령 '캐시'의 아들 세바스찬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던가 하는 것들. 하지만 이 캐릭터 또한 '걱정하는 텀'이 너무나도 짧다. 차라리 월리 스스로가 자신이 나이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 그리고 캐시를 사랑한다는 것도 깨닫게 하라. 월리의 변화는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새에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어떻게 보면 월리는 세바스찬을 자신이 사랑하는 '캐시'와 떨어뜨려 놓았다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접해야 한다. 하지만 '혈연'이라는, 그 끈끈해 보이는 관계로 너무 쉽게 엮어버린다. 게다가 '사랑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월리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액자에 끼워진 샘플 그림들로 자신의 부성애적 결핍을 채우려 한다. 월리가 그의 가족이 된 이후 세바스찬의 액자에는 월리와 찍은 사진들이 가득 차는데, 이는 부성애적 욕망이 채워졌음을 말해준다. 세바스찬이 월리를 좋아하는 것도 조금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둬야 할 점은 '캐시'였다. 싱글맘이라는 것, 이 위치는 미묘하고 다루기가 힘들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쌍한 싱글맘이 되어버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너무 센 싱글맘이 되어버린다. 불쌍하면 서사가 재미없어지고 세면 마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영화 '스위치'에서 캐시의 위치는 너무 애매모호하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상관없다. 세바스찬과 월리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일 뿐 캐시의 위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캐시는 일종의 '장치'로 보일 뿐이다.

 

 


 가족의 탄생

 

 영화는 너무 쉽게 흘러간다. 모든 상황들은 다 정해져 있고, 월리는 무조건 캐시에게 고백해야 한다. 둘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긴장도 너무 짧다. 마치 '아버지'가 꼭 있어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캐시'를 보면, 사실 이 감독이 생각하는 싱글맘의 이미지는 '불쌍한' 여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탄생'은 무조건 세 축이 있어야만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두 개의 다리로 서 있던 테이블에 다리 하나가 더 끼어드는 것 뿐이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영화를 보자면, 싱글맘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가 없을 것만 같던 사람들을 만나고, 서먹해 하고, 울고 웃다가 가족이 된다. 가족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타인과 타인일 수 있는 사람들이 한데로 엮이는 것이다. 이 접합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섬세하게 다가가야 한다. '싱글맘'이라는 소재, 그리고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따라서 말이다.
 감독은 아무래도 '로맨스'보다는 '혈연에 끌리는 남자'를 더 다루고 싶어했던 것 같다. '스위치'는 일종의 책임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싱글맘'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사용했다는 게 바로 여기서 취약점을 찔렀다. '스위치-바꾼다'. 그리고 이 바꿨다는 행위에 책임을 지는 남성. 사실 남성의 책임에 대해, 그리고 월리의 성장에 대해 다루는 영화였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의 탄생'이라기 보다는 '책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임'은, 작위적인 영화의 서사를 더 강화시켜 준다. 사실 월리의 친구 레너드의 경우 이혼을 두세번 정도 한 경력이 있고 여자친구를 아직도 왕성하게 사귀고 있는 이로서 어떤 '책임'의 여부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레너드는 월리에게 이런 저런 충고를 해준다. 레너드의 캐릭터는 영화 서사에서 솔직히 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레너드의 등장 이유는 간단하다. 월리에게 레너드 자신처럼 '살지 말 것'을 당부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레너드는 그냥 술렁술렁, 웃음을 부여하기 위한 요소로만 제시된다. 하지만 어떤 요소가 너무 튀면 영화 전체의 흐름이 망가지는 법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스위치'처럼, '싱글맘'에 대해 다룬 영화가 나오기를 바랬다. 하지만 '스위치'는 결국 남성의 최종적인 책임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다룬 영화였다. 이는 솔직히 아쉬움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캐시'는 물론 월리에게 화를 내야 한다. 월리는 캐시를 혼란에 빠뜨렸고 캐시가 원하는 아이라기보다는 월리 자신이 원한 아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캐시는 월리가 '세바스찬'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아니면 '캐시' 자신 때문에 다시 다가오는지 알아야 한다. 캐시는 월리에게 고백의 여부를 발견하고 조바심을 내지만 월리의 엉뚱한 대답으로 김이 팍 새고 만다. 이 상황을 보면서 좀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어랍쇼. 캐시가 월리에게 '결혼하자'고 말하고 승낙까지 한다.
 세바스찬의 액자가 치워진다거나 세바스찬이 좋아하는 유기견 센터의 강아지 사진이 그려진 케이크로 생일 파티를 한다던지 등은 좋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삽화일 뿐이다. 세바스친과 월리는 함께 살면서 무조건 '잘' 맞을 리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월리와 세바스찬 사이의 갈등을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무조건 '좋은 관계'로만 이어지는 둘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특히 롤랜드에게 세바스찬이 냉정하게 대할 때, 이는 솔직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롤랜드를, 세바스찬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영화의 '심기-거두기', 즉 복선은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 있다. 모든 장치를 다 드러내 보이면 어떤 멋진 타워팰리스라도 순간 멋을 깨는 법이다. '스위치'의 장치들은 너무 많이 그 표면이 드러나 있다. 차라리 그 표면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나았을 것을.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스위치', 제발 다음 번에 나오는 싱글맘 관련 영화는 '주노'처럼 되길 바란다. 건투를 빈다.


 

 

 

 

 

 

 

2010년 11월 24일 수요일

대체 학교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는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졸업생입니다.
대학교에 와서도 계속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체 학교는 누구의 것인가?
저희 대학교 강단에서 한 교수님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설마 여러분, 학생이 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대체 학교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육청입니까?
교장인가요? 재단인가요? 나라인가요?
히틀러의 나치즘과 별다를 게 없는 노릇입니다. 유용성만 따진다면 세상의 모든 예술은 하나만 그려야 하죠. 나라에 대한 충성, 그 뿐입니다. 하지만 그 충성은 진정한 게 아닙니다. 강요된 이상 어떤 것도 진실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학교 관리자 몇 분이 이 사항을 결정했다는 것이 더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동안 뭘 보셨나요? 썩은 된장국처럼 거무죽죽하게 떠 있는 부레옥잠이요? 아니면 1년마다 갈아치우는 화단이요?

 저희 학교는 화단에서 피는 꽃을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람이라는 꽃을 키우는 게 목표가 아니었나요?
 아예 농업 고등학교로 학교를 바꾸면 더 낫겠군요.
 
 이 사안이 터무니 없다면 만약 실용화되었을 경우 책임은 누가 지실 겁니까?
 애당초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 나왔을 때 모두가 믿었다는 것,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이라 보십니까? 학교에서는 '믿을 거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여지'라는 게 있습니다. 졸업생들은 바보가 아니고, 순순히 넘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오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중장기 발전 계획 보고서를 어떻게 내셨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신다면 교육청에 물어보고, 대답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떻게든 답변을 얻어내고 말겠습니다.
 
 취업, 진학, 사실 이 두 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왜 이 학교에 교장으로 오고 교감으로 오셨나요?
 수상 실적을 의기양양하게 뽐낼 수 있어서?
 학교 겉이 예쁘니 화단도 마음껏 꾸밀 수 있어서?
 
 학교에서 '먹이고 재워주는' 건 학생이지만, 학생들도 자원적으로 자퇴를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 건 학생입니다.
 그 학생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는 게 학교입니다.
 사업체를 꾸리실 생각이시면 선생님을 그만 두시고 지금이라도 취업 전선에 뛰어드시면 됩니다.
 황금광시대처럼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반복 패턴만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선 저 같은 불량품은 나오지 않습니다. 완성품 가득한 사회로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이메일을 받은 출처는 혹시나 피해가 갈까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메일로 받았어요. 퍼뜨려야 할거같다고 생각하고있기에 여기에 올립니다.

 

 

 

(이메일 내용)

 

얘들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하니 길이 조금 길더라도 모두 잘 읽어주길바래.

얘들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하니 길이 조금 길더라도 모두 잘 읽어주길바래.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학교에 근무하고있던 산학겸임교사들(김정운,박정준,손기영,박성민)을 학교가 해고하려고 하고 있단다.

이유인 즉은 소위 비정규직법안 때문이야. 다음해(2011년)에 우리들을 재임용할경우 산학겸임교사는 무기한계약제로 전환이 되는데 학교와 경기도교육청의 과학직업교육과가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인거야.

다시 말하면 아무런 잘못도 하자도 없이 그냥 해고를 통보하고 있다는거야. 일부사람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우리산학겸임교사들은 정든학교와 학생들을 떠나게 된단다. 그래서 산학겸임교사들은 내년3월부터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려고 그동안 여러가지 준비를 해왔어. 그런데 이시점에서 학교는 학교발전중장기계획(안)이란 것을 암암리에 작성했고 이문서는 이미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상태란다.

 

이 학교발전 중장기계획(안)의 가장 충격적인 안은 영상연출과의 폐지란다. 그간 학교에 수많은 수상실적을 가져온 영상연출과를 학과유지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폐지한다는구나.

그리고 이 안건에는 만화. 애니메이션과에 대한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지.

만화와 애니메이션과를 통합하고 애니과를 컴퓨터그래픽과 3D애니에 중점을 둔 학과로 개편하겠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우리학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과는 컴퓨터게임과라고 말하면서 컴퓨터게임과만이 현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내용이란다.

애니과를 컴퓨터그래픽과 3D애니과로 만든다.... 이것은 애니과를 컴퓨터게임제작에 필요한 그래픽들을 제작하는 과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너희모두 알겠지만 그간 우리 만화창작,애니메이션과, 영상연출과는 해마다 다수의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국내 및 해외 대회에서 수많은 수상실적을 올려왔었단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왔다. 이것은 교장,교감선생님이나 일부 미술부장교사들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과 전공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만들어낸 실적이란다. 그리고 그러한 실적들이 우리 애니고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건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개교10년이라는 짧은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애니.영상,게임 학교로서의 위상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 학교가 몇몇사람들의 손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는거야. 이것은 비단 재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졸업생들아....생각만해도 아련한 이 애니고가 앞으로는 취업을 위한 학교로 바뀌게되고 우리같은 전공교사들을 1년에 한번씩 갈아치운다니..과연 이러고도 애니고가 지금과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한 이 학교발전중장기 계획에는 다른의도도 숨어있는거 같다. 현재 우리가 진행할려는 소송은 여러 변호사의 의견을 종합해본 결과 승소할 확률이 크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승소를 해도 학과가 개편되면 다시 복직할 수가 없다는거야. 학교는 이것을 알고 미리 손을 쓰고 있다고 판단된다.

 

맨처음의 시작은 산학겸임교사들의 부당해고에 대한 억울함을 알리는 거였지만 이제 이문제는 산학겸임교사의 해고를 벗어나 학교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안으로까지 나아가게 된거란다.

 

누가 이학교의 주인인 것이니? 교장.교감,전공부장?? 그들은 이학교의 주인이 아니야. 이학교의 주인은 교육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학생과 학부모인거야. 그런데 관리자와 전공부장은 쉬쉬하며 학생과 학부모를 고려하지 않은 문건을 작성해서 상부에 보고하고도 여지껏 이것을 동료교사 선생님들에게 공개하고 있지 않은 상태란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학교가 누구의 학교인지를 보여줘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이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밖에도 여러가지 사안을 독단적인 결정을 하고 진행해왔단다. 그리고는 학교구성원에게 이를 통보하는 식의 자세를 유지해왔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게 넘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단다. 그들은 이 문건이 단순히 보고를 위한 문건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문서화시켜 상부에까지 보고했는데 어떻게 이것이 단순한 보고용이라는 것이겠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그 교육과정이 완전히 틀리다는 것은 너희들도 잘 알거야. 대학에 진학하게되면 더더욱 절실히 느끼겠지. 애니과 자체도 더 세부적으로 전공을 가르고 있는 이 판국에 만화와 애니를 통합한다는건 발전이 아니라 퇴보라는건 상식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문제란다.

그리고 영상연출과를 폐지한다는 것은 영상연출과의 모든 학생,학부모,교사 그리고 졸업생들 모두를 기만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구나.

 

애니과의 경우 컴퓨터그래픽과 3D 애니라는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애니고에서는 일년에 단 2,3편의 작품도 제대로 내지 못할꺼야. 3D는 간단히 배워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파트가 아니니깐...아마도 학교관리자나 일부 미술교사에게 점수와 상금을 안겨줄 기능경기대회에 써먹기엔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만화과도 애니과도 작품의 수준은 떨어지고 편수는 줄어들게 되는 현상은 불보듯 뻔할꺼야.

 

얘들아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나는 더이상 두고볼수가 없구나. 재학생 졸업생 너희모두가 이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교를 지켜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애니고는 너희들의 것이란걸 잊지마.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초능력자-결국 문제는, 타자와의 소통


 

 

 

 

'아저씨'를 봤다. 원빈만 봤다. 아름다웠다. 원빈이 너무 예뻐서 '아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없고 원빈만 있었다. 동기는 그렇게 말했다.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배우에게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클로즈업으로 인해 영화의 서사를 다 잡아먹어 버리기도 한다. 원빈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과거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잘생긴 얼굴 둘이 있었지만, 검댕과 서사의 강렬함으로 인해 외모는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가요계는 이미 아이돌 천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노래보다는 외모와 퍼포먼스 중심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하다는 말은 사실 유명 배우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메이저가 아닌 언더의 영화들이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유는 포스터에서 잘생기거나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전에는 음악 영화 '어쿠스틱'이 개봉했었는데, 임슬옹과 씨앤블루 등 인기 있는 아이돌들이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물론 그 중에도 신세경이라는 배우가 있었지마는, 사실 극 전반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건 사실이었다. 꼭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반으로 동영상을 짜놓은 느낌이었다.
 이번 '초능력자'에서도 사실 그 불안한 기우를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시놉시스는 '아저씨'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아저씨'는 먼치킨 캐릭터인 아저씨가 등장하는 반면 이번에는 먼치킨으로 보이는 두 캐릭터가 등장해서 팽팽하게 내러티브의 끈을 잡아당기지 않을까. 그렇다면 강동원이나 고수의 외모보다도 그 서사성에 더 주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뿌린 씨앗을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가 바로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내린 결론이다. 꽃을 피우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다음 열매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정수리 위에서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다가, 떨어지면서 딱 하는 소리로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그 열매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격주 빌런 시네마

 '소설의 이론'을 쓴 루카치는 현대 내러티브 예술-영화, 소설, 연극을 다 포함해서-의 주인공은 일종의 마성적 존재라고 말했다.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현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하거나 이탈을 꿈꾸는 존재라는 것이다. 허나 완벽한 이탈은 없다. 인물은 사회적 관습에 한 쪽 발꿈치를 담그고 있다거나 자신의 본적지를 두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이탈자가 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아킬레우스처럼. 그들은 완벽한 세상,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 유토피아는 이뤄질 수 없다. 그들 자신조차도 무의식 중에 그걸 깨닫고 있다. 여기서 빌런과 영웅의 존재가 갈라진다. 빌런은 그들의 유토피아가 이뤄지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방해하려는 세력이나 뛰어넘으려는 이들을 짓밟고 지워낸다. 하지만 영웅은 다르다. 슈퍼맨 같은 영웅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유토피아를 사회와 융합하려 한다. 사회와의 소통을 포기한 자와 포기하지 못한 자. 빌런과 영웅은 이렇게 나뉜다. 종이 한장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웅보다 악당, 빌런에 더 감정이입을 할 때가 많다. 그들이 그렇게 빌런이 된 것은 단순히 '우월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에 잠재되어 있던 본능, 우리 안에도 있는 본능 때문인 것이다. 영웅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우상이 된다.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웅은 '영웅'이 된다.

 


 초인(강동원)은 보다시피 빌런이고, 그는 그의 장난감들처럼 완벽한 그의 세상을 꿈꾼다. 그의 인형은 웃고 있다. 인사하듯 한쪽 손을 경쾌하게 들어올리고 있다. 흡사 친구를 만난 듯한 표정이다. 야트막한 건물들과 개미같은 차들. 허나 그 배경에 그 말고 다른 인간은 없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그를 알아채는 순간 배척하고 경시할 존재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나레이션으로 '내 어머니마저 나를 죽이려 들었다'며 그의 절망감을 표현할 때, 사람들은 강동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만약 그가 초능력을 잃었다면 그는 그저 한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살았을 것이다. 그의 초능력은 배트맨의 조커처럼 한없이 매력적이고, 위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그에게 조종을 당한다. 그는 타인과 애당초 소통하지 못하는 자다. 소통을 배우지 못한 아기와 같은 존재다. 그로 인해 그는 더 고독해지고, 점점 더 바깥으로 어긋난다. 허나 그의 아킬레스 건, 어머니-다리 때문에 그는 사회적 관습 속으로 도로 끌려와 '학살'당한다. 사실 보면서 규남(고수)이 영웅이라기 보다는 조금 납득할 수 없는 존재, 초인과 비슷하거나 묘하게 거슬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규남도 사실 '초능력자' 중 하나다. 엄청난 회복력과 초인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또한 초인처럼 밑바닥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초인과 다른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속하고 그 소통의 끈을 계속 놓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둘을 같은 위치에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규남을 초인처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존재로 만들고, 밑바닥 인생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사실 초인보다 규남에 더 집중해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나, 우리는 배트맨에게 감정 이입하고 조커를 두려워했다. 미국 영화에서는 이렇게 영웅을 우위로 치켜 올린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다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히어로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히어로는 결점이 있어도 그걸 극복해 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국기 옆에서 웃어야 한다. 한국 영화에서는 그 결점을 다 드러내고, 그 결점은 영화 전반에서 계속 주인공의 주변을 떠돌며 그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그는 스스로 아이러니에 빠질 것이라는 걸 몇번이고 되새겨 준다. 현실은 시궁창, 그 뿐이다.
 규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는 지하철에서 초인이 죽이려던 아기를 몸을 던져 구하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게다가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사람들은 본척도 않는다. 어쩌면 초인의 초능력으로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도록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실 현실이 그와 비슷하다. 몇몇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할런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 한번 그보다는 못하지만 충격은 비슷한 광경을 봤다. 한 할머니가 전철 의자 한쪽에 쓰러져 있었는데도, 다들 못본 척 했다. 물론 잘못 처치했다가는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 아니면 그냥 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확실하다. 이제 물어볼 수 있을만한 여유는 사라졌다는 것. 초인은 규남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준다. 잠시나마 그 광경은 그들이 대등한 위치, 즉 사회적 관습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 타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규남만이 초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를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규남은 그를 뒤늦게서야 이해하는 것 같다. '같다'라는 표현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초인은 '빌런 시네마'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그 때 우리는 초인의 인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초인에게 감정 이입을 한다. 하지만 규남에게는 좀처럼 감정이입하지 못한다. 규남에게는 오로지 선만 있을 뿐, 인간다움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크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맨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영웅을 아직도 기다리며


 '초능력자'의 주인공은 둘이고, 이는 빌런과 영웅의 대결 구도로 정립된다. 규남은 영웅이다. 허나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영웅이다. 나중에 그를 조금이나마 인정해 주는 사람은 그가 섬기던 사장 딸 뿐이다. 완전히 그를 인정해 주던 사람은 오히려 초인이었다. 초인은 규남에게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진 사람이다. 왜 너를 제대로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목을 매지? 왜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려 하지? 그리고 초인은 그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를 생각해 주지도 않고 너를 걱정하지도 않는데. 하지만 규남은 완전한 선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난 규남을 보면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층계 위에서 떨어질 때 규남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장면, 사실 그 때서야 인간다움이 조금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인간다움도 왠지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슈퍼맨이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어떤 시대에서 어떤 창작물이 나오는가는 그 시대에서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뮤지컬 '영웅'도 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 사회, 부조리하고 온갖 거짓말로 넘쳐나는 사회에서 모든 걸 구제해 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영웅은 크립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웅은 이 사회에서 태어난 존재여야 하고, 인간다운 감정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일종의 타자적 존재고, 영웅이 필요한 건 바로 타자적 존재들이다. 타자들은 '이해'를 원한다.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려는 영웅.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규남이 초인을 껴안고 떨어질 때, 그리고 초인을 보면서 어쩌면 그와 자신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뒤늦은 후회를 할 때,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영화는 지속된다. 그 뒤부터 나는 왜 일어나고 싶었는가. 초인의 죽음과 규남의 생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규남은 이제 자신의 '초능력'을 인정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초인만이 그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규남이 전신 마비가 된다는 건 쓸데없는 리얼리티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리얼리티를 포기해야 옳았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아이를 구한다는 것도 뜬금없다. 차라리 리얼리티를 도입할 것이라면 정말 리얼리티로 가는 게 나았다. 규남은 전신마비로 일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환상에서만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간극에 가슴 아파해야 했다. 아니면 아예 전신 마비 씬을 없애던가. 씨앗을 뿌렸으나 제대로 거두지는 못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사회적 경계를 이탈한 존재들의 싸움, 그리고 빅뱅.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이 영화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고수가 얼마나 순박하고 잘생겼는지를 보여주는 팬비디오가 아니지 않은가. 강동원 클로즈업이 나올 때도 나는 이 영화가 팬비디오가 아니고, '아저씨'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허나 뒤로 가면서 어찌나 고수의 팬비디오스럽던지.
 이 영화는 극 중후반까지 긴장을 유지한다. 긴장-긴장으로 이루어지는 액션 서사 때문에 조금 정신없기는 했지만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에필로그처럼 클라이맥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불필요했다. 영화에서 이뤄놓은 것을 후반부에서 다 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저씨'처럼 영화를 배우의 외모가 다 잡아먹는 게 아니라 내러티브에서 불필요한 욕심이 영화를 잡아먹었다. 어쩌면 감독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초인은 단순히 악당일 뿐이고, 규남은 아주 올바른 청년이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아마추어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만약 이 영화에서 꼭 에필로그를 넣고 싶었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아예 초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한 존재, 그렇다면 우리는 초인에게 제대로 감정 이입을 할 수 없고, 그를 악당으로 치부하게 된다. 초인이 만약 어머니를 죽였다면, 그리고 그를 얽매이는 모든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났다면 우리는 그를 악당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허나 쓸데없는 감상성, 인간다움 때문에 초인은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규남이 우리에게는 더 괴물로 다가온다. 하지만 감독은 규남에게도 일종의 리미터, 제한기를 걸어 놓는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장과 사장 딸, 그의 친구들. 제한기가 하나 하나 풀어질 때마다 규남은 괴물에 가까워진다. 초인처럼 규남에게도 마지막 제한선이 있다. 사장의 딸이다.

 허나 참 답답한 것이, 초인에게는 온갖 대사가 있다. 그는 규남에게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거듭 말한다. 규남은 그를 위협하는 존재다. 초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규남에게는 초인이 애초부터 적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초인을 먼저 이해하게 된다. 초인은 그의 장난감 세계와 그의 과거를 보여주고, 그의 인간다움을 보여준다. 허나 규남이 하는 대사라곤 그저 '넌 누구냐'밖에 없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초인의 이름을 묻는다. 초인은 그 때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규남은 그 때 몸을 날려 초인을 덮친다. 둘이 함께 차 지붕 위로 떨어지고, 죽음의 가능성을 공유하는 순간에서야 둘은 소통하게 된다. 둘 다 타자적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소통. 그제서야, 그것을.

 

 


 '초능력자'는 결국 씁쓸한 비극으로 남는다. 에필로그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초능력자'는 비극이 되어야만 했다. 비극은 모든 게 다 죽어야만 비극이 되지 않는다. '소통의 불가능성'이 바로 비극의 끝이다.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의 소통 시도를 거부하고 그의 고집대로 행하려 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와 소통하려 하지만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소통은 실패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찌른다. 하지만 그가 없어도 그의 나라는 돌아가고, 크레온이 대신 통치한다. '초능력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죽어도 사회는 여전히 시계처럼 돌아가고, 그 사회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미학적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하고 타자적 존재를 배척하는 사회다.
 

 

 


 우리 주변의 '초'능력자


 결국 '초능력자'는 타자에 관한 영화다. 우리 사회에는 울타리가 있다. 그 울타리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웃기고 자빠졌다. 사실 그 울타리는 세금도 내고 얼굴과 머리색이 한국인 표준에 맞아야 하며 소득이 일정하게 있어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있다. 그 울타리는 사실 환상이다. 전쟁이 나면 평범한 사람들은 다 죽는다. 타자들도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타자'를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해 노벨문학상을 탄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사회적 관습에서 밀려난 타자에 대한 이야기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도 제이디 스미스도 어느 경계에도 속하지 못한 타자에 대해 쓴다. 문학은 이제 '타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워낭소리가 인디 영화계에서 '히트'를 쳤을 때, 기존 영화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가? 워낭소리는 이제 타자로 밀려난 인간과 동물의 교감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다.
 초인과 규남은 둘 다 '타자'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초인이 그의 어머니에게조차 거부당했을 때, 그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꿈꾸었다. 규남은 그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려고 애썼다. 초인은 규남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이 너를 만난 건 다 실수였어. 너는 아예 혼자여야만 했어. 이 말은 묘하게도 초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초인은 규남을 통해 자신을 보고, 규남은 초인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이 묘한 거울적 관계, 그리고 규남은 초인을 죽인다. 사실 규남과 초인은 함께 죽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거울이 깨지면 거울을 보고 있던 그 자신의 정체성은 홀로 떠도는 방랑자가 되거나 함께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남은 살아남는다.
 초인이 시선을 맞춤으로써 초능력을 쓴다는 것도 흥미롭다. 어느 누구도 초인과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눈을 '맞추고' 대화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소통을 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이다. 허나 사람들은 초인과 소통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미친 사람을 보면 절대로 '시선을 피하거나'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로 인해 타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에서는 미친 메리라는 사람이 나온다. 미친 메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다. '타자'다. 하지만 사마드는 타자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 순간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미친 메리는 이제 미친 메리가 아니라 그냥 메리라는 사람일 뿐이다.
 초인과 규남은 소통에 실패하거나 너무 그 시도가 늦었던 이들이었다. 영화에서는 일종의 알레고리적 성격을 띄면서 이들의 관계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결국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타자 뿐, 그리고 그 소통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초인처럼 다리 한쪽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관습에 의문을 품는 것, 어째서 이래야 하는지 끝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매트릭스적 뿌리를 보게 되고, 그 뿌리가 달랑거리는 순간 뒤돌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통하는 순간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나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에게 새롭고도 동시에 오래된 이 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사마드는 15년이 족히 넘는 기간 동안 아무도 미친 메리에게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메리를 만진 것이다. 아주 살짝, 어깨를.
 "우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나의 경우, 마음의 반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그냥 지나가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성전에서 싸우고 싶어 합니다. 지하드! 그리고 분명 우리는 밖으로 나와 이것을 거리에서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종국에는 당신의 과거가 나의 과거가 아니고 당신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니고 당신의 해결책이 나의 해결책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진실과 견고함이 하나의 제안이 될 겁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나의 희망은 최후의 날에 있습니다. 선지자 무함마드, 그 분께 평화를. 그분께서는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이 의식을 잃는다고 하셨습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상태, 세상의 모든 잡담이 사라진 상태. 이런 빌어먹을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 그럼 저희는 이만."

                                                    -제이디 스미스, '하얀 이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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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능력자'를 본 다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아저씨'보다 훨씬 낫다고 추천했다. 허나 에필로그를 보지는 말라고 말했다. 트랜스포머처럼 짜투리 영상을 끼워넣기에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 그 많은 생각을 대충 서랍장에 집어 넣느니 흩어진 그대로, 벤야민의 폐허를 쳐다보는 게 더 나았다. 사람들을 더 생각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수 있었다. 강동원과 고수의 연기는 좋았다. 강동원의 외모보다 연기에 더 집중한 건 사실 처음이다. M에서도 강동원의 외모만 눈에 더 들어왔다.
 사실 나는 내러티브가 없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이라도 내러티브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내러티브가 아예 없는 영화로는 '디 워'를 들 수 있다. 그 영화는 정말 명작이다. 명작이라는 것은 그 영화같은 영화가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어법을 내포한다. 오마주도 사양한다.
 하지만 '초능력자'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함께, 조금이나마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 '초능력자'의 장점 중 또 하나는 '장면'이다. '장면'의 설정이 너무 좋았다. 단순히 외모를 부각시키지 않고 그 장면의 내러티브를 녹여낸, 컷마다의 분위기가 좋았다. 규남이 사무실 위쪽의 대들보 천장에서 숨기 위해 오가는 것도 좋았다. 초인과 싸우기 위해서는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위는 그저 허상일 뿐이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허상. 초인은 허상을 꿰뚫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허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번번히 '아저씨'와 비교해서 다른 '아저씨' 팬들이 유감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배우의 비주얼이 탁월하고 나름 내러티브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영화 두 편이었기 때문에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에는 문제 의식 자체가 없다. 팬비디오 그 자체다. 그래서인지 왜 영화제에서 상을 탄건지, 아직도 조금 의문이 남아 있다. 강동원과 고수보다는 원빈을 더 좋아하는데. 왜 영화에서는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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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말이 도중에 더 생겨서 마구 쓰다 보니 어느새 훌쩍 12시를 넘겼다. 늦은 건 처음이라 시무룩하다.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뮤지컬 서편제-계절처럼 되돌아오는, 소리.

 

 

 

 


 뮤지컬 '서편제'를 봤다. 이청준의 소설, 남도 사람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원작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에 대해, 그닥 호감을 보이지는 않는 편이다. 돈은 없으면서 입맛은 더럽게 까다로운 것이다. 이전 국립극장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를 현대극으로 바꾸어 공연했을 때도 나는 아낌없이 악평을 쏟아 부었다. 원작을 읽거나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면, 사실 사람들은 그 내용이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다르게 나타났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호평을 받은 2차 창작물은 사실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악평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왠만하면 2차 창작물을 볼 때에는 기대를 하지 않고 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청준의 '서편제'가 뮤지컬화된다는 소식을 씨네21에서 읽은 후로,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청준의 소설들은 영화, 연극 등 2차 창작물로 번안되는 경우가 많다. 원작이 그대로 영상화되거나 다른 식으로 변용되서 나오는데,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는 이청준의 소설 텍스트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와 소설 텍스트의 가치가 비교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텍스트의 가치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영상의 가치를 드높여 준 작품들이다.
  이청준의 '남도 사람' 시리즈는 임권택 감독 등 수많은 감독들의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만큼 아름답고, 무서울 정도로 단아한 텍스트다. 너무 자세한 텍스트는 독자의 상상력을 막고, 영상화에 있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다. 하지만 이청준은 다르다. 텍스트로만 온전히 이야기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기에, 그는 여백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그 여백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송화의 목소리가 되고, 동우의 이글거리는 햇덩이가 된다.
  변용된 작품들은 또한 제각기 빛을 낸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서편제'가 과연 뮤지컬이 될 수 있을까? 공연을 보러 가는 내내, 내 뇌리 속에서는 저 질문이 번잡하게 떠다녔다. 팔만원 가량 되는 공연을 실제로 보는 건 사실 처음이었다. 이전에 본 조승우 지킬의 지킬 앤 하이드도 사실 친구가 3만원에 좋은 좌석을 양보해 줬기에 볼 수 있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본 동기는 나에게 돈만 들었지 그닥 좋은 공연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과연 내 담배는 남아날 것인가. 오랜만에 본 친구와는 어떤 표정으로 공연장을 나오게 될까?

 

 

 

  길의 계절-길을 가자, 길을 가자.

 

 

 뮤지컬 '서편제'는 정말 뮤지컬이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조화롭게 표현한, 좋은 작품이다. 소도구가 인물을 방해하지 않고, 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 이입하게 하면서도 서양음악과 동양음악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극을 감싸준다. 뮤지컬은 원래 서양에서 나온 음악극이다. 또한 플롯에는 한계가 있다. 오페라처럼 노래로만 치우치지도 못하고, 연극처럼 플롯 위주로 치우치지도 못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둘 다를 외치는 청개구리 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 서양 청개구리로 동양권의 내용을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재 대학로에는 이 나라를 기반으로 한 내용의 창작 뮤지컬들이 많지만, 좋은 연출과 소재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어째서 큰 극장에서는 서양 뮤지컬만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애당초 다루는 게 서양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뮤지컬로 발했을 때 궁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조금씩 반영했다는 소문으로 이제서야 한국식 뮤지컬이 태어나는 건가. 하는 기대가 있었다. 허나 '명성왕후'는 말 그대로 약간의 픽션이 섞인 역사에 불과하다. 이미 정해진 결말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역사를 돌려감기로 보는 것과 같다. 결국 '명성왕후'는 좋은 작품이지만 지루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허나 '서편제'는 다르다. '명성왕후'는 이미 고증된 역사와 결말을 팩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여운 말고는 깊은 공감이나 절절함을 끌어내기가 힘들다. '서편제'의 뮤지컬 인물들은 '깊이'와,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뮤지컬의 인물들은 사실 '깊이'가 있을 수 없다. '깊이'가 있는 인물들은 작품의 주인공이거나, 아주 뛰어난 작품의 인물들이다. 노래 가사로서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만 뮤지컬의 플롯은 노래와 춤이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닥 많은 이야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수많은 연출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허나 사람들은 최우선적으로 '노래'를 들으러, 공연장으로 간다.
 뮤지컬 '서편제'의 인물들은 재미있게도 우리 근처에 있는 인간 군상이면서, 동시에 그 군상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동우와 송화의 아버지인 유봉은 과거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으로 스승에게 설사약을 먹이고 스승 대신 창판에 나갔다. 그 때 스승에게 쫓겨나고, 힘들게 쏘다니며 방황했던 기억 때면에 동우의 반항을 곧이 곧대로 봐 넘기지 못한다. 어떻게든 북을 잡게 해서 소리 쪽에 가까이 두려 한다. 하지만 동우는 '소리'에 쫓겨, 또다른 '소리'로 대피한다. 송화는 부정으로 인해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눈이 멀고 만다. 그리고 소리를 얻게 되었는가? 사실 송화가 얻고자 했던 소리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그 소리는 '유봉'의 집착으로 인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송화의 한이 우리의 무의식에 있던 한을 풀어내 주는 것이다.

 

 

 매력은 인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한지들을 덧붙인 벽 여러 장이 있다. 그 벽들은 움직이면서 배경을 바꾸고, 조명에 따라 한지 특유의 부드러운 색으로 부딪치면서 극 전반에 걸쳐 아련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미군 부대 공연을 위해 자본에 찌든 사업가들이 나올 때 이 벽들은 가만히, 구석에 서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분리라고 본다. '한지'는 매끄럽고 탄력있는 일반 종이에 비해 힘이 없고, 약간 결이 성겨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속에 있는 걸 완전히 가리는 게 아니라 어렴풋이 비춰주면서, 지금 우리는 현대가 아니라 과거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이고, 이 한지의 결처럼 엉겨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한이 어떻게 무대 위에서 표현될 지, 무대 장치를 통해 미리 시사하는 것이다. 공연하기 전 공연장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는 마치 한지가 진짜 바람에 나부끼면서, 소리를 싣고, 기억을 싣고 무대 위로 날아드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 무대 장치가 그냥 '장식'으로만 여겨진다면, 사실 한지고 뭐고 상관없다. 하지만 이 무대 장치는 극의 표현에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가령 어른 동우가 어렸을 때의 동우 자신과 어머니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그렇다. 어른 동우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천천히, 걸어서. 그렇다면 그의 기억에서 가장 트라우마가 되었던 '거대한 햇덩이'를 다시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두 개의 한지 벽으로, 아이 동우와 어머니의 장면은 그림자로-어른 동우는 벽 밖에 휑뎅그레하게 내던져져 닿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 애타게 손을 뻗는 것으로 시간차를 드러내면서도 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또한 송화와 아버지, 그리고 동우가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벽 하나를 두고 빙빙 돌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해 노래하는 것도 좋았다.

 

 

 어쩌면 그 장면은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함께 하는 추억이었기에 더 아름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가는 가족들을 무대 가장자리를 돌게 한다던가, 가로질러 걷게 한다던가 하는 것은 관객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서편제'에서는 빙빙 돈다. 애당초 이 뮤지컬 '서편제'는 일종의 순환, 모든 것이 힘들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원처럼 순환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연출 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심 봉사 이 말을 듣고

 에으이 청이라니 이게 웬 말이냐
 내가 죽어 수궁을 들어왔느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갑갑허여라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어디 어디 어디 내 딸 좀 보자

 두 눈을 끔적끔적끔적거리더마는
 끔적끔적끔적거리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심청가 中-

 

 

  '서편제'가 가리키는 것은 '순환성'이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사람들이 아무리 집착을 하고 청춘의 열기 때문에 헤매여도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원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다시 한번 헤엄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서만, 우리는 잃어버렸던 것을 찾을 수 있다. 송화의 눈은 동우가 떠났을 때부터 멀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동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송화는 눈을 감는다. 송화에게 동우는 눈꺼풀 안쪽에 남은 잔상이다. 아버지는 송화의 눈을 확실히 멀게 한다. 이는 동우에 대한 상실감을 송화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송화의 한은 그 뿌리를 더 확실히 돋궈 안쪽으로 파고든다.

 심봉사가 어디, 어디, 어디, 하면서 천천히 안간힘을 쓰는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안타깝고 서러웠을까. 송화가 눈을 뜨는 건 동우의 귀환이다. 심봉사처럼 '번쩍'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아도 동우가 자신 앞에 돌아와 있다는 걸, 그리고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기에. 송화는 기쁘게 미소 짓는다.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천천히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송화와 동우, 둘 다.

 

 

 

  남도 사람 이야기-한과 승화의 순환

 

 2차 창작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원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보통은 원작을 잘 반영했느냐 아니면 반영하지 못했느냐인데, 이 뮤지컬 '서편제'는 소설 원작과 방향이 다르다. 남도 사람 시리즈 1,2에 해당하는 '서편제'와 '소리의 빛'에서 어느 정도 취해온 감도 있지만, 이청준이 서술하는 '서편제'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만 같고, 나머지는 거의 다 다르다.
 우선 뮤지컬에서는 동우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동우가 송화를 찾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그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내려가는 순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이런 식으로 극을 진행해 나가면 산만함의 극치가 될 것이다. 동우는 송화 주변을 떠도는 행성이고, 송화는 소리의 힘으로 동우를 끌어당긴다. 소설에서는 다르다. 송화의 소리에 대해 동우가 집착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해, 좀 더 깊고 비틀린 심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동우의 '극복'이 주가 된다. 동우는 거대한 햇덩이의 소리는 피할 수 없고, 마치 자신의 부모처럼 안타까운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1차 '극복'을 하며, 자신이 찾던 것이 궁극적으로는 마음 속에 흔적을 남겼던 송화였다는 것을 알면서 2차 '극복'을 한다. 마지막으로 송화와 만나게 되는 순간, 뮤지컬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린다.

 

 

 기억은 희미해져 가는데
 모든건 추억이 되는데
 뭔가 그냥 가만두질 않고 날 붙잡는 건
 뭔가 그저 흘러가질 않고 돌아보는 건
 그건 너의 흔적이야
 내게 남긴 너의 흔적

 

                                        -뮤지컬 서편제, 흔적 中-

 


 소설에서는 송화와 동우가 동침을 한 다음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떠나게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동우는 그 후로도 송화를 계속 찾아다니고, 송화는 피한다. 뮤지컬에서는 다르다.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송화와 동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둘을 이어주는 건 소리라는 것을, 한은 한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부드럽고 완만한 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뮤지컬 속 송화와 동우는 같이 소리를 하고, 송화는 심청가를 하면서 동우라는 것을 재차 깨닫고 송화 자신의 한도 극복해 낸다. 상호 간의 해소이다.
 어쩌면 뮤지컬의 결말에서, 더 이어진다면 소설처럼 둘은 헤어질 수도 있다. 허나 뮤지컬의 결말에서 시간은 멈춘다. 무대의 조명이 꽃이 피어나듯 움직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여운을 남기면서 멈춘다. 순간 관객들도 숨을 멈춘다. 이청준은 영화나 소설 등 각 컨텐츠에서 '서편제'를 다루는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름'은 더 다채롭게 피어나가면서, 각자의 색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원작에 매몰되거나 천천히 스러져 죽어가는 것 없이.

 

 

 

 

 

 ...떴구나.

 

 차지연의 심청가는 나름 강단이 있고 좋았다. 허나 뮤지컬 극의 느낌이 많이 묻어났다. 안타깝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지연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기존 OST에서 들은 차지연의 목소리는 가사만 바꾸면 외국 배우라는 느낌이었다. '서편제'에서 차지연의 목소리는 곧게 솟아올랐다가 종이 비행기처럼 팽글팽글 돌면서 여운을 남기며 내려간다. 이자람의 '심청가'도 물론 좋다. 사실 이 전에 판소리를 완창했다는 점에서 더 안정되고 더 깊은 감정을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JK 김동욱이 유봉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걸 보고, 그 자체로도 신기하기도 했으나 의외로 판소리극에 목소리가 어울린다는 것도 신기했다. 허나 아직 어색했다. 힘을 과도하게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유봉이라는 역할이 약간 고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만큼 목소리의 해석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또 동우 역의 김태훈의 연기에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약간 소년 풍으로, 치기가 어리면서도 앳된 그 분위기가 이 '서편제'와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허나 이 '서편제'의 메시지는 약간 산만한 감이 있다. 결국 동우가 헤맨 것은 '청춘', '방황할 시기'였다는 것이고 순환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인데, 1부에서는 각 에피소드의 비중이 너무 비등비등해서 밋밋했고, 2부에서는 급격하게 플롯이 전개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했다. 1부가 커피라면 2부는 티오피다. 1부는 왠지 긴 도입부를 연상케하고 2부부터는 전환점으로 급격히 치닫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밋밋함을 조금 더 조절해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송화와 동우의 관계는 이 뮤지컬 ;서편제'의 계기가 되고 결말이 된다.
 음악이 총 30여 곡이 되는데 그 중 국악을 제대로 활용한 노래가 10편 남짓 된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음악 전반이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딱 좋았다. 플롯은 단조로워서는 안 되지만, 이 '서편제'의 음악은 단조롭고 그 여백이 있으면서도 여백이 여백으로 느껴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아이들의 코러스 라인이 좋기는 했으나 무대에서 가까이 듣지 않으면 초반에 잘 들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아역의 문제점이 바로 그 점이라는 걸 충분히 알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바로 이 극의 시작을 장식한다. 가사는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엔딩 부분에서 송화와 동우의 조우, 그리고 송화가 심청가를 부르는 장면은 좋았다. 송화는 심청가를 부르면서 '눈을 뜨다'라는 심봉사의 모습을 자신이 눈 앞에 있는 동우가 동우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일시한다. 소설에서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이 엔딩은 그만큼 뮤지컬 '서편제'를 가치있게 한다.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면 사실 표가 얼마나 비싸든 상관없을 것 같다. 그만큼 감동적이다. 허나 조명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노란색과 보라색 원으로 마치 꽃이 피어나듯 위에서 쏘아 내리는 조명은 그 색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색으로 입체성을 띄면서도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좋다. 하지만 노란색과 보라색은 묘하게 독을 품은 꽃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미군 부대 면접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색깔이 아니던가. 차라리 동우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송화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단아한 색으로 바꾸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를 가리고 있던 한지 벽들이 걷히고, 출연자 전원이 처음부터 나와서 인사를 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양식으로 인사를 곧장 하기보다는 한국식으로, 강렬하게 마지막 인상을 남기는 게 물론 좋은 시도기는 하다. 허나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왜 기타노 다케시의 '피와 뼈'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너무 비장해서 조명을 좀 더 밝고 깨끗하게 쓰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차라리 절은 어떨까? 조용히, 두 손을 맞대고 깨끗한 흰색 조명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다.
 뮤지컬 '서편제'는 11월 초에 막을 내린다. 좋은 작품이다. 뮤지컬 '렌트'는 '라 보엠'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라 보엠'에서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을 다루고, '렌트'에서도 비슷하지만 사회 문제인 에이즈와 관련해서 더 활발하게 풀어나간다. '라 보엠'은 오페라 그 자체로 좋다. 만약 렌트가 오페라가 되었더라면 그닥 호평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뮤지컬은 자유로운 변용이 생명이다. '리틀 샵 오브 호러스'와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보라. '서편제'는 원작 텍스트가 있지만, '렌트'처럼 사회상-판소리가 점점 줄어가고 외국 문화가 밀려 들어오는 근대-를 반영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긍하게끔, 노래와 함께 쉬이 풀어나갈 수 있게끔 한다. 서양음악 뿐이던 뮤지컬 속에서, 한국의 뮤지컬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사실 뮤지컬을 꼭 현대를 배경으로 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허나 우리는 강박적으로 현대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룬다. 원작의 탄탄함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플롯의 탄탄함, 사람들은 영상화와 연극이 이제 사람들을 위한 예술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럴 수록 우리는 텍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텍스트야 말로 한국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뮤지컬 '서편제'는 그 텍스트에서 또 다른 한국의 모습, 순환성을 보면서 한국형 뮤지컬의 뜻있는 시도를,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시기는 바로 문화가 바뀌는 시기다. 그 때 수많은 문화들이 학살되고 새로운 문화들이 자라난다. 어떻게 보면 행운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불행이다. 그럴 때의 이야기들이 더 많지 않겠는가. 단순히 현대나 너무 격렬했던 민주화 운동, 혹은 아예 과거를 그려내는 것보단 그 변화의 순간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구식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지나쳤던 보물찾기의 쪽지를 발견할런지 누가 아는가. 그 터닝포인트를 찍어낸 뮤지컬 '서편제'는, 과거 보물찾기에서 번번히 실패하던 나한테 보인, 옹이구멍 속에 꽂힌 보물찾기 당첨 쪽지와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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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전번에 이자람 밴드가 집 근처에 있는 야외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도서관으로 바삐 걸어가다가 언뜻 그 밴드의 공연을 듣게 되었는데, 묘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힘있게 뻗어가면서도 주먹에 쥐고 있는 흙들을 천천히 흩뿌리듯이, 흘러나오는 감정의 응어리가 인상적이었다. 뮤지컬 '서편제'에서 '송화' 역을 맡았다는 기사를 봤을 때 과연 어떤 '송화'를 연기할 것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날 본 공연은 '송화'역에 차지연이 캐스팅된 쪽이었다. 세 명의 캐스팅 배우들의 목소리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세 개의 공연을 한꺼번에 연출하는 기분이라고 했던 연출자의 말이 떠올랐다. 씨네 21의 기자분은 이자람 씨는 딱 천재 국악인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차지연 씨는 소리 때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한 비극성 짙은 인물, 그리고 민은경 씨는 반항적이면서도 강단있는 인물. 사실 이자람 씨가 더 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듣고 오니 이건 우위를 쉬이 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확실한 건, 차지연 씨의 그 깨끗하면서도 곧은 음성이 점점 한이 뚝뚝 떨어지는 한 맺힌 소리로 변해가는 것이 나는 정말 짜릿했다는 것이다. 몽테크리스토 등 서양 쪽 뮤지컬을 하시던 분이지만,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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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차지연 씨가 뮤지컬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축하합니다.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저지대의 아름다움

 

 

 말 그대로,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몇번 읽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외국어 번역이라 어려울 수도 있다.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데 이 '저지대'에서는 그 모든 게 무너진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부딪치고, 뮐러가 예상했든 안 했든 이미지가 태어난다. 다른 이미지가.

 

 

해야할 일

서편제 리뷰

박성원 작가론 쓰기

편혜영 작가론 쓰기

여성과 심리학 레포트

클래식코리아 리뷰 쓰기

드라마 대본 시놉시스 쓰기

 

쓸 것은 너무나도 많은데 내 시간은 적다. 하지만 내일은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를 읽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