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테드 휴즈 '시작법' 5장을 기반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일광욕’,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미적 장소란 과연 무엇인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영감을 주는 곳? 테드 휴즈는 시의 '풍경'을 '야생'으로 한정짓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근대 회화에는 풍경화가 많다. 왜 풍경화가 많았을까? 화가가 캔버스와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가 풍경에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으며 그 감동을 그대로 녹여내고 싶었던 것이다. 르누아르와 모네가 그렸던 호수의 풍경화에는 그들이 캔버스를 두고 풍경과 마주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발생한 감동이 담겨 있다. 그 감동은 다시 우리 눈앞에서 재생해 낼 수 없다. 그들의 눈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감동을 잡아내기 위해 인상파의 스케치와 같은 회화가 나타났다. 소설 또한 자연주의적인 소설이 나온다. 모든 인간관계의 꽃들은 다 시골과 자연 속에서 피어난다. 테드 휴즈는 '확실히 우리 모두가 전원과 은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차마 풍경이 주는 감동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떤가? 각 나라에서는 산업 혁명에 반하기라도 하듯 자연주의적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나 이는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쪽으로만 나타나진 않았다. 나다니엘 호손의 '블라이드 데일 로맨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지닌 젊은이들을 다룬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가 잘 이어져 나가는가 싶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온 농촌에 젊은이들은 당황하고 손을 내젓기에 바빴다. '풍경'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되는 소설이라곤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유토피아와 개척지를 꿈꾸는 모험 소설, 연애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테드 휴즈가 '야생적'이지 않은, 그래서 영감을 억압하는 도시는 어떤가? 이 당시 테드 휴즈가 있던 영국에서는 문명이 상대적으로 낯선 것이었고, 빈민과 노동자들을 생산해 내는 곳이었다. 제대로 쉴 수 없는 곳, 끊임없이 격식과 유행에 얽매이는 곳. 트루먼 카포티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문명 속, 부르주아지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썼으나 그의 소설로 인해 사교계에서 힘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다른 작가들도 도시에 대해 비정하고 매몰찬 이미지를 강조한다. 허나 현대 소설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된다. 일본 문학 속에서의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색다른 소통이 가능한 곳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삼포 가는 길'에서 주인공은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파괴되고, 그 곳에 있는 건 그가 떠나온 도시 뿐이다. 박성원의 '얼룩'과 대칭되는 '캠핑카를 타고 올란바토르까지'를 보면 주인공 남자가 떠난 누나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시골 구석에서 '얼룩'을 피해 도망친 여자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김사과의 '정오의 산책'에서 나오는 화자는 아무도 없는 '티베트'를 꿈꾼다. 이제는 없는 고향이나 모든 이들이 떠나버리고 그림자만 남은 시골, 혹은 수많은 소설에서 클리셰로 등장한 구원의 장소 '티베트'. 그러나 이 자연들은 이제 다 '뜬금없거나' '비현실적' 장소에 가깝다.
오히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이제 고향에 또다른 예시가 덧붙여진다. '도시'다.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지나쳤던 도시 속의 의미를 찾아낸다. 김애란의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도시 속에서 맞부딪치는 인연에 대해서 서술하며, 비슷한 예로 박민규의 '갑을 고시원 체류기'에서는 판옵티콘 속의 판옵티콘에 대해 묘사한다. 근대에는 '자연'에서만 모든 진정한 작용들이 일어난다고 봤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서울의 비정한 면모가 드러났다. 현대 문학 속의 서울은, 이제 그 비정한 이미지에서 조금 더 완화된 모습을 보인다. '회색 숲'은 이제 문학의 또 다른 모태가 되는 것이다.
테드 휴즈가 '풍경'이 시각적인 묘사를 통해 제시된다고 했던 반면, 그가 예시로 든 그의 아내 실비아 플라스의 '워터링 언덕'은 그녀의 개인적 서사와 버무려져 다른 워터링 언덕의 묘사보다 더 처절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소설 속 '풍경'과 가장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소설 속 풍경은 플롯이 없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플롯은 주로 화자가 이끌어간다. 허나 가장 찾기 쉬운 화자인 1인칭 시점에서, 이제 현대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풍경화를 떠올리게 한다. 풍경화 속에는 인물이 간간이 등장하나, 그 인물들은 풍경 속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인물들이다. 허나 이제 오컴의 면도날처럼, 캔버스 안에 담길만한 가치가 없는 플롯들을 현대 소설들은 냉정히 잘라낸다.
산업화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는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티베트', 다른 외국에서 구원의 장소를 찾는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나 다른 여러 기행기를 보면 '여기서 나 자신을 찾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곳에서는 진실된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일까? 이는 일종의 배제에 의한, 반대항에 의한 폭력적인 정체성 확립에 가깝다. 이제 현대 문학 속에서는 풍경이 어떻게 드러날까.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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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구원'은 어떻게 장소로 형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는 '북극점'에 대해 말할 때, 캔버스 바깥의 소실점을 들어 비유했다. 어떻게 보면 풍경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절박함을 가지고, 또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테드 휴즈의 '시작법'에서 예시로 '실비아 플라스', 그와 영원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미완의 인생을 본다면 이는 아이러니컬한 대치를 이룬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테드 휴즈는 직접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작법 전반에 걸쳐 보면 그는 일종의 '구원', 자신을 구제해 줄 진리를 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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