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1일 월요일

우리는 모두 불법이다-정철 '불법사전'

 

 

 

 

 

 

 위에 있는 이미지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불법 사례다. 우리 나라에서는 단체로 모여 다니는 걸 금지하고 촛불은 커녕 스탠드만 들고 나가도 불법으로 인정받는다. 스탠드는 알을 빼가지고 나가야 한다. 무조건 어둠을 밝히는 건 금지다. 헬멧에 가려진 타인의 얼굴을 비추는 불빛도 금지다. 다행히 휴대전화 액정은 금지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 휴대폰 액정을 열고 치켜든 채 거리로 나가는 것을 고려해 보고 있으나 정부에서는 와이파이를 열어 휴대전화에 강제 인터넷 연결로 배터리를 닳게 할 예정이란다. 결국 교통정체는 한시간으로 줄고 이 떼거지들을 진압할 경찰서장에게는 '보이지 않아서 어떤 놈이 반동분자인지 몰랐어요'라는 변명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사진의 촛불들은 화재를 염려한 경찰들이 물대포로 끄고 일부는 방패로 가려서 껐으며 몇몇은 바람의 검심에서 나올 법한 검도술을 사용해 촛불 심지를 자르기도 했다. 무림경찰, 대나무민중. 이게 바로 대한민국. 합법을 위해서 대나무들은 수없이 베어져야 했다.

 

 

 


 우선, 정철의 '불법사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불법으로 다른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책을 읽고 쓰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일까. 왠지 비문으로 보이는 물음이다. 허나 나는 이 문장을 '다르다'로 정의하고 싶다. 아예 없다가 생겨났기 때문에 다르다던가, 소수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게 아니다. 저 문장은 우리가 가장 쉬운 대답으로 회피하는 저돌적인 황소이고, 날카로운 창이다. 책을 읽고 글을 하나 쓰는 순간, 그게 레포트가 되었든 기사가 되었든 블로그 포스팅이 되었든ㅡ글은 그 책의 영향을 받게 된다. 문체나 작가의 사상을 따라간다는 게 아니다. 그 순간의 생각이 잔상처럼 남아 떠돈다. 무의식 속에 남아서, 우리가 만드는 스투디움 속의 풍크툼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스투디움과 풍크툼이라는 개념은, 얌전해 보이고 질서가 바로 잡힌 세상 속인 스투디움을 꿰뚫는 진리ㅡ풍크툼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이 대답이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면 그 말은 여지없는 사실이다. 소설가 김연수가 '인간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던 것에, 나는 두 손을 들고 항복의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겪고, 몇권 안되는 책을 읽으면서 번번히 부딪치고 부딪혀 온 진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들도, 인간관계도,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컨텐츠들도 풍크툼을 꿈꾼다.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에서 날카로운 속을 뽑아내길 바란다. 정철은 '불법 생각은 청춘의 특권이다'라고 말했으나, 사실 이 불법 생각은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청춘'에 한정되어 버리는, 서글픈 면죄부다. 그 표어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는 내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는 Post-청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청춘'이거나. '불법사전'의 저자 정철은 카피라이터다. 카피라이터는 이쑤시개 끝도 날카롭게 다듬는다. 우리가 이쑤시개를 만만히 보고 막무가내로 이 사이를 쑤셨다가는 잇몸이 걸레가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잇몸은 튼튼해서, 그 이쑤시개마저도 짓뭉개버리곤 한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이 '불법사전'을 불법으로 수용할 사람과 그저 넘겨버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불법사전'의 뒷표지를 봤을 때, '사전으로 위장했지만 에세이 코너를 못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 멘트에 역설적인 공감을 느꼈다. 이 책은 에세이다. 우리가 보통 쓰는 사전이라는 의미는 타인들에게 다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몇줄 안되는 단어 뜻을 적어 놓은 책이다. 에세이는 개인이 느낀 사상과 감정, 세계를 담아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전'이나 '에세이'. 둘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은 '에세이사전'이다. '불법사전'이기 때문에. '합법사전'이 '사전' 코너에 있다고 시큰둥해하는 저자에게 좋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정석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전은 이미 가정마다 한 권씩 보유하고 있으면서, 장식장에 꽂아 놓고 냉장고에 얼려 놓은 얼음처럼 잊어버리거나 가끔 필요한 정보나 찾아보기 위해 뒤져 보는 책이라는 것. 사전을 비하하는 말일 수도 있다. 맞다. 나는 비하하면서 '불법사전'을 옹호하고 있다. 허나, '사전'이 아닌 '에세이사전'이라는 것이다. 주관적인 자신의 생각과 세계를 담은 사전. 객관적인 사전에는 경계가 없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정보들을 잘라내고 덧붙여서 집어 넣을 수 있다. 가지고 다니기엔 귀찮다. '에세이사전'은 주관적이고, 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인생만을 담기 때문에 사전에 비해 부피가 작을 수밖에 없다. 2탄이 나올 수도 있다. 아니면 속편이라던가. '에세이사전'은 끝이 있다 해도, 그 끝까지는 많이 남았다. '발상전환'을 하면서도 저자는 '사전' 코너에 끼지 못하는 걸 아쉬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어불성설인가.
 현대 사회의 물신성을 조종하고 있다고 하는 광고는 '카피'로 시작되고 '카피'로 끝난다. '카피'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차를 바꾸고 옷을 갈아 입고 구두를 갈아 신고 사람마저 갈아치운다. '이게 다 ** 때문이다' 라고 쉽게 한 쪽으로 몰고 탓할 수 있다. 차 하나를 타면 여자들이 따라오고 사람들이 너를 최상위의 존재로 본다는 말, 사장님도 아닌 사람이 타도 사장님의 생각을 깨울까봐 조심조심 움직인다는 말도 다 웃기다. 그래서 물신성이 듬뿍듬뿍 넘치는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체중조절을 해준다는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는 기분이 든다. 꿈을 먹으면서 인간은 점점 자신의 구석을 갉아 먹는다. 허나 '카피라이터'들은 다르다. 그들은 멋진 현실을 만들어 내길 바란다. 멋진 현실, 긍정적인 쪽으로. 전에 가장 인상깊었던 광고 카피는 아름다운 가게의 공정무역 초콜렛을 홍보하는 카피였다. 단순하게 '초 콜 렛'이라니. 오규원의 날이미지시처럼 어느 여과 하나 없이 대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닌가. 악마의 키스고 뭐고를 떠나서, 초콜렛은 초콜렛이고, 공정무역은 공정무역이다. 정철은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하지만, 사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특별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전환이 아니라, 우울한 원숭이에게 화려한 무늬의 고깔모자를 씌우고 트럼펫을 들린 순간 광대가 되는 것처럼 보는 시선의 위치와 배경을 바꾼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사소함을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는 사소함이기 때문에, 이 책은 즐겁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고 무조건 이 책에 기대려고 하지만은 마시라. 제발 부탁컨대, 한 책에 의지하고 기대는 순간, 그 사람은 또다시 그 사람이 기댄 책을 찾고, 또 그 책의 저자가 기댄 책을 찾고, 찾고, 찾다보면 진리는 발견할 수 없다. 발상을 전환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은 '에세이 사전'이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정철은 거짓말은 '나는 거짓말을 전혀 안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퇴고를 거친 순간, 모든 책은 진실에서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거짓말들로 벤야민은 북극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맡은 순간 나는 무조건 이 책을 칭찬해야만 하는 것인가? 라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다. 그래서 책만 들여다보고 쓰질 못했다. 리뷰 마감일인 6월 23일은 내 생일 전날이다. 한번 생일을 불태워서 써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큼 이 책이 싫다는 건 아니다. 혹여나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이 책이 나의 인생 멘토'라고 하면서 '멘토'의 의견을 참고하는 게 아니라 기대는 사람이 생길까봐,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염증이 나서 이렇게 쓴다. 좋은 점도 쓰고, 혹여 이렇진 않을까 우려되는 점도 썼다. 그래도 칭찬 많이 했다. 책 예쁘다. '에세이사전'이다. '사전'과 다르다는 걸 확실히 알았으면, 그렇기 때문에 한번 읽어봤으면 한다. 만약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하고 타인의 세계 따위 들어와봤자 쌈무 위를 덮어 놓은 비닐이라고 생각한다면 안 읽어도 된다. 리뷰는 강요하는 것보다, 추천하면서도 추천하지 않는 미묘함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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