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뮤지컬 서편제-계절처럼 되돌아오는, 소리.

 

 

 

 


 뮤지컬 '서편제'를 봤다. 이청준의 소설, 남도 사람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원작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에 대해, 그닥 호감을 보이지는 않는 편이다. 돈은 없으면서 입맛은 더럽게 까다로운 것이다. 이전 국립극장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를 현대극으로 바꾸어 공연했을 때도 나는 아낌없이 악평을 쏟아 부었다. 원작을 읽거나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면, 사실 사람들은 그 내용이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다르게 나타났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호평을 받은 2차 창작물은 사실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악평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왠만하면 2차 창작물을 볼 때에는 기대를 하지 않고 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청준의 '서편제'가 뮤지컬화된다는 소식을 씨네21에서 읽은 후로,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청준의 소설들은 영화, 연극 등 2차 창작물로 번안되는 경우가 많다. 원작이 그대로 영상화되거나 다른 식으로 변용되서 나오는데,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는 이청준의 소설 텍스트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와 소설 텍스트의 가치가 비교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텍스트의 가치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영상의 가치를 드높여 준 작품들이다.
  이청준의 '남도 사람' 시리즈는 임권택 감독 등 수많은 감독들의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만큼 아름답고, 무서울 정도로 단아한 텍스트다. 너무 자세한 텍스트는 독자의 상상력을 막고, 영상화에 있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다. 하지만 이청준은 다르다. 텍스트로만 온전히 이야기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기에, 그는 여백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그 여백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송화의 목소리가 되고, 동우의 이글거리는 햇덩이가 된다.
  변용된 작품들은 또한 제각기 빛을 낸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서편제'가 과연 뮤지컬이 될 수 있을까? 공연을 보러 가는 내내, 내 뇌리 속에서는 저 질문이 번잡하게 떠다녔다. 팔만원 가량 되는 공연을 실제로 보는 건 사실 처음이었다. 이전에 본 조승우 지킬의 지킬 앤 하이드도 사실 친구가 3만원에 좋은 좌석을 양보해 줬기에 볼 수 있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본 동기는 나에게 돈만 들었지 그닥 좋은 공연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과연 내 담배는 남아날 것인가. 오랜만에 본 친구와는 어떤 표정으로 공연장을 나오게 될까?

 

 

 

  길의 계절-길을 가자, 길을 가자.

 

 

 뮤지컬 '서편제'는 정말 뮤지컬이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조화롭게 표현한, 좋은 작품이다. 소도구가 인물을 방해하지 않고, 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 이입하게 하면서도 서양음악과 동양음악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극을 감싸준다. 뮤지컬은 원래 서양에서 나온 음악극이다. 또한 플롯에는 한계가 있다. 오페라처럼 노래로만 치우치지도 못하고, 연극처럼 플롯 위주로 치우치지도 못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둘 다를 외치는 청개구리 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 서양 청개구리로 동양권의 내용을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재 대학로에는 이 나라를 기반으로 한 내용의 창작 뮤지컬들이 많지만, 좋은 연출과 소재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어째서 큰 극장에서는 서양 뮤지컬만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애당초 다루는 게 서양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뮤지컬로 발했을 때 궁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조금씩 반영했다는 소문으로 이제서야 한국식 뮤지컬이 태어나는 건가. 하는 기대가 있었다. 허나 '명성왕후'는 말 그대로 약간의 픽션이 섞인 역사에 불과하다. 이미 정해진 결말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역사를 돌려감기로 보는 것과 같다. 결국 '명성왕후'는 좋은 작품이지만 지루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허나 '서편제'는 다르다. '명성왕후'는 이미 고증된 역사와 결말을 팩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여운 말고는 깊은 공감이나 절절함을 끌어내기가 힘들다. '서편제'의 뮤지컬 인물들은 '깊이'와,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뮤지컬의 인물들은 사실 '깊이'가 있을 수 없다. '깊이'가 있는 인물들은 작품의 주인공이거나, 아주 뛰어난 작품의 인물들이다. 노래 가사로서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만 뮤지컬의 플롯은 노래와 춤이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닥 많은 이야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수많은 연출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허나 사람들은 최우선적으로 '노래'를 들으러, 공연장으로 간다.
 뮤지컬 '서편제'의 인물들은 재미있게도 우리 근처에 있는 인간 군상이면서, 동시에 그 군상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동우와 송화의 아버지인 유봉은 과거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으로 스승에게 설사약을 먹이고 스승 대신 창판에 나갔다. 그 때 스승에게 쫓겨나고, 힘들게 쏘다니며 방황했던 기억 때면에 동우의 반항을 곧이 곧대로 봐 넘기지 못한다. 어떻게든 북을 잡게 해서 소리 쪽에 가까이 두려 한다. 하지만 동우는 '소리'에 쫓겨, 또다른 '소리'로 대피한다. 송화는 부정으로 인해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눈이 멀고 만다. 그리고 소리를 얻게 되었는가? 사실 송화가 얻고자 했던 소리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그 소리는 '유봉'의 집착으로 인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송화의 한이 우리의 무의식에 있던 한을 풀어내 주는 것이다.

 

 

 매력은 인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한지들을 덧붙인 벽 여러 장이 있다. 그 벽들은 움직이면서 배경을 바꾸고, 조명에 따라 한지 특유의 부드러운 색으로 부딪치면서 극 전반에 걸쳐 아련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미군 부대 공연을 위해 자본에 찌든 사업가들이 나올 때 이 벽들은 가만히, 구석에 서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분리라고 본다. '한지'는 매끄럽고 탄력있는 일반 종이에 비해 힘이 없고, 약간 결이 성겨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속에 있는 걸 완전히 가리는 게 아니라 어렴풋이 비춰주면서, 지금 우리는 현대가 아니라 과거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이고, 이 한지의 결처럼 엉겨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한이 어떻게 무대 위에서 표현될 지, 무대 장치를 통해 미리 시사하는 것이다. 공연하기 전 공연장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는 마치 한지가 진짜 바람에 나부끼면서, 소리를 싣고, 기억을 싣고 무대 위로 날아드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 무대 장치가 그냥 '장식'으로만 여겨진다면, 사실 한지고 뭐고 상관없다. 하지만 이 무대 장치는 극의 표현에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가령 어른 동우가 어렸을 때의 동우 자신과 어머니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그렇다. 어른 동우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천천히, 걸어서. 그렇다면 그의 기억에서 가장 트라우마가 되었던 '거대한 햇덩이'를 다시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두 개의 한지 벽으로, 아이 동우와 어머니의 장면은 그림자로-어른 동우는 벽 밖에 휑뎅그레하게 내던져져 닿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 애타게 손을 뻗는 것으로 시간차를 드러내면서도 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또한 송화와 아버지, 그리고 동우가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벽 하나를 두고 빙빙 돌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해 노래하는 것도 좋았다.

 

 

 어쩌면 그 장면은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함께 하는 추억이었기에 더 아름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가는 가족들을 무대 가장자리를 돌게 한다던가, 가로질러 걷게 한다던가 하는 것은 관객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서편제'에서는 빙빙 돈다. 애당초 이 뮤지컬 '서편제'는 일종의 순환, 모든 것이 힘들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원처럼 순환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연출 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심 봉사 이 말을 듣고

 에으이 청이라니 이게 웬 말이냐
 내가 죽어 수궁을 들어왔느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갑갑허여라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어디 어디 어디 내 딸 좀 보자

 두 눈을 끔적끔적끔적거리더마는
 끔적끔적끔적거리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심청가 中-

 

 

  '서편제'가 가리키는 것은 '순환성'이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사람들이 아무리 집착을 하고 청춘의 열기 때문에 헤매여도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원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다시 한번 헤엄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서만, 우리는 잃어버렸던 것을 찾을 수 있다. 송화의 눈은 동우가 떠났을 때부터 멀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동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송화는 눈을 감는다. 송화에게 동우는 눈꺼풀 안쪽에 남은 잔상이다. 아버지는 송화의 눈을 확실히 멀게 한다. 이는 동우에 대한 상실감을 송화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송화의 한은 그 뿌리를 더 확실히 돋궈 안쪽으로 파고든다.

 심봉사가 어디, 어디, 어디, 하면서 천천히 안간힘을 쓰는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안타깝고 서러웠을까. 송화가 눈을 뜨는 건 동우의 귀환이다. 심봉사처럼 '번쩍'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아도 동우가 자신 앞에 돌아와 있다는 걸, 그리고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기에. 송화는 기쁘게 미소 짓는다.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천천히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송화와 동우, 둘 다.

 

 

 

  남도 사람 이야기-한과 승화의 순환

 

 2차 창작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원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보통은 원작을 잘 반영했느냐 아니면 반영하지 못했느냐인데, 이 뮤지컬 '서편제'는 소설 원작과 방향이 다르다. 남도 사람 시리즈 1,2에 해당하는 '서편제'와 '소리의 빛'에서 어느 정도 취해온 감도 있지만, 이청준이 서술하는 '서편제'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만 같고, 나머지는 거의 다 다르다.
 우선 뮤지컬에서는 동우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동우가 송화를 찾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그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내려가는 순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이런 식으로 극을 진행해 나가면 산만함의 극치가 될 것이다. 동우는 송화 주변을 떠도는 행성이고, 송화는 소리의 힘으로 동우를 끌어당긴다. 소설에서는 다르다. 송화의 소리에 대해 동우가 집착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해, 좀 더 깊고 비틀린 심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동우의 '극복'이 주가 된다. 동우는 거대한 햇덩이의 소리는 피할 수 없고, 마치 자신의 부모처럼 안타까운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1차 '극복'을 하며, 자신이 찾던 것이 궁극적으로는 마음 속에 흔적을 남겼던 송화였다는 것을 알면서 2차 '극복'을 한다. 마지막으로 송화와 만나게 되는 순간, 뮤지컬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린다.

 

 

 기억은 희미해져 가는데
 모든건 추억이 되는데
 뭔가 그냥 가만두질 않고 날 붙잡는 건
 뭔가 그저 흘러가질 않고 돌아보는 건
 그건 너의 흔적이야
 내게 남긴 너의 흔적

 

                                        -뮤지컬 서편제, 흔적 中-

 


 소설에서는 송화와 동우가 동침을 한 다음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떠나게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동우는 그 후로도 송화를 계속 찾아다니고, 송화는 피한다. 뮤지컬에서는 다르다.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송화와 동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둘을 이어주는 건 소리라는 것을, 한은 한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부드럽고 완만한 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뮤지컬 속 송화와 동우는 같이 소리를 하고, 송화는 심청가를 하면서 동우라는 것을 재차 깨닫고 송화 자신의 한도 극복해 낸다. 상호 간의 해소이다.
 어쩌면 뮤지컬의 결말에서, 더 이어진다면 소설처럼 둘은 헤어질 수도 있다. 허나 뮤지컬의 결말에서 시간은 멈춘다. 무대의 조명이 꽃이 피어나듯 움직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여운을 남기면서 멈춘다. 순간 관객들도 숨을 멈춘다. 이청준은 영화나 소설 등 각 컨텐츠에서 '서편제'를 다루는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름'은 더 다채롭게 피어나가면서, 각자의 색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원작에 매몰되거나 천천히 스러져 죽어가는 것 없이.

 

 

 

 

 

 ...떴구나.

 

 차지연의 심청가는 나름 강단이 있고 좋았다. 허나 뮤지컬 극의 느낌이 많이 묻어났다. 안타깝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지연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기존 OST에서 들은 차지연의 목소리는 가사만 바꾸면 외국 배우라는 느낌이었다. '서편제'에서 차지연의 목소리는 곧게 솟아올랐다가 종이 비행기처럼 팽글팽글 돌면서 여운을 남기며 내려간다. 이자람의 '심청가'도 물론 좋다. 사실 이 전에 판소리를 완창했다는 점에서 더 안정되고 더 깊은 감정을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JK 김동욱이 유봉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걸 보고, 그 자체로도 신기하기도 했으나 의외로 판소리극에 목소리가 어울린다는 것도 신기했다. 허나 아직 어색했다. 힘을 과도하게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유봉이라는 역할이 약간 고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만큼 목소리의 해석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또 동우 역의 김태훈의 연기에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약간 소년 풍으로, 치기가 어리면서도 앳된 그 분위기가 이 '서편제'와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허나 이 '서편제'의 메시지는 약간 산만한 감이 있다. 결국 동우가 헤맨 것은 '청춘', '방황할 시기'였다는 것이고 순환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인데, 1부에서는 각 에피소드의 비중이 너무 비등비등해서 밋밋했고, 2부에서는 급격하게 플롯이 전개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했다. 1부가 커피라면 2부는 티오피다. 1부는 왠지 긴 도입부를 연상케하고 2부부터는 전환점으로 급격히 치닫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밋밋함을 조금 더 조절해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송화와 동우의 관계는 이 뮤지컬 ;서편제'의 계기가 되고 결말이 된다.
 음악이 총 30여 곡이 되는데 그 중 국악을 제대로 활용한 노래가 10편 남짓 된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음악 전반이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딱 좋았다. 플롯은 단조로워서는 안 되지만, 이 '서편제'의 음악은 단조롭고 그 여백이 있으면서도 여백이 여백으로 느껴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아이들의 코러스 라인이 좋기는 했으나 무대에서 가까이 듣지 않으면 초반에 잘 들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아역의 문제점이 바로 그 점이라는 걸 충분히 알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바로 이 극의 시작을 장식한다. 가사는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엔딩 부분에서 송화와 동우의 조우, 그리고 송화가 심청가를 부르는 장면은 좋았다. 송화는 심청가를 부르면서 '눈을 뜨다'라는 심봉사의 모습을 자신이 눈 앞에 있는 동우가 동우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일시한다. 소설에서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이 엔딩은 그만큼 뮤지컬 '서편제'를 가치있게 한다.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면 사실 표가 얼마나 비싸든 상관없을 것 같다. 그만큼 감동적이다. 허나 조명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노란색과 보라색 원으로 마치 꽃이 피어나듯 위에서 쏘아 내리는 조명은 그 색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색으로 입체성을 띄면서도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좋다. 하지만 노란색과 보라색은 묘하게 독을 품은 꽃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미군 부대 면접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색깔이 아니던가. 차라리 동우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송화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단아한 색으로 바꾸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를 가리고 있던 한지 벽들이 걷히고, 출연자 전원이 처음부터 나와서 인사를 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양식으로 인사를 곧장 하기보다는 한국식으로, 강렬하게 마지막 인상을 남기는 게 물론 좋은 시도기는 하다. 허나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왜 기타노 다케시의 '피와 뼈'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너무 비장해서 조명을 좀 더 밝고 깨끗하게 쓰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차라리 절은 어떨까? 조용히, 두 손을 맞대고 깨끗한 흰색 조명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다.
 뮤지컬 '서편제'는 11월 초에 막을 내린다. 좋은 작품이다. 뮤지컬 '렌트'는 '라 보엠'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라 보엠'에서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을 다루고, '렌트'에서도 비슷하지만 사회 문제인 에이즈와 관련해서 더 활발하게 풀어나간다. '라 보엠'은 오페라 그 자체로 좋다. 만약 렌트가 오페라가 되었더라면 그닥 호평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뮤지컬은 자유로운 변용이 생명이다. '리틀 샵 오브 호러스'와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보라. '서편제'는 원작 텍스트가 있지만, '렌트'처럼 사회상-판소리가 점점 줄어가고 외국 문화가 밀려 들어오는 근대-를 반영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긍하게끔, 노래와 함께 쉬이 풀어나갈 수 있게끔 한다. 서양음악 뿐이던 뮤지컬 속에서, 한국의 뮤지컬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사실 뮤지컬을 꼭 현대를 배경으로 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허나 우리는 강박적으로 현대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룬다. 원작의 탄탄함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플롯의 탄탄함, 사람들은 영상화와 연극이 이제 사람들을 위한 예술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럴 수록 우리는 텍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텍스트야 말로 한국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뮤지컬 '서편제'는 그 텍스트에서 또 다른 한국의 모습, 순환성을 보면서 한국형 뮤지컬의 뜻있는 시도를,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시기는 바로 문화가 바뀌는 시기다. 그 때 수많은 문화들이 학살되고 새로운 문화들이 자라난다. 어떻게 보면 행운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불행이다. 그럴 때의 이야기들이 더 많지 않겠는가. 단순히 현대나 너무 격렬했던 민주화 운동, 혹은 아예 과거를 그려내는 것보단 그 변화의 순간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구식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지나쳤던 보물찾기의 쪽지를 발견할런지 누가 아는가. 그 터닝포인트를 찍어낸 뮤지컬 '서편제'는, 과거 보물찾기에서 번번히 실패하던 나한테 보인, 옹이구멍 속에 꽂힌 보물찾기 당첨 쪽지와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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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전번에 이자람 밴드가 집 근처에 있는 야외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도서관으로 바삐 걸어가다가 언뜻 그 밴드의 공연을 듣게 되었는데, 묘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힘있게 뻗어가면서도 주먹에 쥐고 있는 흙들을 천천히 흩뿌리듯이, 흘러나오는 감정의 응어리가 인상적이었다. 뮤지컬 '서편제'에서 '송화' 역을 맡았다는 기사를 봤을 때 과연 어떤 '송화'를 연기할 것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날 본 공연은 '송화'역에 차지연이 캐스팅된 쪽이었다. 세 명의 캐스팅 배우들의 목소리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세 개의 공연을 한꺼번에 연출하는 기분이라고 했던 연출자의 말이 떠올랐다. 씨네 21의 기자분은 이자람 씨는 딱 천재 국악인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차지연 씨는 소리 때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한 비극성 짙은 인물, 그리고 민은경 씨는 반항적이면서도 강단있는 인물. 사실 이자람 씨가 더 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듣고 오니 이건 우위를 쉬이 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확실한 건, 차지연 씨의 그 깨끗하면서도 곧은 음성이 점점 한이 뚝뚝 떨어지는 한 맺힌 소리로 변해가는 것이 나는 정말 짜릿했다는 것이다. 몽테크리스토 등 서양 쪽 뮤지컬을 하시던 분이지만,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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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차지연 씨가 뮤지컬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축하합니다.
 

댓글 2개:

  1.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저도 차지연씨 공연을 봤는데 무척 좋았지만 그럴수록 이자람씨 공연도 궁금해 지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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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hinsee - 2010/10/27 11:43
    그렇죠? 공연 끝나기 전에 돈을 모아서라도 한번 더 보러가고 싶은 심정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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