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4일 수요일

대체 학교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는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졸업생입니다.
대학교에 와서도 계속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체 학교는 누구의 것인가?
저희 대학교 강단에서 한 교수님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설마 여러분, 학생이 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대체 학교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육청입니까?
교장인가요? 재단인가요? 나라인가요?
히틀러의 나치즘과 별다를 게 없는 노릇입니다. 유용성만 따진다면 세상의 모든 예술은 하나만 그려야 하죠. 나라에 대한 충성, 그 뿐입니다. 하지만 그 충성은 진정한 게 아닙니다. 강요된 이상 어떤 것도 진실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학교 관리자 몇 분이 이 사항을 결정했다는 것이 더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동안 뭘 보셨나요? 썩은 된장국처럼 거무죽죽하게 떠 있는 부레옥잠이요? 아니면 1년마다 갈아치우는 화단이요?

 저희 학교는 화단에서 피는 꽃을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람이라는 꽃을 키우는 게 목표가 아니었나요?
 아예 농업 고등학교로 학교를 바꾸면 더 낫겠군요.
 
 이 사안이 터무니 없다면 만약 실용화되었을 경우 책임은 누가 지실 겁니까?
 애당초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 나왔을 때 모두가 믿었다는 것,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이라 보십니까? 학교에서는 '믿을 거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여지'라는 게 있습니다. 졸업생들은 바보가 아니고, 순순히 넘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오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중장기 발전 계획 보고서를 어떻게 내셨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신다면 교육청에 물어보고, 대답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떻게든 답변을 얻어내고 말겠습니다.
 
 취업, 진학, 사실 이 두 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왜 이 학교에 교장으로 오고 교감으로 오셨나요?
 수상 실적을 의기양양하게 뽐낼 수 있어서?
 학교 겉이 예쁘니 화단도 마음껏 꾸밀 수 있어서?
 
 학교에서 '먹이고 재워주는' 건 학생이지만, 학생들도 자원적으로 자퇴를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 건 학생입니다.
 그 학생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는 게 학교입니다.
 사업체를 꾸리실 생각이시면 선생님을 그만 두시고 지금이라도 취업 전선에 뛰어드시면 됩니다.
 황금광시대처럼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반복 패턴만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선 저 같은 불량품은 나오지 않습니다. 완성품 가득한 사회로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이메일을 받은 출처는 혹시나 피해가 갈까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메일로 받았어요. 퍼뜨려야 할거같다고 생각하고있기에 여기에 올립니다.

 

 

 

(이메일 내용)

 

얘들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하니 길이 조금 길더라도 모두 잘 읽어주길바래.

얘들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하니 길이 조금 길더라도 모두 잘 읽어주길바래.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학교에 근무하고있던 산학겸임교사들(김정운,박정준,손기영,박성민)을 학교가 해고하려고 하고 있단다.

이유인 즉은 소위 비정규직법안 때문이야. 다음해(2011년)에 우리들을 재임용할경우 산학겸임교사는 무기한계약제로 전환이 되는데 학교와 경기도교육청의 과학직업교육과가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인거야.

다시 말하면 아무런 잘못도 하자도 없이 그냥 해고를 통보하고 있다는거야. 일부사람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우리산학겸임교사들은 정든학교와 학생들을 떠나게 된단다. 그래서 산학겸임교사들은 내년3월부터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려고 그동안 여러가지 준비를 해왔어. 그런데 이시점에서 학교는 학교발전중장기계획(안)이란 것을 암암리에 작성했고 이문서는 이미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상태란다.

 

이 학교발전 중장기계획(안)의 가장 충격적인 안은 영상연출과의 폐지란다. 그간 학교에 수많은 수상실적을 가져온 영상연출과를 학과유지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폐지한다는구나.

그리고 이 안건에는 만화. 애니메이션과에 대한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지.

만화와 애니메이션과를 통합하고 애니과를 컴퓨터그래픽과 3D애니에 중점을 둔 학과로 개편하겠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우리학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과는 컴퓨터게임과라고 말하면서 컴퓨터게임과만이 현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내용이란다.

애니과를 컴퓨터그래픽과 3D애니과로 만든다.... 이것은 애니과를 컴퓨터게임제작에 필요한 그래픽들을 제작하는 과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너희모두 알겠지만 그간 우리 만화창작,애니메이션과, 영상연출과는 해마다 다수의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국내 및 해외 대회에서 수많은 수상실적을 올려왔었단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왔다. 이것은 교장,교감선생님이나 일부 미술부장교사들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과 전공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만들어낸 실적이란다. 그리고 그러한 실적들이 우리 애니고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건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개교10년이라는 짧은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애니.영상,게임 학교로서의 위상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 학교가 몇몇사람들의 손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는거야. 이것은 비단 재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졸업생들아....생각만해도 아련한 이 애니고가 앞으로는 취업을 위한 학교로 바뀌게되고 우리같은 전공교사들을 1년에 한번씩 갈아치운다니..과연 이러고도 애니고가 지금과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한 이 학교발전중장기 계획에는 다른의도도 숨어있는거 같다. 현재 우리가 진행할려는 소송은 여러 변호사의 의견을 종합해본 결과 승소할 확률이 크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승소를 해도 학과가 개편되면 다시 복직할 수가 없다는거야. 학교는 이것을 알고 미리 손을 쓰고 있다고 판단된다.

 

맨처음의 시작은 산학겸임교사들의 부당해고에 대한 억울함을 알리는 거였지만 이제 이문제는 산학겸임교사의 해고를 벗어나 학교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안으로까지 나아가게 된거란다.

 

누가 이학교의 주인인 것이니? 교장.교감,전공부장?? 그들은 이학교의 주인이 아니야. 이학교의 주인은 교육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학생과 학부모인거야. 그런데 관리자와 전공부장은 쉬쉬하며 학생과 학부모를 고려하지 않은 문건을 작성해서 상부에 보고하고도 여지껏 이것을 동료교사 선생님들에게 공개하고 있지 않은 상태란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학교가 누구의 학교인지를 보여줘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이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밖에도 여러가지 사안을 독단적인 결정을 하고 진행해왔단다. 그리고는 학교구성원에게 이를 통보하는 식의 자세를 유지해왔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게 넘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단다. 그들은 이 문건이 단순히 보고를 위한 문건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문서화시켜 상부에까지 보고했는데 어떻게 이것이 단순한 보고용이라는 것이겠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그 교육과정이 완전히 틀리다는 것은 너희들도 잘 알거야. 대학에 진학하게되면 더더욱 절실히 느끼겠지. 애니과 자체도 더 세부적으로 전공을 가르고 있는 이 판국에 만화와 애니를 통합한다는건 발전이 아니라 퇴보라는건 상식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문제란다.

그리고 영상연출과를 폐지한다는 것은 영상연출과의 모든 학생,학부모,교사 그리고 졸업생들 모두를 기만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구나.

 

애니과의 경우 컴퓨터그래픽과 3D 애니라는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애니고에서는 일년에 단 2,3편의 작품도 제대로 내지 못할꺼야. 3D는 간단히 배워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파트가 아니니깐...아마도 학교관리자나 일부 미술교사에게 점수와 상금을 안겨줄 기능경기대회에 써먹기엔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만화과도 애니과도 작품의 수준은 떨어지고 편수는 줄어들게 되는 현상은 불보듯 뻔할꺼야.

 

얘들아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나는 더이상 두고볼수가 없구나. 재학생 졸업생 너희모두가 이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교를 지켜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애니고는 너희들의 것이란걸 잊지마.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초능력자-결국 문제는, 타자와의 소통


 

 

 

 

'아저씨'를 봤다. 원빈만 봤다. 아름다웠다. 원빈이 너무 예뻐서 '아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없고 원빈만 있었다. 동기는 그렇게 말했다.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배우에게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클로즈업으로 인해 영화의 서사를 다 잡아먹어 버리기도 한다. 원빈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과거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잘생긴 얼굴 둘이 있었지만, 검댕과 서사의 강렬함으로 인해 외모는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가요계는 이미 아이돌 천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노래보다는 외모와 퍼포먼스 중심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하다는 말은 사실 유명 배우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메이저가 아닌 언더의 영화들이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유는 포스터에서 잘생기거나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전에는 음악 영화 '어쿠스틱'이 개봉했었는데, 임슬옹과 씨앤블루 등 인기 있는 아이돌들이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물론 그 중에도 신세경이라는 배우가 있었지마는, 사실 극 전반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건 사실이었다. 꼭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반으로 동영상을 짜놓은 느낌이었다.
 이번 '초능력자'에서도 사실 그 불안한 기우를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시놉시스는 '아저씨'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아저씨'는 먼치킨 캐릭터인 아저씨가 등장하는 반면 이번에는 먼치킨으로 보이는 두 캐릭터가 등장해서 팽팽하게 내러티브의 끈을 잡아당기지 않을까. 그렇다면 강동원이나 고수의 외모보다도 그 서사성에 더 주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뿌린 씨앗을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가 바로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내린 결론이다. 꽃을 피우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다음 열매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정수리 위에서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다가, 떨어지면서 딱 하는 소리로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그 열매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격주 빌런 시네마

 '소설의 이론'을 쓴 루카치는 현대 내러티브 예술-영화, 소설, 연극을 다 포함해서-의 주인공은 일종의 마성적 존재라고 말했다.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현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하거나 이탈을 꿈꾸는 존재라는 것이다. 허나 완벽한 이탈은 없다. 인물은 사회적 관습에 한 쪽 발꿈치를 담그고 있다거나 자신의 본적지를 두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이탈자가 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아킬레우스처럼. 그들은 완벽한 세상,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 유토피아는 이뤄질 수 없다. 그들 자신조차도 무의식 중에 그걸 깨닫고 있다. 여기서 빌런과 영웅의 존재가 갈라진다. 빌런은 그들의 유토피아가 이뤄지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방해하려는 세력이나 뛰어넘으려는 이들을 짓밟고 지워낸다. 하지만 영웅은 다르다. 슈퍼맨 같은 영웅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유토피아를 사회와 융합하려 한다. 사회와의 소통을 포기한 자와 포기하지 못한 자. 빌런과 영웅은 이렇게 나뉜다. 종이 한장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웅보다 악당, 빌런에 더 감정이입을 할 때가 많다. 그들이 그렇게 빌런이 된 것은 단순히 '우월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에 잠재되어 있던 본능, 우리 안에도 있는 본능 때문인 것이다. 영웅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우상이 된다.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웅은 '영웅'이 된다.

 


 초인(강동원)은 보다시피 빌런이고, 그는 그의 장난감들처럼 완벽한 그의 세상을 꿈꾼다. 그의 인형은 웃고 있다. 인사하듯 한쪽 손을 경쾌하게 들어올리고 있다. 흡사 친구를 만난 듯한 표정이다. 야트막한 건물들과 개미같은 차들. 허나 그 배경에 그 말고 다른 인간은 없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그를 알아채는 순간 배척하고 경시할 존재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나레이션으로 '내 어머니마저 나를 죽이려 들었다'며 그의 절망감을 표현할 때, 사람들은 강동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만약 그가 초능력을 잃었다면 그는 그저 한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살았을 것이다. 그의 초능력은 배트맨의 조커처럼 한없이 매력적이고, 위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그에게 조종을 당한다. 그는 타인과 애당초 소통하지 못하는 자다. 소통을 배우지 못한 아기와 같은 존재다. 그로 인해 그는 더 고독해지고, 점점 더 바깥으로 어긋난다. 허나 그의 아킬레스 건, 어머니-다리 때문에 그는 사회적 관습 속으로 도로 끌려와 '학살'당한다. 사실 보면서 규남(고수)이 영웅이라기 보다는 조금 납득할 수 없는 존재, 초인과 비슷하거나 묘하게 거슬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규남도 사실 '초능력자' 중 하나다. 엄청난 회복력과 초인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또한 초인처럼 밑바닥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초인과 다른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속하고 그 소통의 끈을 계속 놓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둘을 같은 위치에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규남을 초인처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존재로 만들고, 밑바닥 인생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사실 초인보다 규남에 더 집중해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나, 우리는 배트맨에게 감정 이입하고 조커를 두려워했다. 미국 영화에서는 이렇게 영웅을 우위로 치켜 올린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다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히어로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히어로는 결점이 있어도 그걸 극복해 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국기 옆에서 웃어야 한다. 한국 영화에서는 그 결점을 다 드러내고, 그 결점은 영화 전반에서 계속 주인공의 주변을 떠돌며 그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그는 스스로 아이러니에 빠질 것이라는 걸 몇번이고 되새겨 준다. 현실은 시궁창, 그 뿐이다.
 규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는 지하철에서 초인이 죽이려던 아기를 몸을 던져 구하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게다가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사람들은 본척도 않는다. 어쩌면 초인의 초능력으로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도록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실 현실이 그와 비슷하다. 몇몇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할런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 한번 그보다는 못하지만 충격은 비슷한 광경을 봤다. 한 할머니가 전철 의자 한쪽에 쓰러져 있었는데도, 다들 못본 척 했다. 물론 잘못 처치했다가는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 아니면 그냥 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확실하다. 이제 물어볼 수 있을만한 여유는 사라졌다는 것. 초인은 규남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준다. 잠시나마 그 광경은 그들이 대등한 위치, 즉 사회적 관습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 타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규남만이 초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를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규남은 그를 뒤늦게서야 이해하는 것 같다. '같다'라는 표현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초인은 '빌런 시네마'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그 때 우리는 초인의 인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초인에게 감정 이입을 한다. 하지만 규남에게는 좀처럼 감정이입하지 못한다. 규남에게는 오로지 선만 있을 뿐, 인간다움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크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맨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영웅을 아직도 기다리며


 '초능력자'의 주인공은 둘이고, 이는 빌런과 영웅의 대결 구도로 정립된다. 규남은 영웅이다. 허나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영웅이다. 나중에 그를 조금이나마 인정해 주는 사람은 그가 섬기던 사장 딸 뿐이다. 완전히 그를 인정해 주던 사람은 오히려 초인이었다. 초인은 규남에게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진 사람이다. 왜 너를 제대로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목을 매지? 왜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려 하지? 그리고 초인은 그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를 생각해 주지도 않고 너를 걱정하지도 않는데. 하지만 규남은 완전한 선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난 규남을 보면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층계 위에서 떨어질 때 규남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장면, 사실 그 때서야 인간다움이 조금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인간다움도 왠지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슈퍼맨이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어떤 시대에서 어떤 창작물이 나오는가는 그 시대에서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뮤지컬 '영웅'도 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 사회, 부조리하고 온갖 거짓말로 넘쳐나는 사회에서 모든 걸 구제해 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영웅은 크립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웅은 이 사회에서 태어난 존재여야 하고, 인간다운 감정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일종의 타자적 존재고, 영웅이 필요한 건 바로 타자적 존재들이다. 타자들은 '이해'를 원한다.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려는 영웅.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규남이 초인을 껴안고 떨어질 때, 그리고 초인을 보면서 어쩌면 그와 자신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뒤늦은 후회를 할 때,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영화는 지속된다. 그 뒤부터 나는 왜 일어나고 싶었는가. 초인의 죽음과 규남의 생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규남은 이제 자신의 '초능력'을 인정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초인만이 그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규남이 전신 마비가 된다는 건 쓸데없는 리얼리티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리얼리티를 포기해야 옳았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아이를 구한다는 것도 뜬금없다. 차라리 리얼리티를 도입할 것이라면 정말 리얼리티로 가는 게 나았다. 규남은 전신마비로 일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환상에서만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간극에 가슴 아파해야 했다. 아니면 아예 전신 마비 씬을 없애던가. 씨앗을 뿌렸으나 제대로 거두지는 못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사회적 경계를 이탈한 존재들의 싸움, 그리고 빅뱅.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이 영화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고수가 얼마나 순박하고 잘생겼는지를 보여주는 팬비디오가 아니지 않은가. 강동원 클로즈업이 나올 때도 나는 이 영화가 팬비디오가 아니고, '아저씨'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허나 뒤로 가면서 어찌나 고수의 팬비디오스럽던지.
 이 영화는 극 중후반까지 긴장을 유지한다. 긴장-긴장으로 이루어지는 액션 서사 때문에 조금 정신없기는 했지만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에필로그처럼 클라이맥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불필요했다. 영화에서 이뤄놓은 것을 후반부에서 다 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저씨'처럼 영화를 배우의 외모가 다 잡아먹는 게 아니라 내러티브에서 불필요한 욕심이 영화를 잡아먹었다. 어쩌면 감독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초인은 단순히 악당일 뿐이고, 규남은 아주 올바른 청년이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아마추어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만약 이 영화에서 꼭 에필로그를 넣고 싶었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아예 초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한 존재, 그렇다면 우리는 초인에게 제대로 감정 이입을 할 수 없고, 그를 악당으로 치부하게 된다. 초인이 만약 어머니를 죽였다면, 그리고 그를 얽매이는 모든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났다면 우리는 그를 악당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허나 쓸데없는 감상성, 인간다움 때문에 초인은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규남이 우리에게는 더 괴물로 다가온다. 하지만 감독은 규남에게도 일종의 리미터, 제한기를 걸어 놓는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장과 사장 딸, 그의 친구들. 제한기가 하나 하나 풀어질 때마다 규남은 괴물에 가까워진다. 초인처럼 규남에게도 마지막 제한선이 있다. 사장의 딸이다.

 허나 참 답답한 것이, 초인에게는 온갖 대사가 있다. 그는 규남에게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거듭 말한다. 규남은 그를 위협하는 존재다. 초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규남에게는 초인이 애초부터 적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초인을 먼저 이해하게 된다. 초인은 그의 장난감 세계와 그의 과거를 보여주고, 그의 인간다움을 보여준다. 허나 규남이 하는 대사라곤 그저 '넌 누구냐'밖에 없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초인의 이름을 묻는다. 초인은 그 때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규남은 그 때 몸을 날려 초인을 덮친다. 둘이 함께 차 지붕 위로 떨어지고, 죽음의 가능성을 공유하는 순간에서야 둘은 소통하게 된다. 둘 다 타자적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소통. 그제서야, 그것을.

 

 


 '초능력자'는 결국 씁쓸한 비극으로 남는다. 에필로그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초능력자'는 비극이 되어야만 했다. 비극은 모든 게 다 죽어야만 비극이 되지 않는다. '소통의 불가능성'이 바로 비극의 끝이다.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의 소통 시도를 거부하고 그의 고집대로 행하려 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와 소통하려 하지만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소통은 실패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찌른다. 하지만 그가 없어도 그의 나라는 돌아가고, 크레온이 대신 통치한다. '초능력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죽어도 사회는 여전히 시계처럼 돌아가고, 그 사회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미학적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하고 타자적 존재를 배척하는 사회다.
 

 

 


 우리 주변의 '초'능력자


 결국 '초능력자'는 타자에 관한 영화다. 우리 사회에는 울타리가 있다. 그 울타리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웃기고 자빠졌다. 사실 그 울타리는 세금도 내고 얼굴과 머리색이 한국인 표준에 맞아야 하며 소득이 일정하게 있어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있다. 그 울타리는 사실 환상이다. 전쟁이 나면 평범한 사람들은 다 죽는다. 타자들도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타자'를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해 노벨문학상을 탄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사회적 관습에서 밀려난 타자에 대한 이야기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도 제이디 스미스도 어느 경계에도 속하지 못한 타자에 대해 쓴다. 문학은 이제 '타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워낭소리가 인디 영화계에서 '히트'를 쳤을 때, 기존 영화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가? 워낭소리는 이제 타자로 밀려난 인간과 동물의 교감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다.
 초인과 규남은 둘 다 '타자'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초인이 그의 어머니에게조차 거부당했을 때, 그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꿈꾸었다. 규남은 그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려고 애썼다. 초인은 규남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이 너를 만난 건 다 실수였어. 너는 아예 혼자여야만 했어. 이 말은 묘하게도 초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초인은 규남을 통해 자신을 보고, 규남은 초인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이 묘한 거울적 관계, 그리고 규남은 초인을 죽인다. 사실 규남과 초인은 함께 죽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거울이 깨지면 거울을 보고 있던 그 자신의 정체성은 홀로 떠도는 방랑자가 되거나 함께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남은 살아남는다.
 초인이 시선을 맞춤으로써 초능력을 쓴다는 것도 흥미롭다. 어느 누구도 초인과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눈을 '맞추고' 대화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소통을 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이다. 허나 사람들은 초인과 소통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미친 사람을 보면 절대로 '시선을 피하거나'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로 인해 타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에서는 미친 메리라는 사람이 나온다. 미친 메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다. '타자'다. 하지만 사마드는 타자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 순간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미친 메리는 이제 미친 메리가 아니라 그냥 메리라는 사람일 뿐이다.
 초인과 규남은 소통에 실패하거나 너무 그 시도가 늦었던 이들이었다. 영화에서는 일종의 알레고리적 성격을 띄면서 이들의 관계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결국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타자 뿐, 그리고 그 소통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초인처럼 다리 한쪽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관습에 의문을 품는 것, 어째서 이래야 하는지 끝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매트릭스적 뿌리를 보게 되고, 그 뿌리가 달랑거리는 순간 뒤돌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통하는 순간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나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에게 새롭고도 동시에 오래된 이 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사마드는 15년이 족히 넘는 기간 동안 아무도 미친 메리에게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메리를 만진 것이다. 아주 살짝, 어깨를.
 "우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나의 경우, 마음의 반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그냥 지나가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성전에서 싸우고 싶어 합니다. 지하드! 그리고 분명 우리는 밖으로 나와 이것을 거리에서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종국에는 당신의 과거가 나의 과거가 아니고 당신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니고 당신의 해결책이 나의 해결책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진실과 견고함이 하나의 제안이 될 겁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나의 희망은 최후의 날에 있습니다. 선지자 무함마드, 그 분께 평화를. 그분께서는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이 의식을 잃는다고 하셨습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상태, 세상의 모든 잡담이 사라진 상태. 이런 빌어먹을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 그럼 저희는 이만."

                                                    -제이디 스미스, '하얀 이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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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능력자'를 본 다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아저씨'보다 훨씬 낫다고 추천했다. 허나 에필로그를 보지는 말라고 말했다. 트랜스포머처럼 짜투리 영상을 끼워넣기에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 그 많은 생각을 대충 서랍장에 집어 넣느니 흩어진 그대로, 벤야민의 폐허를 쳐다보는 게 더 나았다. 사람들을 더 생각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수 있었다. 강동원과 고수의 연기는 좋았다. 강동원의 외모보다 연기에 더 집중한 건 사실 처음이다. M에서도 강동원의 외모만 눈에 더 들어왔다.
 사실 나는 내러티브가 없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이라도 내러티브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내러티브가 아예 없는 영화로는 '디 워'를 들 수 있다. 그 영화는 정말 명작이다. 명작이라는 것은 그 영화같은 영화가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어법을 내포한다. 오마주도 사양한다.
 하지만 '초능력자'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함께, 조금이나마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 '초능력자'의 장점 중 또 하나는 '장면'이다. '장면'의 설정이 너무 좋았다. 단순히 외모를 부각시키지 않고 그 장면의 내러티브를 녹여낸, 컷마다의 분위기가 좋았다. 규남이 사무실 위쪽의 대들보 천장에서 숨기 위해 오가는 것도 좋았다. 초인과 싸우기 위해서는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위는 그저 허상일 뿐이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허상. 초인은 허상을 꿰뚫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허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번번히 '아저씨'와 비교해서 다른 '아저씨' 팬들이 유감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배우의 비주얼이 탁월하고 나름 내러티브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영화 두 편이었기 때문에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에는 문제 의식 자체가 없다. 팬비디오 그 자체다. 그래서인지 왜 영화제에서 상을 탄건지, 아직도 조금 의문이 남아 있다. 강동원과 고수보다는 원빈을 더 좋아하는데. 왜 영화에서는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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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말이 도중에 더 생겨서 마구 쓰다 보니 어느새 훌쩍 12시를 넘겼다. 늦은 건 처음이라 시무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