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6일 목요일

'땅의 여자'-'도시의 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본격 농촌 다큐멘터리 영화, '땅의 여자'를 보았다. 1년 반 동안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찍은 다큐멘터리인 만큼, 보고 있노라면 점점 영상이 친밀해지는 것을 느낀다. 다큐멘터리란 어떻게 보면 '타자'를 이해하는 한 수단이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인물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땅의 여자'는 '대추나무 사랑 열렸네'도 아니고 '관촌수필'도 아니다. 단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거쳐 이 모든 걸 다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해시키지 못할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계몽'을 꿈꿔서는 안된다. '계몽'을 꿈꾸는 순간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극영화가 되어버린다. 친구는 이 영화가 '농촌으로 오라'는 구호의 영화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줄 알았다. 허나 아니었다. 이 영화는 정도를 잘 지켰다. 더 나아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얕지도 않은 적정의 선을 지킨 내용이었다.

 

 

 

 마술환등에서 튀어나온 여자들

 

 현 20대의 사람들 중 어느 정도는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 '도시의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노인들이 있고 가끔 농활로 가서 고생을 하는 농촌, 사실 이 농촌은 그들에게 귀향해야 할 선험적 고향이 아니라 그냥 '타자'다. 농활을 가도 '잠깐 갔다 오는 게 재미'라고 생각할 뿐,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해한다는 게 단순히 그 곳에 가서 살아야 한다거나 그들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화두는 바로 '농수산물 적정 가격대'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벤야민은 도시를 거대한 마술환등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계몽적인 도시인이 되었다고 하나 사실 물신주의에 빠진 맹신자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이나 부처가 아닌, 물질을 신으로 믿는다. 허나 폴란드 망명국가의 지폐들을 보라. 국가가 사라지는 순간, 그 지폐들은 사라진다. 마술환등의 배터리는 언젠가 꺼지게 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마술환등에 빠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을 마술환등에 빠졌다고 봐야 한다. 물건을 사고 파는 주체라고 여기지만 사실 인간은 취업활동에 스스로를 내보내면서 인간의 존엄성까지 폐지한다. 결국 상품으로 자신을 내보낸다. 허나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촛불집회도 마찬가지다. 집회에 가면 검찰에 잡혀서 직업활동에 영향을 받고 감찰을 받으니 절대로 하면 안된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인다. 좌파 우파를 가르자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 나라 우파는 우파가 아니다. 그냥 불법 점거한 망나니들인 것이다. 진짜 우파라면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지켜야 한다. 품위도 없다. 일명 '모닝구 무스메'를 보라.


 

 

 

 

 이 영화, 영상이라고 부르겠다. 영상에서는 '민주노동당'에 든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운동을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간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농촌에 와서 살아라, 시집와라가 아니라 이들의 존재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시민이 아니다. 농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도시에 가서 집회할 권리가 있다. 허나 톨게이트에서 경찰들이 막는다. 꼭 이주민들을 막는 몸짓과 유사하다. 다른 사람들은 가도 좋지만 당신들은 타자이기 때문에, 불온한 타자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식이다.
 이들은 청와대에 테러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순신 동상의 검을 빼앗으러 가는 게 아니다. 청계천 콘트리트를 깨러 가는 게 아니다. 그냥 시위하러 가는 거다. 시위할 때 전경을 때리려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를 뒤엎으려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를 뒤엎는 건 이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다. 그래서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미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들을 막는다. 마술환등은 이 권위의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을 도로를 점거한 불온세력으로 보지만 이는 단순히 위장에 불과하다. 검찰의 정당화인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어느 당에 소속되어 있는지 찍는 건 삼가했어야 한다. 극으로 꾸미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민노당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저들이 좌파이기 때문에 저럴지도 모른다는 편견에 빠져 버린다.
 물론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편견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땅의 여자'들은 마술환등에서 튀어나와 있다. 그들이 만약 농촌 공동체로서 여러분 농촌으로 오세요! 라고 했다면 그들도 나름대로의 마술환등에 빠져 있는 것이다. 허나 이들은 굳이 오라고 하지 않는다. 농사에 소질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해도 좋고, 오든 말든 자유라고 한다. 그냥 이 영화를 보고, 자신들도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한다. 우리는 무조건 한 대상을 파악해서 우리의 틀로 끌어 들어와 호불호, 혹은 우위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건 폭력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이해는 평생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이해'를 해야 한다. 그 노력을.
 또한 여기서 나오는 '땅의 여자'들은 '도시의 여자'들과 그 세부사항이 다를 뿐, 유형이 비슷하지 않은가. 희주는 맞벌이를 하면서 남편과 갈등을 빚는 아내를, 은주는 시어머니와의 알력 다툼을 벌이는 며느리를, 그리고 선희는 아픈 남편을 두고 정치로 나서면서 그 아픔을 겪는, 어떻게 보면 똑같다. '도시의 여자'들도 알듯이, 여기에는 해답이 없다. '꿈'이 이뤄지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꿈'을 계속 가지고 행하는 것, 그게 '땅의 여자'들이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말이다. '마술환등'에서 빠져나오려면 그 '마술환등'에서 빠져나오려는 꿈을 꿔야 한다.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그게 '땅의 여자'가 영상이 된 이유다.

 

 

 

소풍

 

 '땅의 여자'는 그냥 즐겁게 볼만한 영상은 아니다. 모두들 집중해서 봐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짜증을 낸다. 재미가 없으면 왜 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영화를 보면 좋다. 인셉션도 보면 안된다. 왜냐고? 그 영화는 생각하라고 만든 영화지 멜이 쩐다 이러면서 볼 영화는 아니다. 그러면 스틸컷으로 보면 된다. 영화의 권위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벤야민은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차 도착 같은 단순한 영상이었고, 사람들이 이에 놀라 도망치는 충격 효과가 있었지만. 우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영화는 아주 예리하게 잡아 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거대한 림보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대중들이 보고. 과거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만 예술을 감상할 수 있었다. 허나 영화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영화는 소통하려는 움직임이지 나 졸라 짱셈을 표현하려는 나르시즘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가 소풍을 갈 때 우리는 정신없이 막 즐기지는 않는다. 정신없이 막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깽판을 치다보면 남는 건 경찰서의 호출과 뻐근한 허리밖에 없다. 우리가 소풍을 가는 이유는 휴식을 위해서다. 이 바쁜 세상에서 휴식을 위해, 잊어버리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휴식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순간이다. '땅의 여자'는 소풍을 가듯 보러 가는 게 좋다. 이 영화는 그냥 농촌으로 오라는 권유 영화도 아니고 농촌이 최고라는 영화도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영화는 '농촌'이 단순히 타자로 편입되려는 순간을 부정하고, 전혀 다를 것 없이 여기서도 인간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소풍에서 우리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롤러코스터에 태워 고통스럽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롤러코스터 못 타면 안 타면 된다.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그저 '농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집터로 생각해선 안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의 선택여부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도시>>>>>>농촌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기 때문에, 그 생각, 편견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에서 앤은 소풍을 가고 싶어서 머릴러에게 브로치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한다. 허나 앤은 가지 못한다. 우리는 소풍을 가고 싶다. 허나 소풍을 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생각을 하고 싶을 뿐이다. 허나 편견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소풍을 가고 싶으면 편견의 방식대로 생각한다고 말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결국 소풍을 가지 못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사실 가장 빛났던 순간은 바로 선희의 '꿈'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선희는 그녀를 지지해주던 남편이 죽고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 영상이 영화가 아니라는 것, 온전한 극영화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위로받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포기한다. 집 때문에,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허나 선희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려 한다. 왜 꼭 우리는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가?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온 건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지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시와 수많은 현실들은 우리를 그저 폭풍 속에 휘말리게 해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나아가게 하려 한다. 그러나 이 앞에 무엇이 있는가? 폭풍? 낭떠러지?
 '마지막 휴양지'라는 그림책에서는 고갈된 많은 사람들이 한 휴양지로 와서 휴식을 취하고 새롭게 나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꿈 속, 환상거리가 아니다. '마지막 휴양지'에서 우리는 '휴식'이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재충전이고, 틀린 무언가를 비워내고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선희'는 떠밀리지 않는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로 나아간다. 언젠가는 폭풍도 지쳐 스러질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렇게 소풍을 가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이 말했듯, 후에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게끔. 모든 게 마무리되는 그 순간 웃으면서 갈 수 있기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전문-

 

 


 인간극장만이 오렌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마냥 좋다는 건 아니다. '타자'의 이해로서 한번 보는 게 좋기는 하지만 사실 조금 편집 라인이 지루했다. 서사는 충분히 좋았고 감명깊었으나 영화를 의식한 듯한 교차편집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나레이션이나 자막이 한번 나온다면 조금 진득하게 나오던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 영상을 보고 친구는 '인간극장'을 말했다. 인간극장과 별다를 게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전반부를 조금 줄이고 그 집회에 갈 때 어떻게 막히게 되는지를 늘이는 게 낫다. 정치적 색이 너무 짙은 게 아니냐고? 이 영화는 '타자'의 이해지 좌파 우파 중 뭐가 옳은지 물어보려는 게 아니다.
 정치적으로 치우칠까봐 '인간극장'같은 전반부를 늘였을까? 허나 대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풍을 온 것처럼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이 영상에서 이 장면은 커다란 전환점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선희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절정에 해당하고.
 재닛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에서는 독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한 소녀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향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서사가 나온다. 이 '땅의 여자'도 현재 분류되고 있는 '타자'가 사실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확실히 드러내야 한다. 이 상황은 솔직히 말해서 좀 약했다.
 인간극장과 같은 서정성도 좋다. 허나 인간극장은 너무 꾸몄다는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서정성에 치우치다 보니 약간의 위장도 생겨나는 것이다. '땅의 여자'는 그래선 안된다. 꾸미는 것도 좋겠지만 부부 인터뷰를 할 때 서로 다정하게 밀치고 아웅다웅하고 결국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이, 그 진실이 이 영상을 빛나게 한다. 버스가 막혔을 때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이 영상을 빛나게 한다.
 인간극장만이 해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 다큐멘터리처럼 해학적으로만 나가라는 것도 아니다. '땅의 여자'만의 색깔이 필요하다. 그 색깔을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허탈해진다.
 내 경우에는 농촌과 도시가 반반 섞인 곳에서 살기 때문에 평일에는 도시에 나가서 살다시피하고, 주말에는 밭을 매고 씨앗을 뿌린다. 무도 뽑고 열매도 딴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의 편견은 반반으로 갈린다. 그 편견들을 볼 때마다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느낀다. 이 '땅의 여자'는 풍크툼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틀에 갇혀서, 뻔한 도식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예리하게 그 약점을 찔러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리게 하는 풍크툼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진실, 바로 '농촌'이 '진보하지 못한 곳'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일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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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이 '땅의 여자'들이 직접 수확했다는 '밤'을 받고 즐거워했다. 나는 못 받아서 슬퍼했다. 밤 맛있었을텐데. 여튼 잘 되면 다음에 쌀 보내주시겠단다. 사실 이렇게 '나누면 욕 못한다'라고 농담조로 말하지만, 어쩌면 이 영상이 극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몸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우리 이야기야. 우린 진실을 말했어. 우리 마음은 이런데, 너희는 어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밤을 못 받았고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땅의 여자'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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