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8일 화요일

진짜 유럽을 맛볼 사람들을 위해-김보연의 '유럽 맛보기'

 

 


 '유럽 맛보기'라는 책은, 다른 책들처럼 그 나라의 명소만을 소개하는 게 아니다. 명소라는 곳은 우선 맛있지만 비싸고, 예약을 해야 하거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저번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던 선배는 나름 미슐랭 가이드에서 극찬하는 곳을 예약했지만, 가격에 눈물짓고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음식, 그걸 먹는 게 유럽을 맛보는 것일텐데. 우리는 깨끗하고 편한 곳만 찾아다니느라 어쩌면 겉핥기로 유럽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레스토랑은 대부분 음식을 다른 나라 사람 입맛에 맞춘다. 선배는 사실 그 레스토랑에서 먹은 파스타보다 호텔이 있던 동네 구석 쪽의 초라한 파스타 가게가 더 맘에 들었다고 말했다.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맛도 좋았다고. 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조용히 칼질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며 접시가 서로 부딪치는 곳이 더, 유럽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참 놀라운 것이, 저자는 우리가 슬쩍 지나칠 수 있는 유럽의 다른 음식들까지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인이 갈비찜은 알지만 곱창구이는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갈비찜이라면 넌, 껍데기와 곱창이야. 껍데기와 곱창구이가 얼마나 맛있는데. 저자는 스스럼없이 사람들이 소주 한잔과 기울이며 먹게 되는 안주들을 내밀 것이다. 그 안주들에서는 온기가, 그리고 즐거운 냄새가 풍길 것이다. 빵과 파스타, 햄, 치즈, 마카롱, 수많은 야채들과 젤라토.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직접 가지 않아도 좋고, 직접 가는 사람들에게는 유럽을 좀 더 맛볼 수 있게끔 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이탈리아표 자장면도 배달이 되나요?

 

 

 

 

 

 저자는 볼로냐를 '먹보들의 도시'라고 부르고 있다. 놀리면서도, 은근슬쩍 애정을 보인다. 순대와 비슷한 테린을 소개하고, 메밀부침이 떠오르는 크레이프를 소개한다. 사실 우리가 아는 크레이프는 일본식 크레이프다. 반죽보다 그냥 그 안에 든 게 중요한 것. 홍대입구에서 먹는 크레프가 아마 그 일본식 크레프일 거다. 딸기와 치즈케이크, 온갖 소스. 먹기만 해도 살이 푹푹 찔 것 같다. 하지만 유럽의 크레이프는 다르다. 봉평에서는 메밀부침에 이것저것 속을 넣어 사람들의 배를 든든하게 해준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크레이프가 식사용으로 쓰인다. 봉평에 문학 세미나로 갔을 때 이 메밀전병을 세 번 먹었는데, 그 세 번 다 너무 맛있어서 몸부림을 칠 지경이었다. 아마 유럽의 크레이프도, 아주머니들이 덤덤하게 부쳐주면서 '먹어!'라고 내밀테지만, 그 끝에는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걱정스런 물음이 묻어 있을 것이다.
 또한 볼로냐의 자장면, 탈리아텔레 알 라구가가 있다. 저자는 볼로네즈 스파게티가 여기서 파생된 음식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스파게티처럼 우아하게 면을 후루룩 먹는 게 아니라, 자장면처럼 흡입하듯이 먹는 것. 그리고 내숭을 떠는 게 아니라 배고픈 자의 배를 가득, 듬직하게 채워준다는 것을 말해준다. 라자냐도 마찬가지다. 내가 먹어본 라쟈나는 사실 모 프렌치 부페에서 먹은 게 다다. 라자냐는 왠지 살이 안 찔 것 처럼 생겨서, 먹어도 배가 안 부를 것 같았는데 유럽에서는 다르다. 온갖 기름진 것들을 다 꾹꾹 우겨넣고 겹쳐넣고, 그리고 양심상 고기를 먹다가 상추를 생으로 집어먹듯 라자냐 사이에 시금치를 껴넣는다. 수제비, 만둣국과 비슷한 토르텔리니 인 브로도도 나온다. 저자는 힘든 자신의 몸을 일으켜 주는 수프였다고, 그렇게 말한다. 이 음식들은 모두 이 곳의 사람들이 먹고 자란, 엄마의 음식들이다. 사랑스럽지 않은가. 이들도 살아가고, 숨쉬고, 웃고, 먹고, 떠든다. 저자가 천천히 짚어주는 음식들을 보면서, 우리는 입맛을 다시고,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한테 하나만 물어보자. 이탈리아식 자장면은 배달, 되나? 안 되겠지...

 

 

 

 스팸 한장에 흰밥 뚝딱

 

 

 

 

 우리는 사실 '햄'이나 '소시지'를 그냥, 전세계적으로 똑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보통 먹어야 겠다고 달려드는 건 치즈 아니면 파스타, 혹은 타르트다. 저자는 그런 이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면서도 식사용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식사용이라고. 빵들도 딱히 화려하지 않다. 우리에게 쌀이 밥이라면 유럽 사람들에게는 빵이 밥이다. 밥에 괜한 기교를 부리는 건 솔직히 영양밥으로도 충분하다. 푸알란의 미슈라는 빵이 바로 그 좋은 예시인 듯 싶다. 투박하고 왠지 모르게 끌리는 빵. 우리의 쌀밥처럼. 화려한 장식이나 단호박 크림치즈가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여튼 햄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이전에 친구 덕분에 어떤 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생햄을 먹어본 적이 있다. 그 때 그 쌉쌀한 맛과, 참을 수 없는 누린내라니. 코를 막고 먹었지만 사실 그 맛은 아직도 내 혀 끝에 남아 있다. 저자는 햄 '쿨라텔로'를 소개한다.

 일단 다른 햄과는 달리 첫맛에 좀 톡 쏘는 느낌이 든다. 삭힌 홍어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자연적으로 삭힌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부드러운데 은근히 고소하면서 입안 가득 담백한 풍미가 퍼진다. 조금 단맛도 난다. 30개월은 좀 더 센 맛인데, 신맛이 조금 감돌면서 담백하다. 확실히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햄의 맛, 타고는 미식가는 못 되는지 첫입에 '아, 이 맛이다'라는 황홀한 느낌은 아니다. 외국 사람이 묵은지의 맛을 느끼기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겠지.

 저자는 만약 입에 맞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한번은 꼭 먹어봐도 좋을 음식이라고 말해준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들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송로 버섯도 마찬가지다. 송로 버섯은 사람들이 듣기만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아주 비싼 가격으로, 찔끔 먹어본 적이 있을텐데 송로버섯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해주면서 무조건 맛있다. 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안 맞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다른 나라 음식이고, 묵은지의 맛을 못 느끼는 외국인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해준다. 덕분에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도 한 시름 덜게 된다. '하몬 이베리코'도 저자가 소개하는 햄인데, 스페인의 정취를 담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영화 '하몽하몽' 알아요? 그 '하몽'이...
 그래서 이 책은 다른 미식 관련 책들보다 더 다가가기 쉽고, 얻는 것이 더 많다. 만약 유럽에서 미식 여행을 하려고 해도 돈이 그닥 없고, 힘들다면 책에 실린대로 여행을 해봐도 좋겠다. 물론 비싼 음식들도 있지만, 그만큼 저렴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도 있다. 아니, 좀 더 많은 편이다.

 

 


 고기 반찬이 나는 너무너무너무 좋더라

 

 내가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받은 부분은 바로 '오피치나 델라 비스테카Officina della Bistecca'였다. 세계 최고의 푸주한인 다리오 체키니가 고기의 모든 부위를 다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일주일에 단 한번 열리는 소고기 세미나. 사실 우리 나라에서 세미나라는 말은 학술 분야에서나 쓰인다. 음식이라니. 이들은 음식을 하나의 철학으로 승화시키고, 그 철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식객' 덕분에 음식의 도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게다가 테이블보 위에 엄숙하게 찍힌 말이라니.

 

 속을 비우고 와라. 우리는 조금만 먹을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사실 이 파티 부분을 읽는 동안, 입에서 절로 침이 흘렀다. 특히 판차노 스테이크의 단면을 찍은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살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사실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뭘 먹는다는 게 고역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저도 모르게 소리지르고 먹고 이야기하고 웃게 된다. 파티기 때문이다. 보면서 내내 그 분위기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또 어떻게 음식점을 예약해야 하는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물론 다른 미식가 분들도 책을 펴낼 때 그렇게 쓰겠지마는 왠지 약을 실컷 올린 다음에 '너도 한번 먹어봐'라고 약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 유럽이여. 한입 베어물면, 온갖 맛으로 혀 끝에 스며들.

 

 

 

 

끝나지 않는 성장통을 위하여-'안녕,바다'

 

 

 


 

 어쩌다 보니 플럭서스 뮤지션의 리뷰만 두 편이나 연거푸 쓰게 되었다. 하지만 '윈터플레이'와 '안녕바다', 둘 다 좋은 음반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즐거웠다. 들쑥날쑥한 기온에 기운이 쭉 빠지려는 찰나, '윈터플레이'는 기침을 멎게 해주고 '안녕바다'는 지친 몸을 쭉 일어나게 해줬다. 꼭 약장수라도 된 기분이긴 하지만, 그만큼 플럭서스의 음악들은 매력적이다. 사실 내가 플럭서스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플럭서스의 뮤지션들이 한데 모여 부르는 캐롤과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 그리고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의 유튜브 영상 때문이다. 하와이안 풍의 여유로운 분위기, 발랄한 캐롤, 사실 SM이나 JYP 등, 나름 가수를 배출해 낸다는 소속사들의 가수들이 모여 노래를 부를 때면 그냥 노래를 끄고 얼굴만 봐도 되겠다 싶었다. 사실 댄스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 거다. 게을러서 그런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너무 빠른 템포로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 음악이 좋다. 게다가 이렇게 기온이 더웠다가 갑자기 추워지는 요즘에는 더더욱, 재촉하는 것보다 좀 느긋하게 풀어주는 음악이 좋지 않겠는가.
 '안녕바다'의 보컬은 사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난 뒤로부터 주목하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능숙하게 꺾어주는 목소리나, 애교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비음. 그리고 파격적인 헤어스타일.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에서 나왔을 때도 한눈에 알아봤다. 꼭 '홍당무' 같다. 그런 밴드의 음악을 듣고 있자면 피곤함도, 우울함도 사라진다.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따라 부르고, 즐거워지는 것이다.

 

 

 

 

 


 영원한 피터팬들

 

 '안녕바다'의 멤버들을 보면서, 나는 왜 '피터팬'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새까만 칠판에 끝없이 흰 분필로 별을 그리고, 그려가면서 해답을 찾는 소년의 모습, 소년은 어른이 되기를 꿈꾼다. 어른이란 게 뭘까? 사랑이란 게 뭘까? 어린 청소년의 음악이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궁금해 하고 궁금해 해야 한다. 궁금해 하기를 멈추는 순간, 모두는 성장하기를 멈춘다. '안녕바다'의 멤버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뚱하게 입술을 내밀고 우리를 바라본다. 앨범재킷이 그들의 음악을 나타내는 한 컷이라면, '안녕바다'는 멋진 앨범 재킷을 찍은 셈이다.
 '내 맘이 말을 해', '별 빛이 내린다', 'Soon', 'Beautiful dance',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별'은 이들의 앨범 속 음악을 이루는 소재이자 '희망'을 나타낸다. '별'은 피터팬의 팅커벨, 그리고 그들의 배가 향하는 목적지다. 성장 중인 음악, '안녕바다'의 노래는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나는 사실 어떤 가수든 '1집'에 더 주목하는 편이다. '1집'은 그 가수의 갓 태어난 모습을 아낌없이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로 자라날지 모르는 새싹이기 때문에, 다른 경험이 많은 뮤지션들과 달리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내가 추측할 수 있다는 것-에 더 마음이 두근거린다.
 피터팬들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끝없이 자라나는 피터팬', '안녕바다'의 멤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다 자랄까? 우리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젓는다.
 
 
 작은 별이 되줄래?

 

 

 

 

 

 

 '안녕바다'의 멜로디는 분명 밴드의 음악이다. 밴드의 음악의 기반은 가장 쉽게, 기타로 이뤄진다. 하지만 '안녕바다'는 피아노의 건반음이 주축이 된다. 아니면 살짝의 전자음, 일렉트로닉하면서도 절대 전자음에 주축을 빼앗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그들의 음악, 좀 더 변용된 밴드 음악으로서의 서정성일지도 모른다. 클래지콰이가 플럭서스의 일렉트로니카의 묘미를 보여준다면, '안녕바다'는 밴드 특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욕심을 낸다. 조금 더, 하나만 더. 별을 잡기 위해서.
 조금 아쉬운 점은, 트랙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플롯의 기승전결처럼 잘 맞는 곡들은 좋지만 조금 더 많은 시도를 했다는 걸 보여줬으면 했다. '안녕바다'의 노래가 특히 맘에 들었던 나로서는 더더욱. 다섯곡이 적다고는 할 수 없을테고,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표시일테지만. 어쩌면 나는 그들의 2집을 더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나 외국의 밴드들을 보면 보컬에 힘을 싣기 보다는 멜로디에 힘을 싣는 경우가 많다. 멜로디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디는 어떻게 보면 그림처럼, 언어의 장벽을 쉬이 뛰어넘고 다른 사람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천사의 날개다. '안녕바다'의 음악, 그리고 다른 플럭서스의 뮤지션들의 음악이 다른 해외 뮤지션들에게 소통할 수 있는 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녕, 바다.

 

 

 

 

 '작은 별이 되줄래, 내 어둠이 깊을 수록 넌 더욱 빛날 테니까.' '안녕바다'의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의 주 가사다. '안녕바다'는 멜로디에만 무게를 두는 게 아니다. 가사에도 신경을 쓴다. 가사 덕분에 이 멜로디는 더욱 빛난다. 바다 속에 가라앉을 수록, 우리는 어둠을 본다. 그래서 두려워하지만 안녕바다는 속삭인다. 괜찮아! 바다가 깊을 수록, 너는 더욱 빛날거야. 소년처럼, 그들은 뚱한 표정으로도. 이 세상을 넉넉히 헤쳐나갈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어둠'을 '빛'을 더 빛나게 하는, 단순히 무거운 게 아니라는 것을 전환시키는 힘을 믿는다.
 물론 단순히 낙천적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 또한 고통이 있다. 기나긴 성장통. 'Beautiful dance'는 그 성장통의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를 던져 내 춤에 숨막히게 해 또
 싸늘한 바람이 부는 거리에 혼자뿐이었어

 

                                            -'Beautiful dance' 中, '안녕,바다'-

 

 올드보이에서 나오는 문구가 있다. 웃어라, 세상이 함께 웃을 것이다. 하지만 울 때는, 너 혼자만 울 것이다. 성장통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거리에는 나 혼자 뿐이기에 바람은 더 싸늘해진다. 하지만 안녕바다는 말한다. 괜찮아, 걱정 말라니까. 별로 더 빛날 거라구. 그러니까 우리, 울지만 말고. 안녕, 바다.

 

 

 

2010년 9월 26일 일요일

오늘밤은 당신과 함께-윈터플레이


 리뷰를 신청했을 때,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어떤 케이블 프로그램에서 윈터플레이와 알렉스가 함께 캐롤을 노래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말 좋았다고. 그 때, 알렉스의 목소리에 한창 빠져있던 참이었다. 허나 그 때 캐롤을 듣고, 윈터플레이라는 그룹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윈터(winter)가 들어가는 걸 보니 겨울, 겨울에 캐롤을 부르는 그룹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몇 년 뒤에서야, 윈터플레이라는 그룹이 단지 캐롤만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멋진 뮤지션들이 모인 플럭서스에 속한 그룹이라는 것만으로도, 신뢰감이 저절로 생겼지만, 그 때 여자 보컬의 부드러우면서도 호랑가시나무처럼 딱딱 떨어지는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윈터플레이의 음악은 팝과 재즈가 섞인, 사실 장르라는 경계가 필요없는 음악이다. 단순한 후크송이나 클래식한 게 아니다. 그래서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두 경계에 선 사람은 경계를 무너뜨린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된다. 눈 밑에는 수많은 것들이 고루 잠든다. 어떻게 보면 눈이 가장 평등하게, 모든 걸 덮고 새하얀 백지로 돌리는 것이다. 윈터플레이의 음악은 어디에서든 잘 스며든다. 플럭서스의 뮤지션들의 공통된 장점이기도 하지만, 윈터플레이는 그 중에서도 묘하게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대부분이 영어가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허나 가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친숙하면서도 다정한 멜로디, 그게 바로 윈터플레이의 매력의 원인이다. 우리가 가사를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멜로디를 흘려 보내기 쉽다. 첫키스가 기억에 남듯 멜로디를 처음에 듣는 건 뮤지션의 전반적인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사가 마냥 허튼 것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멜로디를 듣고, 그 다음에 가사를 음미하면서 음악을 몇번씩이고 듣는 거다.

 

 또 하나, 재즈는 대중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강렬한 애드립과 익살스런 멜로디, 씩 웃는 웃음과 즐거운 연주. 허나 지금은 클래식과 재즈가 한 데 묶였을 정도로 고전 장르가 되어버렸다. 윈터플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마저도 슬쩍 넘어가 버린다. 재즈라고 해서 무게를 잡거나 무조건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연인과 와인 한 잔 기울이면서 듣는 게 아니라는 것. 골방에 틀어박혀 외롭게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의 곁에 앉아, 나긋나긋한 허밍으로 들려주는 멜로디가 바로 윈터플레이의 재즈라는 것을.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란 없다. 완전히 새로운 문학도 없다. 예술은 그렇다. 미학자 와이츠는 가족유사성을 통해 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긴다고 말했다. 또렷한 본질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조그만 교집합만으로도, 유사성을 인정받으면서 점점 횡적이고 종적인 넓이를 넓혀가는 것이다. 윈터플레이는 '세월이 가면' 등의 예전 음악을 팝-재즈로 다시 한번 해석한다. 새로운 멜로디를 들으면 사람들은 묘하게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낯익은 멜로디가 재즈로 변했을 때, 그 멜로디의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빅뱅이 힙합으로 바꿔 불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식상하다고 혀를 찼던가, 아니면 좋다고 박수를 쳤던가?

 

 

 

 'Don't know why'는 보컬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와닿는 곡이다. 사실 크리스마스 파티 때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날,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세월이 가면'은 멜로디 전반에 깔린 약간 하와이안 풍의 음색과 함께 지난 명곡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트랙이었다. '투셰모나모'는 재치있는 스냅과 깔끔하게 끊어지는 보컬의 목소리가 꼭 한밤의 카페, 그 곳에서 혼자 들어도 좋을법한 곡이다. 주가 되는 여자보컬의 목소리에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목소리, 그리고 허밍이 점점 깊어만 가는 가을과 겨울의 밤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어쩌면 윈터플레이의 이번 앨범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점점 길어지는 밤을 위해 나온 곡들일런지도 모른다. 밤의 층을 더 깊게 해주면서 그 끝은 아련하고, 아름답게. 끝을 바라지 않는 누군가와의 왈츠처럼. 로맨스의 계절에 부드럽게 스며들 수 있는, 딱 맞는 노래다. Moon over bourbon street도 추천한다. 고풍스러운 음색과 함께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음악. 밤의 거리를 걸으면서 누군가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으면 좋을 법한 노래다. 달빛은 쏟아지고, 당신은...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죽음에 이르는 병

 

 

 

 

 

역사는 영원히 투쟁하고 있는 두 명의 전사의 이미로 표현되는 악무한과는 전혀 무관하다. 진정한 정치가는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상황을] 계산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폐절하는 것이 경제와 기술 발전의 거의 계산 가능한 시점(그것은 인플레이션과 독가스전에 의해 예고되고 있다)까지 완수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불꽃이 다이너마이트에 닿기 전에 타고 있는 도화선을 잘라야 한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中 ‘화재 경보기’-

 

2010년 9월 17일 금요일

My favorite things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저 노래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렸지. 영어라는 이유로 친구와 어눌한 발음을 섞어가면서 불렀던 저 노래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세상이 온통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다면 어떨까. 엄하게 질책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도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청준은 정말 랜덤캐릭터에서도 운수가 좋게 걸리는 대박 캐릭터...혹은 아무리 짜맞춰도 백분의 일 확률로 나오는 고퀄리티 캐릭터. '축제'를 읽었는데 너무 좋고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과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연인' 보러 간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도 사서 읽어야 하는데 어디서 산담? 숭문당에서 사오나... 멀어서 왠지 가다가 병이 도질 듯 하다. 이제 병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쳤다. 사실 아픈 사람들일수록 입을 다문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그 동정의 시선이 너무 힘겨워서. 어제도 세미나에 끝까지 참석하려 들었다. 고등학교 때 그 감기에 걸려서 눈꺼풀이 뜨겁게 내려앉을 때도 억지로 교과서를 읽었다. 사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나중에, 좀 더 약해졌을 때 그냥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나한테 있는 것이라곤 내 몸뚱이 하나 뿐, 내 지식은 사실 쓸모없고 보잘것 없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궤변가, 위선자. 완전히 착하거나 완전히 못되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부럽다. 애매모호한 것만큼 최악의 상황인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 착한 척 한다 말하지만, 우리는 착한 척 해야 한다. 착하다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왜 다들 나쁜 의미로 받아들일까. 우리는 착해져야 하는데.

 

 김진환 식빵집에서 오랜만에 식빵을 사고, 몇덩이 잘라서 990원짜리 자몽과 함께 도서관으로 소풍을 가야 겠다. 천천히 걸어가면 괜찮겠지. 하면서. 세시쯤 와서 밀린 글들을 다 써야 한다. 눈 앞이 깜깜하다.

 

 헤드폰 수리를 어떻게 맡겨야 하나. 크레신 헤드폰이 단선이 되었다. 다른 헤드폰을 사야겠다. 이어폰으로 쓰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지만 난 이어폰을 끼지 못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상황이지 아우슈비츠 당시의 상황이 아니다. 그 당시 상황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대해 그냥 다행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그 상황까지 같이 무시해버리고 있다. 착한 척 손 내밀지 마.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군대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추억들로만 이어져 있는 앨범이 아니다.

 

 난 강정 시인이 약간 나르시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기는 이 사람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2010년 9월 16일 목요일

'땅의 여자'-'도시의 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본격 농촌 다큐멘터리 영화, '땅의 여자'를 보았다. 1년 반 동안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찍은 다큐멘터리인 만큼, 보고 있노라면 점점 영상이 친밀해지는 것을 느낀다. 다큐멘터리란 어떻게 보면 '타자'를 이해하는 한 수단이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인물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땅의 여자'는 '대추나무 사랑 열렸네'도 아니고 '관촌수필'도 아니다. 단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거쳐 이 모든 걸 다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해시키지 못할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계몽'을 꿈꿔서는 안된다. '계몽'을 꿈꾸는 순간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극영화가 되어버린다. 친구는 이 영화가 '농촌으로 오라'는 구호의 영화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줄 알았다. 허나 아니었다. 이 영화는 정도를 잘 지켰다. 더 나아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얕지도 않은 적정의 선을 지킨 내용이었다.

 

 

 

 마술환등에서 튀어나온 여자들

 

 현 20대의 사람들 중 어느 정도는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 '도시의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노인들이 있고 가끔 농활로 가서 고생을 하는 농촌, 사실 이 농촌은 그들에게 귀향해야 할 선험적 고향이 아니라 그냥 '타자'다. 농활을 가도 '잠깐 갔다 오는 게 재미'라고 생각할 뿐,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해한다는 게 단순히 그 곳에 가서 살아야 한다거나 그들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화두는 바로 '농수산물 적정 가격대'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벤야민은 도시를 거대한 마술환등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계몽적인 도시인이 되었다고 하나 사실 물신주의에 빠진 맹신자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이나 부처가 아닌, 물질을 신으로 믿는다. 허나 폴란드 망명국가의 지폐들을 보라. 국가가 사라지는 순간, 그 지폐들은 사라진다. 마술환등의 배터리는 언젠가 꺼지게 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마술환등에 빠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을 마술환등에 빠졌다고 봐야 한다. 물건을 사고 파는 주체라고 여기지만 사실 인간은 취업활동에 스스로를 내보내면서 인간의 존엄성까지 폐지한다. 결국 상품으로 자신을 내보낸다. 허나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촛불집회도 마찬가지다. 집회에 가면 검찰에 잡혀서 직업활동에 영향을 받고 감찰을 받으니 절대로 하면 안된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인다. 좌파 우파를 가르자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 나라 우파는 우파가 아니다. 그냥 불법 점거한 망나니들인 것이다. 진짜 우파라면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지켜야 한다. 품위도 없다. 일명 '모닝구 무스메'를 보라.


 

 

 

 

 이 영화, 영상이라고 부르겠다. 영상에서는 '민주노동당'에 든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운동을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간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농촌에 와서 살아라, 시집와라가 아니라 이들의 존재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시민이 아니다. 농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도시에 가서 집회할 권리가 있다. 허나 톨게이트에서 경찰들이 막는다. 꼭 이주민들을 막는 몸짓과 유사하다. 다른 사람들은 가도 좋지만 당신들은 타자이기 때문에, 불온한 타자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식이다.
 이들은 청와대에 테러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순신 동상의 검을 빼앗으러 가는 게 아니다. 청계천 콘트리트를 깨러 가는 게 아니다. 그냥 시위하러 가는 거다. 시위할 때 전경을 때리려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를 뒤엎으려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를 뒤엎는 건 이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다. 그래서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미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들을 막는다. 마술환등은 이 권위의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을 도로를 점거한 불온세력으로 보지만 이는 단순히 위장에 불과하다. 검찰의 정당화인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어느 당에 소속되어 있는지 찍는 건 삼가했어야 한다. 극으로 꾸미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민노당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저들이 좌파이기 때문에 저럴지도 모른다는 편견에 빠져 버린다.
 물론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편견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땅의 여자'들은 마술환등에서 튀어나와 있다. 그들이 만약 농촌 공동체로서 여러분 농촌으로 오세요! 라고 했다면 그들도 나름대로의 마술환등에 빠져 있는 것이다. 허나 이들은 굳이 오라고 하지 않는다. 농사에 소질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해도 좋고, 오든 말든 자유라고 한다. 그냥 이 영화를 보고, 자신들도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한다. 우리는 무조건 한 대상을 파악해서 우리의 틀로 끌어 들어와 호불호, 혹은 우위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건 폭력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이해는 평생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이해'를 해야 한다. 그 노력을.
 또한 여기서 나오는 '땅의 여자'들은 '도시의 여자'들과 그 세부사항이 다를 뿐, 유형이 비슷하지 않은가. 희주는 맞벌이를 하면서 남편과 갈등을 빚는 아내를, 은주는 시어머니와의 알력 다툼을 벌이는 며느리를, 그리고 선희는 아픈 남편을 두고 정치로 나서면서 그 아픔을 겪는, 어떻게 보면 똑같다. '도시의 여자'들도 알듯이, 여기에는 해답이 없다. '꿈'이 이뤄지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꿈'을 계속 가지고 행하는 것, 그게 '땅의 여자'들이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말이다. '마술환등'에서 빠져나오려면 그 '마술환등'에서 빠져나오려는 꿈을 꿔야 한다.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그게 '땅의 여자'가 영상이 된 이유다.

 

 

 

소풍

 

 '땅의 여자'는 그냥 즐겁게 볼만한 영상은 아니다. 모두들 집중해서 봐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짜증을 낸다. 재미가 없으면 왜 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영화를 보면 좋다. 인셉션도 보면 안된다. 왜냐고? 그 영화는 생각하라고 만든 영화지 멜이 쩐다 이러면서 볼 영화는 아니다. 그러면 스틸컷으로 보면 된다. 영화의 권위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벤야민은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차 도착 같은 단순한 영상이었고, 사람들이 이에 놀라 도망치는 충격 효과가 있었지만. 우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영화는 아주 예리하게 잡아 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거대한 림보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대중들이 보고. 과거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만 예술을 감상할 수 있었다. 허나 영화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영화는 소통하려는 움직임이지 나 졸라 짱셈을 표현하려는 나르시즘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가 소풍을 갈 때 우리는 정신없이 막 즐기지는 않는다. 정신없이 막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깽판을 치다보면 남는 건 경찰서의 호출과 뻐근한 허리밖에 없다. 우리가 소풍을 가는 이유는 휴식을 위해서다. 이 바쁜 세상에서 휴식을 위해, 잊어버리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휴식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순간이다. '땅의 여자'는 소풍을 가듯 보러 가는 게 좋다. 이 영화는 그냥 농촌으로 오라는 권유 영화도 아니고 농촌이 최고라는 영화도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영화는 '농촌'이 단순히 타자로 편입되려는 순간을 부정하고, 전혀 다를 것 없이 여기서도 인간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소풍에서 우리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롤러코스터에 태워 고통스럽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롤러코스터 못 타면 안 타면 된다.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그저 '농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집터로 생각해선 안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의 선택여부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도시>>>>>>농촌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기 때문에, 그 생각, 편견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에서 앤은 소풍을 가고 싶어서 머릴러에게 브로치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한다. 허나 앤은 가지 못한다. 우리는 소풍을 가고 싶다. 허나 소풍을 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생각을 하고 싶을 뿐이다. 허나 편견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소풍을 가고 싶으면 편견의 방식대로 생각한다고 말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결국 소풍을 가지 못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사실 가장 빛났던 순간은 바로 선희의 '꿈'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선희는 그녀를 지지해주던 남편이 죽고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 영상이 영화가 아니라는 것, 온전한 극영화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위로받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포기한다. 집 때문에,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허나 선희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려 한다. 왜 꼭 우리는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가?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온 건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지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시와 수많은 현실들은 우리를 그저 폭풍 속에 휘말리게 해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나아가게 하려 한다. 그러나 이 앞에 무엇이 있는가? 폭풍? 낭떠러지?
 '마지막 휴양지'라는 그림책에서는 고갈된 많은 사람들이 한 휴양지로 와서 휴식을 취하고 새롭게 나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꿈 속, 환상거리가 아니다. '마지막 휴양지'에서 우리는 '휴식'이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재충전이고, 틀린 무언가를 비워내고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선희'는 떠밀리지 않는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로 나아간다. 언젠가는 폭풍도 지쳐 스러질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렇게 소풍을 가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이 말했듯, 후에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게끔. 모든 게 마무리되는 그 순간 웃으면서 갈 수 있기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전문-

 

 


 인간극장만이 오렌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마냥 좋다는 건 아니다. '타자'의 이해로서 한번 보는 게 좋기는 하지만 사실 조금 편집 라인이 지루했다. 서사는 충분히 좋았고 감명깊었으나 영화를 의식한 듯한 교차편집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나레이션이나 자막이 한번 나온다면 조금 진득하게 나오던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 영상을 보고 친구는 '인간극장'을 말했다. 인간극장과 별다를 게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전반부를 조금 줄이고 그 집회에 갈 때 어떻게 막히게 되는지를 늘이는 게 낫다. 정치적 색이 너무 짙은 게 아니냐고? 이 영화는 '타자'의 이해지 좌파 우파 중 뭐가 옳은지 물어보려는 게 아니다.
 정치적으로 치우칠까봐 '인간극장'같은 전반부를 늘였을까? 허나 대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풍을 온 것처럼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이 영상에서 이 장면은 커다란 전환점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선희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절정에 해당하고.
 재닛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에서는 독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한 소녀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향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서사가 나온다. 이 '땅의 여자'도 현재 분류되고 있는 '타자'가 사실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확실히 드러내야 한다. 이 상황은 솔직히 말해서 좀 약했다.
 인간극장과 같은 서정성도 좋다. 허나 인간극장은 너무 꾸몄다는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서정성에 치우치다 보니 약간의 위장도 생겨나는 것이다. '땅의 여자'는 그래선 안된다. 꾸미는 것도 좋겠지만 부부 인터뷰를 할 때 서로 다정하게 밀치고 아웅다웅하고 결국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이, 그 진실이 이 영상을 빛나게 한다. 버스가 막혔을 때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이 영상을 빛나게 한다.
 인간극장만이 해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 다큐멘터리처럼 해학적으로만 나가라는 것도 아니다. '땅의 여자'만의 색깔이 필요하다. 그 색깔을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허탈해진다.
 내 경우에는 농촌과 도시가 반반 섞인 곳에서 살기 때문에 평일에는 도시에 나가서 살다시피하고, 주말에는 밭을 매고 씨앗을 뿌린다. 무도 뽑고 열매도 딴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의 편견은 반반으로 갈린다. 그 편견들을 볼 때마다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느낀다. 이 '땅의 여자'는 풍크툼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틀에 갇혀서, 뻔한 도식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예리하게 그 약점을 찔러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리게 하는 풍크툼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진실, 바로 '농촌'이 '진보하지 못한 곳'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일 뿐이라는 것을.


 

 

 

 

**********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이 '땅의 여자'들이 직접 수확했다는 '밤'을 받고 즐거워했다. 나는 못 받아서 슬퍼했다. 밤 맛있었을텐데. 여튼 잘 되면 다음에 쌀 보내주시겠단다. 사실 이렇게 '나누면 욕 못한다'라고 농담조로 말하지만, 어쩌면 이 영상이 극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몸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우리 이야기야. 우린 진실을 말했어. 우리 마음은 이런데, 너희는 어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밤을 못 받았고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땅의 여자'를 추천하고 싶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Lamp-먹오딧빛으로 물들은 8월의 시정

 

 

 

 

 

 

 

 

 

 이번 8월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색 고운 낙엽과 늦여름의 정취가 묻어나는 저녁을 기대할 법도 하건만, 갑작스런 폭풍 때문에 그마저도 미뤄졌다. 그냥, 여름이었다. 늦여름은 9월에서야 왔다. Lamp의 '8월의 시정'은 '9월의 시정'이 되어버렸다. Lamp의 노력과 목소리가 미뤄진 것이 조금 씁쓸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8월보다 9월이라는 어감이 더 좋지 않은가?
 Lamp의 음악을 들은 건 '사랑의 단상' 앨범에서였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모여진 목소리들, 그 와중에 끼여 있는 Lamp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허나 일본어? 어쩌면 나는 일종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음악에는 언어가 없다. 가사는 단지 조금 더 말하고자 하는, 욕심일 뿐. 사실상 멜로디로 모든 세상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소메야 : 예를 들어 안토니오 카를로스 죠빔은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만, 세계 공통의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자신의 관점, 자신의 리듬감으로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있는 거죠. 거기에 세계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 이런 건 차치하고서라도요.
                                                                               
                                                                                -Lamp, 인터뷰 中-
 
 글을 쓰는 나로서는 그 멜로디로 소통하는 것이 부러웠다. 미술도 그렇다. 오로지 문학만이, 번역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예술과 소통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문학의 약점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약점. 골방에 틀어박혀서,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순간. 허나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에 다리가 놓여지면서, 끝과 끝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났다. 노란 머리의 직녀와 검은 머리의 견우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 소설은 이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보여주려 한다. 음악 또한 가사로 전달하는 것 외에, 이제 전달하려 한다. Lamp의 시정은 단순히 가사로만 이어지는 시정이 아니다. 이제 음표로, 화음으로 시정이 구성된다.
 
 Lamp는 보사노바와 일렉트로니카, 그리고 수많은 음악들을 겹치고 포갠 일본풍의 음악이다. 일본풍이라 하면 왠지 모를 하와이안, 밝고 경쾌하나 동시에 가볍고 몇겹의 멜로디를 겹쳐낸, 어떻게 보면 얇은 천과 천 사이에 오묘하게 띄운 색이 일본풍이라 할 수 있겠다. 허나 일본풍이라고 하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커넥션(접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본와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라, 유럽, 티베트, 중국까지. Lamp의 기타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떠오를 정도로 서정적이며 감정이 풍부하게 넘쳐나고, 플루트는 꼭 새소리처럼 클래식한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다. 퓨전이되, 너무 과하지 않은 퓨전. 너무 심한 퓨전은 오히려 음악에 부담감을 준다. 배탈이 나는 것이다.

 배경에 스며드는 음악, 영화를 찍을 때 유난히 스가 시가오와 Lamp의 음악을 배경음악에 골라 놓곤 했다. Lamp의 음악은 마치 리트머스 종이에 스며드는 요오드처럼 풍경 속에 스며들어 고유한, 너무 튀지 않는 색깔을 낸다. 이야기를 하거나 걸으면서 생각할 때, Lamp의 음악은 당신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흔히 노동요라고 말하는 우리 나라의 가요들은 '빨리' 혹은 '사랑하던가 이별해라'라고 강요하는 반면, Lamp의 음악은 마치 돛단배의 등 뒤를 밀어줄 뿐, 그 진로는 결정하지 않는 산들바람 같다. Lamp의 음악이 우리 나라, 그리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앨범에 참여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다른 비슷한 풍의 음악도 있지 않느냐고? 허나 Lamp의 음악은 너무 앵앵대지도 않고, 너무 우울하게 되지도 않으며 너무 가볍지도 않다.


 그런 만큼 Lamp의 음악은 어느 계절 할 것 없이 다 맞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사람에게든 가만히 스며들어 포근하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조금 낯간지러울 지도 모르겠다. 허나 기타의 스트로크는 너무나도 경쾌하고, 플루트는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가 높이 날아오른다. Lamp의 색은 그러면 무색일까? 아니, 나한테 이 앨범의 색은 수줍은 주홍빛도, 노란빛도 아닌 먹오딧빛이다. Lamp의 음악은 투명하게 모든 상황을 비추면서도 이내 진하게 가라앉아,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숨을 바로 하게 한다. 왜 서정주의 시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서로 소통하려는 두 예술이 만나는 순간 수많은 불꽃놀이들이 터진다. Lamp의 먹오딧빛 하늘 위로 우리는 수많은 우리의 추억들로, 수놓는 것이다. 아름답게.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전문-


  나는 굳이 Lamp의 8월의 시정만 들으라고 추천하지는 않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Lamp의 곡은 바로 雨降る夜の向こう(비 오는 밤의 저편)이다. 특출나게 음악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다. 허나 감성만으로 접근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관심이 간다면 좀 더 공부할 수도 있을 사람들을 위해 리뷰를 이렇게 썼다. Lamp의 음악은 4집 이전에는 투명했고, 그 이후로 점점 깊어져서 먹오딧빛이 되었다. 모든 것을 아른아른하게 비추면서, 자신들의 속내를 깊은 곳부터 우러내는. '8월의 시정'은 애달픈 순간들을 그려낸다. 더운가 하면 추워지는 이 환절기에, 그리고 마지막 수박을 먹는 여름의 옷자락 끝에 우리는 이 음악으로 거리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예감케해주는 계절, 너를 만났다'라는 가사가 맘에 들었다고 말하는 건 과언이 아니다. 배경에 스며들 만한 음악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가사가 우리 나라 가사가 아니라는 것만은 아니다. 일본 가사도 마치 시처럼 조용히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이리와, 안아줄게. 이 세상 끝까지.

 

 미지근한 비가 주위를 다정하게 두드리니
 마지막 계절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Lamp, 8월의 시정 중-

                             


 너울거리는 마지막 계절, 추억의 마지막 계절이다. 이별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만남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이 모든 계절에 시정을 느끼길 바란다. 저물어가는 초록빛 노을 끝에서, 주홍빛 얼굴로 끝없는 감기에 걸려, 시정을 훌쩍거리면서.

 

 

  

 

 

2010년 9월 7일 화요일

우리는 끝없는 백지 위를 달리고 있지

 

 

우리는 끝없는 백지 위를 달리고 있지

그리고 우리가 지나간 그 뒤에는 무언가가 남을거야

겨울이 오고 백지가 또 새하얗게 뒤덮여서 지워지더라도

그 당시에 무언가 남았다는 게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거지

이상적인 소리로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한테 이상 빼면 남은 게 없어

인간과 짐승을 꼭 구분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차이를 대라고 한다면

'이상'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카루스처럼 몇번씩 떨어져도 계속 날아오르려고 하다가 날개에 불붙는 게 바로 인간이 아닐까 싶어

그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가늠할 수도 없고

 

 

 

 

 

 눈물에 대하여

 

                                문태준

 

 

 

 어디서 고부라져 있던 몸인지 모르겠다

 골목을 돌아나오다 덜컥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이

 목하 내 얼굴을 턱 아래까지 쓸어내리는 이 큰 손바닥

 나는 나에게 너는 너에게

 서로서로 차마 무슨 일을 했던가

 시절 없이

 점점 물렁물렁해져

 오늘은 더 두서가 없다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