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일 화요일

평론에 대한 옹호

 

 

 솔직히 나는 어렸을 때 평론을 좋아하질 않았다. 비평 자체를 두려워 했다. 모호한 언어들과 이미지들로 조각조각난, 그리고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패치워크같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책을 사랑했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책도 일종의 평론이다. 그는 그가 느꼈던 모든 예술에 대한 것들, 세상에 대한 것들을 다 이어 붙여 그 장대한 서사를 완성한 것이다.

 

 평론도 하나의 서사였다. 서로 다른 두 서사를 비교하며, 평론은 그 이상을 제시한다. 두 국경이 맞닿아 있는 부분에 서서, 평론은 또 다른 국경을 본다. 나는 그런 평론이 좋다.

 

 혹은, 그 국경에서 보이는 풍경-메마르거나, 풍요롭거나-에서 다른 것을 끌어 내는 것. 어이가 없고 약간 뛰어넘는 감이 있어도 좋다. 재미 있다.

 

 그리고 솔직히 요즘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다. 소설책도, 시집도. 너무 많다는 건 줄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소소하게 하는 불평일 뿐이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아마 읽고 싶게 될 책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죽기 바로 몇시간 전에, 신간이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그 때 정말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고 싶다'가 되겠지.

 

 솔직히 나는 내가 읽은 책에 대한 평론도 읽거니와, 읽지 않은 책의 평론도 읽는 편이다. 이는 그 책의 단면만 볼 수 있는 위험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시간도 단축시킨다. 왠지 스포일러를 제대로 당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부담감은 던다.

 

 물론, 내가 뒤통수 맞은 평론도 몇 있다. 배수아의 '북쪽 거실' 같은 경우에는 대중성에 취합하지 못하며 작가 자신의 골방으로 틀어 박히는...이라고 쓴 평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배수아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니 이전 작품보다 더 성숙해졌고, 원래 소설이란 골방에 틀어박혀 쓰는 외로운 예술이고, 하지만 배수아는 대중들에게 좀 더 자신의 뜻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인훈의 광장을 보면 주인공이 죽기 전에 광장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서도 광장을 찾을 수 없었던 남자. 어떻게 본다면 대중이 상상하는 광장이란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 광장이라고 생각하고 나서 눈을 껌벅거리면, 자기가 처박혀 있는-컴퓨터의 네모난 화면만 하얗게 빛나는-시커먼 골방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아. 당신이 원했던 환상-광장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평론은 광장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많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큐브처럼, 어떤 공간 속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죽음과 삶의 여부가 갈리는 공간. 그게 페이크든, 논픽션이든. 픽션이든 메타 픽션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선택의 여지는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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