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악몽

 

 

 띄어쓰기와 맞춤법, 인용만이 글쓰기의 전부라면 나는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글을 쓰지? 그냥 미친 척하고 꽃꽂고 돌아다니다가 어디 한강 저수지 같은 데에 빠져 죽으면 될텐데. 그러기엔 너무 안 예쁘다. 예쁜 게 중요하다. 전라북도의 낙안읍성은 너무 고즈넉했고 아름다웠다. 남원 쪽으로 가면서 본 호수도 넓고 달콤해 보일 정도로 푸른빛을 띄고 있어서 저 속에 빠져도 아무 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과거를 인용하고, 미래를 인용하고, 현재를 인용한다. 왈츠 스텝처럼 꼼꼼하게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어 써야 하고, 어떤 건 부드럽게 연결해 빙글빙글 돌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다.

 

 사촌 동생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고릴라를 붙잡고 부드럽게, 이 사이로 침을 튀기지 않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법도 아니고, 누군가의 팔을 악 소리가 나도록 꽉 움켜쥔 채 협박의 말을 읊조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능영역 언어, 오지선다의 지옥이다. 어떤 것도 지옥을 빠져 나오는 문이 될 수가 없다. 고등학교 4학년으로 무사히 진학하길 바래. 동생은 아무 꿈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외삼촌이 한 말이다. 외삼촌은 그 애를 토목과에 보내 자신이 하는 일을 시키겠다고 했다. 그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 아이는 이어폰을 낀 채로 오아시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천천히, 물에 젖은 솜처럼 푹 수그리게 된 뒤-나중에 바짝 말라서 엉킨 머리카락처럼 번잡하게 일어나게 된다면 어떨까. 그 아이는. 걱정이 된다.

 

 

 걱정이란 일종의 오지랖, 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가까운 사람 외에는 걱정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걱정이란 자신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일종의 기제라고 생각한다. 방어 기제 중에는 이타주의적 기제가 있고, 이건 성숙된 기제라고들 하는데 자신의 고통을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행동하면서 이겨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의 차가운 외면이 있다면 어떨까. 과연 그 봉사가 봉사로 남을 수 있을까? 기독교의 선교 활동, 예스미들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청준의 걸작은 '벌레 이야기'다. 단 몇 페이지도 안 되는, 몇줄도 안 되는 글로 이청준은 파국의 벌어진 틈을 펜대로 헤집어서 썩어 문드러져 푸른빛으로 변한 살결과, 움찔거리면서 기어나오는-통통하게 살이 오른 흰 굼벵이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그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걸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 비극은 더 잔인하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죽음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죽음에 다가가지 못한다. 자살을 밥먹듯이 예고하는 사람들 중에 자살하는 사람은 몇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방치해 둘 일은 아니다. 그 방치가 우물쭈물하고 있던 사람의 등을 밀어, 둥그런 원 안으로 밀어넣기 십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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