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의 세계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일본에 어학연수차 갔다온 내 친구는 일본 거리에 '인셉션' 광고가 지천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이 나라도 그랬지. 마침 친구와 함께 '인셉션'을 보고 나왔던 참이었다. 둘 다 꿈에서 덜 깬 듯이 비틀거리면서 앉아 있을만한 카페를 찾아 명동 거리를 헤매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중에도, 평소에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후닥닥 나가버렸을 사람들이 정지 버튼이라도 눌렸는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원래 크레딧까지 보는 성격이다 보니 그대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그대로 앉아 있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꼭 크레딧이 끝나고, 무언가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나올 것만 같았다.
요즘 들어 A-특공대, 엑스페리먼트 등 주인공 외에 조연들이 여럿 나오는 영화가 많아졌다. '인셉션'도 그 중 하나다. 보통 등장인물이 많으면 등장인물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플롯을 고르게, 어느 인물 하나 묻히지 않도록 신경쓰는 게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인물성이 플롯보다 더 도드라지게 된다. '트랜스포머'와 '트랜스포머2'를 보면서 든 생각이 그랬다. 플롯의 개연성보다는 인물을 부각시키는 데에 주를 둔 작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플롯'보다 '캐릭터'를 보러 극장에 가게 된다. '플롯' 때문이라면 조그만 화면이라도 괜찮지 않겠냐는 관객들 덕에, 영화들은 이제 인물의 특성에 주를 둔 작품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영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허나 어느 정도의 '플롯'이 없다면 말 그대로 망한다. '플롯'을 무시하고 캐릭터에만 중점을 둔다면, 심형래의 '디 워'같은 수작이 나온다. 플롯을 포기했더니 캐릭터도 망한 것이다. 플롯은 한 인물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인물이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나오고 소설이 나온다. '인셉션'은 어떨까. 몇몇 사람들은 '설정'에 비해 깊이가 없다고 투덜댔고, 'CG'에 업어간 블록버스터, 그리고 '인물성'은 여럿 있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입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플롯과 인물을 어느 정도 균형있게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깊이'가 없다고 말할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다크나이트'를 본 사람들은, 인상깊은 장면을 말하라고 하면 제각기 말하는 장면은 다르나 대부분 자신있게 답한다. 이는 주관성이 개입되어도 관객 각각에게 나름 '핵'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인셉션'은 어떤가? 사실 나는 '인셉션'에서 인상깊은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플롯과 미장센이 맞아 떨어지면서 묘한 감동을 자아내는 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처해질 것 같다. 컷에서 불러내는 놀라움은 감동이 아니고, 인물들이 서로 부닥치는 장면에서는 즐거웠으나 그마저도 감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 ...없는 자 돌을 던져라
하지만 우리는, 차마 이 '인셉션'이 졸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돈을 많이 들였다던가 감독이 유명하다는 것을 떠나서, 놀란의 세상은 우리를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든 그럴 수 있다고? 그렇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모두들 왜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을까. '나는 앉아 있지 않았다'고는 해도, 계속 엔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찾아보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본 사람이라면 '중독'이라는 단어에, 떨떠름하게나마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중독'은 우리가 자면서 꾸게 되는 꿈, 돈을 얼마 들이거나 공부를 하지 않아도 꿀 수 있는 '꿈'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중독'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 이는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의 단점으로 쉬이 치부될 수도 있으나 실은 '꿈'이라는 그 소재부터가 아무리 깊어도 그 깊이에 다다르지 못하는, 무한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는 '놀란'의 거대한 꿈이다. 꿈에 대해 온전히, 수많은 이들을 잠재운 작품은 연극 무대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지만, '인셉션'은 가상도 아니다. 거대한 꿈인 것이다. 우리가 그 위력을 알고, 추출자의 존재를 두려워 하게 되는 '꿈'. '깊이'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한없이 불안해한다. 놀란이 우리도 모르는 새에 우리의 꿈속에 '씨앗'을 뿌려두었을까봐. 그리고 그 '씨앗'이 움터서, 무엇으로 자랄 지 모르니까.
이 영화가 인터넷에서 한참 논란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엔딩' 때문이다. '엔딩'은 또한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 '이게 과연 꿈일까?'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타인의 의견을 무시한다. 아이들의 나이까지 대조하고 반지를 보여주면서 세세하게 논한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이 의문을 느낀 나는 어떨까. 어느 쪽도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답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감독이 입을 열어 제대로 말하기 전까진, 공식적 엔딩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공식적 엔딩이 나온 순간 이 거대한 '인셉션'의 꿈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꺼져 버리고 만다. 이는 시를 쓴 시인이 입을 열어 제 시를 스스로 해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떻게 보면 명쾌한 답이지만, 세상은 명쾌한 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저마다의 답을 내놓으면서도, 무의식 중에 답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망설이는 순간을 지지한다. 놀란의 '인셉션'은 바벨탑과 같다. 수많은 가설들을 쌓아 올려 꼭대기까지, 진실에 와닿으려고 하지만 사실 진실은 없다. 꿈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화살을 감독에게 돌린다. '노력하면 다 된다'는 선진국의 우민 논리가 부딪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허나 솔직하게 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매 순간마다 명쾌한 답을 내놓았던가? 우리의 꿈은, 얼마나 믿을만 했던가?
마그리트의 세계
꿈이란, 당신을 잠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우려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는 꿈의 이미지를 거부했다. '초현실주의'니까 꿈에 관대하지 않을까? 라고, 피상적인 물음으로 다가가선 안된다. 마그리트는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을 거부했다. '꿈의 이미지'를 내세워 사람들은 2차 대전을 한낱 환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묻힌 수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잠들기를 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와 프리모 레비의 저작들을 보면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를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다. 우리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유태인들을 유태인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다르다. 그들은 돌아온 직후 제대로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눈을 감으면 수용소의 끔찍한 악몽이 찾아든다. 결국 사람들은 영원히 잠들거나, 영원히 잠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인셉션'에서 유서프의 지하실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라. 노인은 코브에게 말한다. 그들은 꿈을 꾸기 위해 잠든 게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든 것이라고. 그들에게 우리가 보는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다. 노인의 말에 코브는 차마 대꾸를 하지 못한다. 이는 코브와 멜이 다투었던, 그리고 서로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던 말이기 때문이다.
1차, 2차, 3차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꿈은 더더욱 혼란스러워 진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 림보 속으로 치닫는 걸음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 '림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허나 코브는 다르다. 그는 림보에 빠져본 적이 있기 때문에, 림보의 유혹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아내가 죽은 현실로 돌아가는 게 코브에게 과연 구원이 될 수 있는가. 필리파와 제임스는 그의 구원이 되어줄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마저도 꿈이면 어쩌냔 말인가.
사이토의 꿈 속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사이토를 속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사이토는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꿈은 이렇게, 가짜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진실'을 역력하게 깨닫게끔 한다. '꿈'은 그들이 다룰 수 없는, 거대한 고래같은 존재다. 고래의 위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딛다가도, 언제 고래가 제 몸을 뒤집거나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갈 지 몰라 불안해한다. '가짜'를 겪으면 겪을 수록,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코브는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아리아드네에게 요구한다. 절대로, 기억을 꿈 속에 섞지 말라고. 그와 멜의 파국은 그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허나 어떻게 보면 코브와 멜은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꿈에 발을 디뎠고, 꿈은 너무나도 황홀하고 새로운 '현실'이었다. 피셔에게 '인셉션'이 성공했는지 성공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일종의 씨앗 심기로, 이제 어떻게 자라날 지는 피셔의 마음에 달렸다. '현실'을 심는 것, 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발을 디디는 것도 '꿈'이기에 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코브는 자신이 '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허나 그 '꿈'은 오히려 코브를 삼킨다.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마그리트의 세계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와는 피상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허나 우리는 마그리트의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 그 순간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꿈' 또한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왜 스크루지 영감이 꿈에서 깨어나 그 꿈의 영향을 받아 행동했는지 기억해보라. 사실 나는 그 순간마저도 꿈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루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가 다시 되살아나 착한 일을 했던 건 다 꿈이었던 것이다. 죽기 직전의, 빠르게 지나가는 환상. 우리는 그 꿈을 꿈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진실' 같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도, '진실' 같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브이 포 메타포
정말 놀란의 세계다. '인셉션'에서는 수많은 메타포들이 나온다. 겹겹이 겹쳐진 이 메타포들은, 놀란이 오랫동안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자라나면서 축적해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모은 조각, 그 완성은 '꿈'이었다. 우선 사람들이 가장 쉽게 발견해 낸 아리아드네와 미로의 메타포를 보자. 코브는 아리아드네를 만났을 때 테스트 겸으로 미로를 그리게 한다. 이는 어렸을 때 책 좀 읽는다 하면 읽어봤을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아리아드네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도 아리아드네라니.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패를 줘서 미로에서 괴물 미노스를 해치우고 나오게 한 공주다. 그리고 미노스는 사실 그녀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게끔 하는 여인. 아름답고 가녀리지만 그 꿈은 드넓고 무서운 존재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한번 신화에 꿰맞춰 보자. 아리아드네의 테세우스는 누구인가? 테세우스는 미노스를 무찌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리아드네 덕분에 살아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테세우스를 '코브'에, 미노스를 '멜'에 맞춰 본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멜'은 '코브'의 꿈에 갇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코브'가 해방된 것이 아니라 '멜'이 해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노스는? 코브다. 코브는 살아 있는 인간이고, 그의 림보는 한없이 깊다. 멜은 그의 림보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한다. '멜'은 무의식에서 죽지만, 이는 곧 정신적 해방을 의미한다. 코브는 '멜'이 무의식 중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꿈에 들어갔다. 테세우스-미노스의 존재는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들이다. 미노스가 없다면 영웅 테세우스는 없다. 영웅 테세우스가 없다면 미노스는 해방되지 못한다. 괴물이 아니라 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코브'가 테세우스라면 완전히 해방되어야 할 터인데, 그는 계속 미로를 헤매인다. 현실의 판옵티콘에 영원히 갇힌 건 미노스다. 어떤 게 꿈인지 알지 못하고, 이게 현실인지 차마 확신할 수 없는, 무의식 중에 꿈을 만들어 내는 괴물.
또한 '인셉션'의 기차 장면, 코브가 멜과 함께 선로에 누워서 멜에게 거듭 말하는 그 대사. 당신은 한 기차를 기다리지. 그 기차는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갈거야. 그 기차가 어디로 데려갈지 당신은 확신할 수 없지. 그렇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허나 깨어난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는 그 말은 족쇄가 되어버린다. 멜은 혼자서 죽지 못하고, 코브마저 죽음에 가까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라캉의 '진정한 성관계는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모두들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사랑은 족쇄가 되어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라진다. 무의식 중에 편입한 멜이 바로 그 모순을 보여준다. 실비아 플라스의 '은유'라는 시가, 기차의 행로에 대해, 미묘한 엔딩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다.
난 아홉 음절로 된 수수께끼
코끼리 육중한 집
두개의 덩굴손 위에서 거니는 멜론
오 붉은 과일, 상아, 좋은 재목들!
발효되느라 크게 부풀어 오른 이 빵덩어리
이 두둑한 지갑에서 새로 주조된 돈
난 수단이고 무대이며, 아기밴 암소
난 녹색사과 한 부대를 먹고는
내릴 수 없는 열차에 올라탔어
-실비아 플라스, '은유' 전문-
실비아 플라스는 시인 테드 휴즈를 남편으로 맞았다. 그녀는 재능이 있었지만, 동시에 열등감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 열등감은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테드 휴즈의 곁에서 메아리처럼 증폭되어 플라스를 공격했다. 결국 그녀는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어디론가'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라탔다. 허나 그 열차는 어디로 갈 지 모른다. 이는 영화에서 '킥'할 때 나오는 라 비앙 로즈와 묘하게 엇갈린다. 에디트 피아프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장밋빛 인생을 살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인생은 과연 장미빛이었던가. 또한 엔딩크레딧에서는 음악과 함께 기차 소리가 묘하게 합치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했다.
또한 '토템'이라는 것도 대놓고 메타포를 발라 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템'이란 과거 원시신앙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 토템을 통해 세상을 봤고, 그 토템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는 '인셉션'을 보면서 생각한다. 과연 이 '토템'도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혹시 그 팽이 자체가 꿈이었다면 어떨까? 조그만 조각 하나로 우리는 진실과 꿈을 판단할 수 있는가?
유서프의 지하실은 마치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게 한다. 진실은 지하실에 있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그 순간에 있다. 그 곳에 조용히 잠든 사람들은 '진실', '현실'을 현실로 여기지 못하고 잠든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는 이 시대의 거대한 비유와 같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다. 어디에서? 인터넷, 텔레비전, 가상이 통하는 곳 그 어디에서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그 프로그램 속 인물들이 진짜 사귀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쓴 게시물들이 많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지만, 깨어나지는 못한다. 계속 매여 있다. 장자의 꿈,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을 생각해보라.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였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를 상상계로 치부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상상계 속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 나름대로의 진실을 찾아, 그 돛을 세워야 한다. 폭풍 속에 휘말려 허둥거려봤자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꾸는 꿈 자체가 메타포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만. 폭풍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꿈도, 차가운 설산에 있는 비밀 금고도 다 메타포다. 그 은유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 '꿈'.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비밀스러운 것. 어떤 답도 답이 되지 않는 것.
'기억'이 아니라 '상상력'을 이용해서-라는 코브의 충고는 '상사'를 떠올리게 한다. 전혀 매치될 것 같지 않은, 뜬금없는 존재들의 결합. 타인과 타인 사이의 거리를 좁혀 버리는 '꿈'들. '상상력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말처럼,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갈구한다. 림보는 '상상력'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존재들의 감옥이다. 게다가 그 꿈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모르는 존재라면 더더욱. 코브는 사이토에게 총과 팽이를 보여준다. 더 깊은 림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현실로 깨어날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현대인들의 선택지를 내놓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림보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타인을 이끌고 들어가면 타인의 파괴를 수반하고, 자신 혼자 들어가면 그 혼자만의 외로운 감옥에 처박히는 림보. 당신은 어떤 쪽을 선택하겠는가? '인셉션'은 대놓고 당신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 중에. 그 씨앗을 심어놓는 것 뿐이다. 조그맣고도 거대한 은유의 씨앗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