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31일 화요일

이 책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극한의 협상, 찰나의 설득'의 저자 케빈 더튼은 책 제목만큼이나 자신 또한 설득에 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보면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는 제 3자인 친구가 어떻게 풀었는지, 그 마법같은 순간을 말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나도 당신들처럼 설득을 당한 적이 있다. 이건 그가 말했던 일종의 '눈높이 맞추기', '공감성 획득'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공통 키워드는 '공감성'이다. 우리가 공감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 설득은 다 무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물론, 위협도 있다. 허나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라. 어떻게 범죄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허를 찌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이 사람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경찰이 자살하려던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청하는 방법이 어떤가에 따라 그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표시를 취할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그저 직장인들, 협상을 자주 하는 직장인들에게나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리한 아이들은 어른도 꼼짝 못 하게 만든다. 12월 마지막 날 친구 집에서 열린 송년파티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 친구가 아홉살짜리 아들에게 자러 가라고 하자 아이가 사정했다.
 "엄마, 8시 반밖에 안 됐는데 조금만 더 놀게 해 줘요."
 하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너 밤에 늦게 자면 다음에 어떤지 알잖아. 며칠 동안 피곤하잖아."
그러자 그 아이는 금방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내일 엄마가 자고 있는데 아침 7시부터 뛰어다니면 좋겠어요?"

 

                                                                -극한의 협상, 찰나의 설득 中-

 

 케빈 달튼은 서양인이고, 우리는 동양인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부장적인 권위가 강한 한국인이다. 저런 말을 한다면 아마 백퍼센트 맞지 않을까 싶다. 영국과 미국의 코미디 드라마와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저런 경우로 대본이 짜여져 있다. 묘하게 허를 찌르면서도 사람들에게 너무 불쾌하지 않게 절제를 한다. 사실 절제라고 하기에도 뭣하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의 수위는 높고 다양한 소재들을 마음껏 사용하며, 프로그램들은 성적소수자와 그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비꼬면서 동시에 똑같은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우리 나라가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영국을 보라. 영국은 신사의 나라지만, 그 나라의 SNL이라는 프로그램은 코미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이 나라를 까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개그콘서트나 웃찾사같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 정치인이 개그 프로그램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동혁이형은 너무 직설적이었다. 허나 그 직설적인 게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일종의 의외성이었고 그 의외성에 타격을 받은 정치인들은 저도 모르게 '프로그램'에 시비를 걸게 된 것이다. 찔리는 놈이면 제가 먼저 자수를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젝의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에서 보면 우리는 우선 진지함에 속고 그 다음에는 희극에 찔린다.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를 외칠 때 한여름밤의 꿈속 요정인 퍽은 우리에게 모든 걸 잊어버리고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라고 날카로운 충고를 던진다.

 

 

 

 이 책에서는 그 날카로운 충고를 잊지 않고 말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달콤한 말로 이들이 말하는 대로만 하면 모든 게 다 뜻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지만, 실상 그 책들의 공통된 모토는 다 이거다. 노력해라. 노력하지 말라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이야 말로 읽을만한 책이다. 저자는 자기계발서에 관해서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말한 '설득의 방법' 중 자기계발서의 방침이 있다. 바로 아래로 낮추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는 공감을 하거나 아래로 낮추는 게 우선이다. 읽는 독자에게 이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표지에 박아 보여주고 첫장을 펼치면 그들이 독자들보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책보를 매고 학교에 얼마나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는지. 그리고 자기가 비행청소년이었거나 타락한 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케빈 달튼이 '상사에게 단 한번도 해를 입지 않은 남자'에 대해 서술했던 것 그대로다. 아주 아래에 처박혀서 너보다 못한 벼룩과 빈대와 같은 존재였고, 그래서 당신들은 당연히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건 바로 '사이코패스'에 관한 글이었다. 우리는 보통 사이코패스라 하면 국가에 특정한 관리를 받거나 범죄자로 치닫기 일쑤라고 생각한다. 허나 어떻게 보면 우리가 바라는 신은. 바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고, 흔들리게 한다. 당연히 우리의 믿음은 부서져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쉽게 내버리고 절벽으로 던져버린다. 달튼의 친구 '폴'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저 사람도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이, 어떤 한 방향으로 가는 순간 타인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카드에는 조커가 없다. 허나 저들은 우리의 손에 조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커의 존재조차 모른다.

 

 

 달튼은 그가 '사이코패스'와 직면했을 때, 얼마나 큰 감정의 기복을 느꼈는지 말한다. 이 혐오는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처럼 대치되는 '숭배'와 한 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사람들은 음모론으로 치부하지만 우리는 계속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 묻고 물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이 책의 제목대로 '극한의 협상, 찰나의 설득'은 그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그 속을 예리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선, 그 시선의 획득을 요하는 것이다.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의사가 무슨 말을

 

 

 의사는 나한테 말했다.

 

   발끝부터 3분 요리 패키지에 든 냉동닭처럼 잘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하얗게 식어가는 기분이 어때요?

  

 나는 이게 바로 죽음으로 향하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주변에는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도 있지만 살고 싶어서 버둥거리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노라면 왠지 나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쏘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하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라는 것. 그런데 솔직해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권력자가 아니라 그저 초라하게 서 있는 인간, 짐승과에 속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난 시방 짐승이다. 그냥 이름 붙이고 부르고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성에 차고 그러면서도 계속 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짐승. 아이들은 내가 약간 중2병에 걸렸거나 조증에 걸린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한없이 행복하고 한없이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렸을 때 우리 집안의 모토는 '잘한 것도 없는데 울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타인의 통증에 민감하다. 그 사람이 울고 속상해 하는 게 얼마나 힘들면 울고 속상해할까 싶다. 허나 나는 묘하게도 제 때 울질 못한다. 울고 떼쓰는 아이가 부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이 의외로 이 사회 속에 많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자루

 

                         문태준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봄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家長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러워요 내 몸이 무러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온 영원을 생각하오니

 

(중략)

 

 

 

 

 왜 문태준의 시를 읽다가 저 첫 문구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는 말이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문학적 재능도 없고 묘사력도 없고 있는 건 그저 막장 스토리를 지어내는 것밖에 없으나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을 담든 간에 내 자루는 남에게 꿔온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친구는 나에게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것저것 대답했지만 사실 친구의 말도 내 말도 그저 공기 속에 떠다니는 세포들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다가가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재능을 달라고 했다. 허나 나도 재능이 없다. 그녀에게 줄 재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재능이라곤 그저 뭐 하나 없이 읽어내려가는 것밖에 없다. 그녀에게 한 말마따나 나는 내가 40세 이후로 어떻게 살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예전 무당집 아들은 그런 생각을 하다간 단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단명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수하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파괴욕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쓴다.

 그것밖에 할 수 없으므로.

 그게 나쁜지 안 나쁜지는 나중에 가서 알 일이지만

 그 결과를 보기 두려워해 자살한 이들은 과연 지금쯤 행복할지 아니면 그저 썩어들어갈지

 딕슨 카의 소설처럼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냐고 빈정거리고 있을런지

 

 

 선배 저는 거울같은 사람이예요 선배가 저를 미워하면 저도 선배를 미워하고 선배가 저를 좋아하면 저도 선배를 좋아하고 그래서 저는 선배한테 더이상 줄게 없죠 왜냐하면 받은 선물을 도로 돌려주니까요 그러니까 저한테 대고 백설공주를 죽일 방법을 물어보신다면 그 말밖에 할 게 없어요 죽이라는 그 말밖엔

 

 담은 게 없어서 슬프다. 내 자루에는 아무래도 구멍이 뚫려있는 모양이다. 이자는 점점 쌓이고 쌓여 나는 곧 있으면 사채업자들한테 쫓기는 신세가 될 것 같다. 학교 선배는 뚱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안다. 내 말마따나 나는 거울같은 사람이었다. 호의를 호의로 답했고 적의를 적의로 답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질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를 들어 외동딸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라 했지만 이상하지, 어렸을 적의 나는 다른 사람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붙이고 친구가 되곤 했는데.

 

 언니 왜 눈에 그렇게 떡칠을 해요?

 친절해 보일까봐

 

 금자씨의 두려움을 알게 되고 나니 이제 내 앞에 있는 건 두려운 것들 뿐. 친구야. 쓰지 않고 말하는 건 어떻게 보면 위선이고 슬픈 아리아야. 혼자 부르는 아리아. 그런데 끝에는 도돌이표만 있을 뿐 마침표가 없어. 우린 그냥 써야해. 쳇바퀴의 나사가 헐거워질 때까지.

 

 

 아버지는 내가 정치의 개좆도 모르면서 정치에 관해 논하는 게 어이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사실 저는 정치가 개좆보다 더 싫은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정치없는 세상은 없을까요?

 

 정치라는 의미는 왜 그렇게 변질되어 버린 걸까. 어떻게 보면 정치가 하나의 분야로 나왔을 때부터 더러워지는 게 당연하다는, 그런 관례를 따르게 된 것 같다. 순수한 유니콘의 성처녀는 미아리 고개로 간다.

 

 

2010년 8월 24일 화요일

미안한데 이거 다 거짓말

 

 

 

 연관 검색어에 왜 탑블레이드가 뜨나 했더니 내가 포스팅 제목을 탑블레이드라고 적어 놓은 게...

 선배가 나한테 '제목을 내용과 연관지어서 좀'이라고 했는데 나름 인셉션의 코브 토템이 탑블레이드스러워서 그런 것 뿐인데...끼낑

 구글로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확실히 구글 텍스트 큐브라 그런가...

 구글 검색이 안 되는 티스토리로 옮겨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텍스트큐브라는 어감이 좋아...

 

 

2010년 8월 16일 월요일

탑블레이드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은 주변인이거나 주변인보다도 더 가까운 누군가다. 미워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오히려 대화의 가능성이 숨어 있는 것이고, 미워하는 건 이유가 없다. 그래서 차마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다. 결국 계속 미워하면서도, 지금 미워하는 자신이 정당하지도 않고 뒤틀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미워한다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이유를 찾아내고 갖다 붙인다. 엉망이 된 스크랩북, 일그러진 모자이크. 자신한테 끝끝내 속지 못해 결국 또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그래. 나는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웰컴 투 지젝월드

 

 

 

 감추고 속이고 들춰내고 까발려!

 토할 것 같다 이 놈의 세상!

2010년 8월 14일 토요일

과달루페, 생일 축하해!

 

 

 

 하루 종일 비가 왔다가, 해가 떴다. 언제쯤 이 지루한 도돌이표가 끝날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두워지자 마자 비만 줄창 내리기 시작한다. 휴지 조각처럼 하얗게 번개가 갈라지고, 왠지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서는 우주 전쟁에서 외계인의 등장 때 효과음으로 썼던 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컴퓨터 웹서핑도 하고 하잘것 없는 게임도 해봤지만 전혀 채워지지 않는 것. 결국 나는 책으로 돌아간다. 글을 써야 하는데 지금 이 자세에서는 오래 쓰기도 힘들다. 커다랗고 깨끗하고 넓은 책상과 뻣뻣하고 엄격하게 나를 붙잡을 의자, 그리고 넷북을 꽂을 콘센트가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까다로운 생물이다.

 

 

 

2010년 8월 9일 월요일

트위터 개장

 

 

http://twtkr.com/telmailing

일광욕하는 사람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테드 휴즈 '시작법' 5장을 기반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일광욕’,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미적 장소란 과연 무엇인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영감을 주는 곳? 테드 휴즈는 시의 '풍경'을 '야생'으로 한정짓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근대 회화에는 풍경화가 많다. 왜 풍경화가 많았을까? 화가가 캔버스와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가 풍경에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으며 그 감동을 그대로 녹여내고 싶었던 것이다. 르누아르와 모네가 그렸던 호수의 풍경화에는 그들이 캔버스를 두고 풍경과 마주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발생한 감동이 담겨 있다. 그 감동은 다시 우리 눈앞에서 재생해 낼 수 없다. 그들의 눈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감동을 잡아내기 위해 인상파의 스케치와 같은 회화가 나타났다. 소설 또한 자연주의적인 소설이 나온다. 모든 인간관계의 꽃들은 다 시골과 자연 속에서 피어난다. 테드 휴즈는 '확실히 우리 모두가 전원과 은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차마 풍경이 주는 감동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떤가? 각 나라에서는 산업 혁명에 반하기라도 하듯 자연주의적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나 이는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쪽으로만 나타나진 않았다. 나다니엘 호손의 '블라이드 데일 로맨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지닌 젊은이들을 다룬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가 잘 이어져 나가는가 싶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온 농촌에 젊은이들은 당황하고 손을 내젓기에 바빴다. '풍경'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되는 소설이라곤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유토피아와 개척지를 꿈꾸는 모험 소설, 연애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테드 휴즈가 '야생적'이지 않은, 그래서 영감을 억압하는 도시는 어떤가? 이 당시 테드 휴즈가 있던 영국에서는 문명이 상대적으로 낯선 것이었고, 빈민과 노동자들을 생산해 내는 곳이었다. 제대로 쉴 수 없는 곳, 끊임없이 격식과 유행에 얽매이는 곳. 트루먼 카포티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문명 속, 부르주아지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썼으나 그의 소설로 인해 사교계에서 힘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다른 작가들도 도시에 대해 비정하고 매몰찬 이미지를 강조한다. 허나 현대 소설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된다. 일본 문학 속에서의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색다른 소통이 가능한 곳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삼포 가는 길'에서 주인공은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파괴되고, 그 곳에 있는 건 그가 떠나온 도시 뿐이다. 박성원의 '얼룩'과 대칭되는 '캠핑카를 타고 올란바토르까지'를 보면 주인공 남자가 떠난 누나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시골 구석에서 '얼룩'을 피해 도망친 여자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김사과의 '정오의 산책'에서 나오는 화자는 아무도 없는 '티베트'를 꿈꾼다. 이제는 없는 고향이나 모든 이들이 떠나버리고 그림자만 남은 시골, 혹은 수많은 소설에서 클리셰로 등장한 구원의 장소 '티베트'. 그러나 이 자연들은 이제 다 '뜬금없거나' '비현실적' 장소에 가깝다.

 오히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이제 고향에 또다른 예시가 덧붙여진다. '도시'다.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지나쳤던 도시 속의 의미를 찾아낸다. 김애란의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도시 속에서 맞부딪치는 인연에 대해서 서술하며, 비슷한 예로 박민규의 '갑을 고시원 체류기'에서는 판옵티콘 속의 판옵티콘에 대해 묘사한다. 근대에는 '자연'에서만 모든 진정한 작용들이 일어난다고 봤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서울의 비정한 면모가 드러났다. 현대 문학 속의 서울은, 이제 그 비정한 이미지에서 조금 더 완화된 모습을 보인다. '회색 숲'은 이제 문학의 또 다른 모태가 되는 것이다.

 테드 휴즈가 '풍경'이 시각적인 묘사를 통해 제시된다고 했던 반면, 그가 예시로 든 그의 아내 실비아 플라스의 '워터링 언덕'은 그녀의 개인적 서사와 버무려져 다른 워터링 언덕의 묘사보다 더 처절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소설 속 '풍경'과 가장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소설 속 풍경은 플롯이 없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플롯은 주로 화자가 이끌어간다. 허나 가장 찾기 쉬운 화자인 1인칭 시점에서, 이제 현대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풍경화를 떠올리게 한다. 풍경화 속에는 인물이 간간이 등장하나, 그 인물들은 풍경 속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인물들이다. 허나 이제 오컴의 면도날처럼, 캔버스 안에 담길만한 가치가 없는 플롯들을 현대 소설들은 냉정히 잘라낸다.

 산업화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는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티베트', 다른 외국에서 구원의 장소를 찾는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나 다른 여러 기행기를 보면 '여기서 나 자신을 찾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곳에서는 진실된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일까? 이는 일종의 배제에 의한, 반대항에 의한 폭력적인 정체성 확립에 가깝다. 이제 현대 문학 속에서는 풍경이 어떻게 드러날까. 궁금할 뿐이다.

 

 

 

+++++

 사실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구원'은 어떻게 장소로 형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는 '북극점'에 대해 말할 때, 캔버스 바깥의 소실점을 들어 비유했다. 어떻게 보면 풍경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절박함을 가지고, 또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테드 휴즈의 '시작법'에서 예시로 '실비아 플라스', 그와 영원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미완의 인생을 본다면 이는 아이러니컬한 대치를 이룬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테드 휴즈는 직접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작법 전반에 걸쳐 보면 그는 일종의 '구원', 자신을 구제해 줄 진리를 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참고로 이 글은 공적으로 사용된 글이니 퍼가거나 도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과제용으로 참고할 만한 퀄리티도 아니예요.


 

2010년 8월 2일 월요일

즐거운 사라

 

 

 

 카페에 나와서 커피 마시고 홍차 마시고 빵 먹고 다 쓴 글에 기뻐하다가도 앞으로 쓸 글에 대해 한탄하고 오늘 내로 읽어야 하는 책에 한없이 두근거리다가 이내 소란스러움에 정신이 팔리는 지금. 즐겁기만 해라. 하지만 이 순간을 너무 넋없이 흘려 버리면 안되겠지. 안 되겠거니.

 

 

글을 정말

 

 

 발로 쓰나

 머리가 아니라 발로 쓰는 느낌이다.

 한 때 레포트 기계로 불렸을 정도로 레포트가 쌓이고 쌓여 하루만에 후닥닥 처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대충 소주제와 간략한 메모만 해놓고 레포트를 써서 내고 써서 내고 했는데 이번 리뷰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인셉션'을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읽어보고 싶었는데 도중에 이상한 생각들이 끼어들어서 교통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1차로 끝내버렸다. 2차로 들어가서 아예 림보에서 뒹굴어야 하는데. 누가 어설픈 1차에서 빠져 나오게 킥좀 해줘!

 정말 다행인 것은 여기에 오는 친구는 내 글에 뭐라고 딱히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매번 아슬아슬하게 피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에? 글의 질에. 글의 퀄리티에. 다른 방문자들도 그렇다. 사실 매번 검색어에 걸리면서 오는 사람들이니 그렇지. 그런데 미안하게도, 글 제목에 따르는 글 내용에는 그들이 찾는 정보가 없다.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가기도 힘들고 글을 쓰기도 힘들다. 파리 꽁무니만 봐도 놀란다. 삭삭 귓가를 스쳐가는 것도 짜증이 나고. 이상하게 글이 절정에 달했다 싶을 때면 파리가 광속으로 귓가를 스쳐지나간다. 결국 쓰려던 것을 놓치고 만다. 동상에 걸려서 덜덜 떨어도 좋으니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이러고선 겨울에는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고 할 생각이지.

 '미사고의 숲'을 읽는 중인데 묘하게 졸리다. 요즘에 소설을 안 읽고 시를 읽어서 그런가. 이게 다 조영남의 '이상론' 때문이다. 그걸 읽고 나니 다른 책을 읽고 싶지 않아졌다. 그만큼 좋았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최악이라서 텍스트를 당분간 거들떠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스티븐 킹은 묘하게 페미니즘 분위기를 풍긴다.

 검은콩차를 어떻게 끓이나 궁금해서 어머니가 콩 삶는 옆에서 기다렸다가 그 끓인 물을 받아마셨는데 정말...교탁 씻은 물맛이 난다. 직접 마셔본 건 아니지만. 무리수 돋는 비유는 하질 맙시다.

 

 

놀란의 세계-크리스토퍼 놀란 '인셉션' 리뷰

 

놀란의 세계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일본에 어학연수차 갔다온 내 친구는 일본 거리에 '인셉션' 광고가 지천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이 나라도 그랬지. 마침 친구와 함께 '인셉션'을 보고 나왔던 참이었다. 둘 다 꿈에서 덜 깬 듯이 비틀거리면서 앉아 있을만한 카페를 찾아 명동 거리를 헤매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중에도, 평소에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후닥닥 나가버렸을 사람들이 정지 버튼이라도 눌렸는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원래 크레딧까지 보는 성격이다 보니 그대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그대로 앉아 있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꼭 크레딧이 끝나고, 무언가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나올 것만 같았다.
 요즘 들어 A-특공대, 엑스페리먼트 등 주인공 외에 조연들이 여럿 나오는 영화가 많아졌다. '인셉션'도 그 중 하나다. 보통 등장인물이 많으면 등장인물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플롯을 고르게, 어느 인물 하나 묻히지 않도록 신경쓰는 게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인물성이 플롯보다 더 도드라지게 된다. '트랜스포머'와 '트랜스포머2'를 보면서 든 생각이 그랬다. 플롯의 개연성보다는 인물을 부각시키는 데에 주를 둔 작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플롯'보다 '캐릭터'를 보러 극장에 가게 된다. '플롯' 때문이라면 조그만 화면이라도 괜찮지 않겠냐는 관객들 덕에, 영화들은 이제 인물의 특성에 주를 둔 작품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영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허나 어느 정도의 '플롯'이 없다면 말 그대로 망한다. '플롯'을 무시하고 캐릭터에만 중점을 둔다면, 심형래의 '디 워'같은 수작이 나온다. 플롯을 포기했더니 캐릭터도 망한 것이다. 플롯은 한 인물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인물이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나오고 소설이 나온다. '인셉션'은 어떨까. 몇몇 사람들은 '설정'에 비해 깊이가 없다고 투덜댔고, 'CG'에 업어간 블록버스터, 그리고 '인물성'은 여럿 있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입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플롯과 인물을 어느 정도 균형있게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깊이'가 없다고 말할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다크나이트'를 본 사람들은, 인상깊은 장면을 말하라고 하면 제각기 말하는 장면은 다르나 대부분 자신있게 답한다. 이는 주관성이 개입되어도 관객 각각에게 나름 '핵'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인셉션'은 어떤가? 사실 나는 '인셉션'에서 인상깊은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플롯과 미장센이 맞아 떨어지면서 묘한 감동을 자아내는 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처해질 것 같다. 컷에서 불러내는 놀라움은 감동이 아니고, 인물들이 서로 부닥치는 장면에서는 즐거웠으나 그마저도 감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 ...없는 자 돌을 던져라


 하지만 우리는, 차마 이 '인셉션'이 졸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돈을 많이 들였다던가 감독이 유명하다는 것을 떠나서, 놀란의 세상은 우리를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든 그럴 수 있다고? 그렇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모두들 왜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을까. '나는 앉아 있지 않았다'고는 해도, 계속 엔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찾아보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본 사람이라면 '중독'이라는 단어에, 떨떠름하게나마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중독'은 우리가 자면서 꾸게 되는 꿈, 돈을 얼마 들이거나 공부를 하지 않아도 꿀 수 있는 '꿈'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중독'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 이는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의 단점으로 쉬이 치부될 수도 있으나 실은 '꿈'이라는 그 소재부터가 아무리 깊어도 그 깊이에 다다르지 못하는, 무한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는 '놀란'의 거대한 꿈이다. 꿈에 대해 온전히, 수많은 이들을 잠재운 작품은 연극 무대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지만, '인셉션'은 가상도 아니다. 거대한 꿈인 것이다. 우리가 그 위력을 알고, 추출자의 존재를 두려워 하게 되는 '꿈'. '깊이'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한없이 불안해한다. 놀란이 우리도 모르는 새에 우리의 꿈속에 '씨앗'을 뿌려두었을까봐. 그리고 그 '씨앗'이 움터서, 무엇으로 자랄 지 모르니까.
 이 영화가 인터넷에서 한참 논란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엔딩' 때문이다. '엔딩'은 또한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 '이게 과연 꿈일까?'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타인의 의견을 무시한다. 아이들의 나이까지 대조하고 반지를 보여주면서 세세하게 논한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이 의문을 느낀 나는 어떨까. 어느 쪽도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답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감독이 입을 열어 제대로 말하기 전까진, 공식적 엔딩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공식적 엔딩이 나온 순간 이 거대한 '인셉션'의 꿈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꺼져 버리고 만다. 이는 시를 쓴 시인이 입을 열어 제 시를 스스로 해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떻게 보면 명쾌한 답이지만, 세상은 명쾌한 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저마다의 답을 내놓으면서도, 무의식 중에 답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망설이는 순간을 지지한다. 놀란의 '인셉션'은 바벨탑과 같다. 수많은 가설들을 쌓아 올려 꼭대기까지, 진실에 와닿으려고 하지만 사실 진실은 없다. 꿈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화살을 감독에게 돌린다. '노력하면 다 된다'는 선진국의 우민 논리가 부딪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허나 솔직하게 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매 순간마다 명쾌한 답을 내놓았던가? 우리의 꿈은, 얼마나 믿을만 했던가?
 
 
 마그리트의 세계

 

꿈이란, 당신을 잠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우려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는 꿈의 이미지를 거부했다. '초현실주의'니까 꿈에 관대하지 않을까? 라고, 피상적인 물음으로 다가가선 안된다. 마그리트는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을 거부했다. '꿈의 이미지'를 내세워 사람들은 2차 대전을 한낱 환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묻힌 수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잠들기를 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와 프리모 레비의 저작들을 보면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를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다. 우리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유태인들을 유태인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다르다. 그들은 돌아온 직후 제대로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눈을 감으면 수용소의 끔찍한 악몽이 찾아든다. 결국 사람들은 영원히 잠들거나, 영원히 잠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인셉션'에서 유서프의 지하실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라. 노인은 코브에게 말한다. 그들은 꿈을 꾸기 위해 잠든 게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든 것이라고. 그들에게 우리가 보는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다. 노인의 말에 코브는 차마 대꾸를 하지 못한다. 이는 코브와 멜이 다투었던, 그리고 서로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던 말이기 때문이다.
 1차, 2차, 3차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꿈은 더더욱 혼란스러워 진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 림보 속으로 치닫는 걸음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 '림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허나 코브는 다르다. 그는 림보에 빠져본 적이 있기 때문에, 림보의 유혹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아내가 죽은 현실로 돌아가는 게 코브에게 과연 구원이 될 수 있는가. 필리파와 제임스는 그의 구원이 되어줄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마저도 꿈이면 어쩌냔 말인가.
 사이토의 꿈 속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사이토를 속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사이토는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꿈은 이렇게, 가짜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진실'을 역력하게 깨닫게끔 한다. '꿈'은 그들이 다룰 수 없는, 거대한 고래같은 존재다. 고래의 위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딛다가도, 언제 고래가 제 몸을 뒤집거나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갈 지 몰라 불안해한다. '가짜'를 겪으면 겪을 수록,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코브는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아리아드네에게 요구한다. 절대로, 기억을 꿈 속에 섞지 말라고. 그와 멜의 파국은 그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허나 어떻게 보면 코브와 멜은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꿈에 발을 디뎠고, 꿈은 너무나도 황홀하고 새로운 '현실'이었다. 피셔에게 '인셉션'이 성공했는지 성공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일종의 씨앗 심기로, 이제 어떻게 자라날 지는 피셔의 마음에 달렸다. '현실'을 심는 것, 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발을 디디는 것도 '꿈'이기에 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코브는 자신이 '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허나 그 '꿈'은 오히려 코브를 삼킨다.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마그리트의 세계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와는 피상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허나 우리는 마그리트의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 그 순간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꿈' 또한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왜 스크루지 영감이 꿈에서 깨어나 그 꿈의 영향을 받아 행동했는지 기억해보라. 사실 나는 그 순간마저도 꿈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루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가 다시 되살아나 착한 일을 했던 건 다 꿈이었던 것이다. 죽기 직전의, 빠르게 지나가는 환상. 우리는 그 꿈을 꿈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진실' 같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도, '진실' 같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브이 포 메타포


 정말 놀란의 세계다. '인셉션'에서는 수많은 메타포들이 나온다. 겹겹이 겹쳐진 이 메타포들은, 놀란이 오랫동안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자라나면서 축적해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모은 조각, 그 완성은 '꿈'이었다. 우선 사람들이 가장 쉽게 발견해 낸 아리아드네와 미로의 메타포를 보자. 코브는 아리아드네를 만났을 때 테스트 겸으로 미로를 그리게 한다. 이는 어렸을 때 책 좀 읽는다 하면 읽어봤을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아리아드네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도 아리아드네라니.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패를 줘서 미로에서 괴물 미노스를 해치우고 나오게 한 공주다. 그리고 미노스는 사실 그녀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게끔 하는 여인. 아름답고 가녀리지만 그 꿈은 드넓고 무서운 존재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한번 신화에 꿰맞춰 보자. 아리아드네의 테세우스는 누구인가? 테세우스는 미노스를 무찌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리아드네 덕분에 살아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테세우스를 '코브'에, 미노스를 '멜'에 맞춰 본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멜'은 '코브'의 꿈에 갇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코브'가 해방된 것이 아니라 '멜'이 해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노스는? 코브다. 코브는 살아 있는 인간이고, 그의 림보는 한없이 깊다. 멜은 그의 림보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한다. '멜'은 무의식에서 죽지만, 이는 곧 정신적 해방을 의미한다. 코브는 '멜'이 무의식 중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꿈에 들어갔다. 테세우스-미노스의 존재는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들이다. 미노스가 없다면 영웅 테세우스는 없다. 영웅 테세우스가 없다면 미노스는 해방되지 못한다. 괴물이 아니라 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코브'가 테세우스라면 완전히 해방되어야 할 터인데, 그는 계속 미로를 헤매인다. 현실의 판옵티콘에 영원히 갇힌 건 미노스다. 어떤 게 꿈인지 알지 못하고, 이게 현실인지 차마 확신할 수 없는, 무의식 중에 꿈을 만들어 내는 괴물.
 또한 '인셉션'의 기차 장면, 코브가 멜과 함께 선로에 누워서 멜에게 거듭 말하는 그 대사. 당신은 한 기차를 기다리지. 그 기차는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갈거야. 그 기차가 어디로 데려갈지 당신은 확신할 수 없지. 그렇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허나 깨어난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는 그 말은 족쇄가 되어버린다. 멜은 혼자서 죽지 못하고, 코브마저 죽음에 가까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라캉의 '진정한 성관계는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모두들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사랑은 족쇄가 되어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라진다. 무의식 중에 편입한 멜이 바로 그 모순을 보여준다. 실비아 플라스의 '은유'라는 시가, 기차의 행로에 대해, 미묘한 엔딩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다.

 

 난 아홉 음절로 된 수수께끼
 코끼리 육중한 집
 두개의 덩굴손 위에서 거니는 멜론
 오 붉은 과일, 상아, 좋은 재목들!
 발효되느라 크게 부풀어 오른 이 빵덩어리
 이 두둑한 지갑에서 새로 주조된 돈
 난 수단이고 무대이며, 아기밴 암소
 난 녹색사과 한 부대를 먹고는
 내릴 수 없는 열차에 올라탔어

                                           -실비아 플라스, '은유' 전문-

 

 실비아 플라스는 시인 테드 휴즈를 남편으로 맞았다. 그녀는 재능이 있었지만, 동시에 열등감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 열등감은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테드 휴즈의 곁에서 메아리처럼 증폭되어 플라스를 공격했다. 결국 그녀는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어디론가'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라탔다. 허나 그 열차는 어디로 갈 지 모른다. 이는 영화에서 '킥'할 때 나오는 라 비앙 로즈와 묘하게 엇갈린다. 에디트 피아프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장밋빛 인생을 살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인생은 과연 장미빛이었던가. 또한 엔딩크레딧에서는 음악과 함께 기차 소리가 묘하게 합치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했다.
 또한 '토템'이라는 것도 대놓고 메타포를 발라 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템'이란 과거 원시신앙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 토템을 통해 세상을 봤고, 그 토템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는 '인셉션'을 보면서 생각한다. 과연 이 '토템'도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혹시 그 팽이 자체가 꿈이었다면 어떨까? 조그만 조각 하나로 우리는 진실과 꿈을 판단할 수 있는가?
 유서프의 지하실은 마치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게 한다. 진실은 지하실에 있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그 순간에 있다. 그 곳에 조용히 잠든 사람들은 '진실', '현실'을 현실로 여기지 못하고 잠든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는 이 시대의 거대한 비유와 같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다. 어디에서? 인터넷, 텔레비전, 가상이 통하는 곳 그 어디에서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그 프로그램 속 인물들이 진짜 사귀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쓴 게시물들이 많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지만, 깨어나지는 못한다. 계속 매여 있다. 장자의 꿈,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을 생각해보라.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였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를 상상계로 치부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상상계 속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 나름대로의 진실을 찾아, 그 돛을 세워야 한다. 폭풍 속에 휘말려 허둥거려봤자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꾸는 꿈 자체가 메타포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만. 폭풍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꿈도, 차가운 설산에 있는 비밀 금고도 다 메타포다. 그 은유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 '꿈'.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비밀스러운 것. 어떤 답도 답이 되지 않는 것.

 

 

 '기억'이 아니라 '상상력'을 이용해서-라는 코브의 충고는 '상사'를 떠올리게 한다. 전혀 매치될 것 같지 않은, 뜬금없는 존재들의 결합. 타인과 타인 사이의 거리를 좁혀 버리는 '꿈'들. '상상력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말처럼,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갈구한다. 림보는 '상상력'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존재들의 감옥이다. 게다가 그 꿈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모르는 존재라면 더더욱. 코브는 사이토에게 총과 팽이를 보여준다. 더 깊은 림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현실로 깨어날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현대인들의 선택지를 내놓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림보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타인을 이끌고 들어가면 타인의 파괴를 수반하고, 자신 혼자 들어가면 그 혼자만의 외로운 감옥에 처박히는 림보. 당신은 어떤 쪽을 선택하겠는가? '인셉션'은 대놓고 당신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 중에. 그 씨앗을 심어놓는 것 뿐이다. 조그맣고도 거대한 은유의 씨앗을.

 

 

 

 

 

2010년 8월 1일 일요일

친구 페니와의 관계에 바치는 서문


 펜은 노동을 하기 위한 도구들 중 가장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모순적인 존재다. 말은 내뱉은 순간 주워 담을 수 없다. 펜으로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아마 수많은 작가들이 그 펜에 달려 있는 무게를 이겨내면서 명작을 써냈으리라. 그러지 못한 작가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차마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쉽다고 한다. 그렇다. 글은 원래 배설된 존재다. 정신과에서는 치료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일기를 쓰게 한다. 평소에 말하지 못했던 것, 그들의 무의식에 잠겨 있는 것 모두를 쓰게 한다. 그로서 우리는 우리가 외면하고 기피해 왔던 정체불명의 무언가와 맞부닥치게 된다. 허나 그건 자신에게만 국한된 배설일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사람들은 급급히 의사소통을 하는 법을 익힌다. 허나 글쓰기=배설로 일컬어졌던, 화장실 구석에서 혼자 틀어박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붙잡혀, 사람들은 제대로 된 작품을 써내지 못한다. 그 손가락을 풀어내는 과정, 그게 어쩌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학에 대해서 배우고 배울수록 알게 되는 것은 글은 쉬이 내뱉을 만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배설의 존재가 되지 못한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말은 잘못 들으면 다 비워내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옆에 갇혀 있는 죄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숟가락으로 딱딱한 암벽을 후벼파는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더 가까운 말이다. 하나 하나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진다. 허나 이상하게도, '라이트'한 소설들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온다. 요즘에는. 왜 그럴까 싶었는데 단순히 내려찍는 것 하나만으로도 글씨를 탄생시킬 수 있는 컴퓨터라는 존재가 태어났다.
 통신문학이 발달하고 유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손으로 쓴 글을 읽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 말대로, 편지들은 사라지고 서류에는 사인 말고는 육필이 없어졌다. 글씨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한다는 예전 말은 이제 다 허사가 되어버렸다. 컴퓨터 안의 글씨체는 한정되어 있고, 그 글씨체들은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타인에게 충분히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아주 쉬운 것으로 치부해버리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정한 의사소통은 줄어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편지에 집착하게 되었다. 친구들의 생일 때마다 어떻게든 편지를 써서 줬다. 편지지가 없다면 선물 귀퉁이에라도. 그 당시에는 고마웠을지도 모르나 그 친구는 나중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대체 이 편지들은 뭐지? 그 친구에게 적으면 세장, 많으면 다섯장의 편지를 쓰곤 했으니 말이다. 편지에는 그 친구에 대한 내 생각과 제대로 와닿을 수 없었던 부분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썼다.

 

 

**************


 '글을 쓰기 위한 펜'이 필요했다. 물론 나도 글을 대부분 컴퓨터로 쓰는 편이다. 손으로 쓰노라면 한시간 동안 써야 할 것을 두시간에 걸쳐 쓰게 된다. 게다가 쓰다가 고치고, 쓰다가 고치고. 결국 제자리걸음만 몇번씩 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위드블로그에서 '파카 벡터 만국기 수성펜'을 받았다.
 마치 만국박람회가 다시 열린다면, 거기에 기념품으로 나올법한 펜을 들고 나는 한참동안 망설였다. 그 이유인즉슨.
 어디가 뚜껑이지?
 누구보다 단호하게 잡아빼야 했다. 돌리면 전부 다 빠졌다. 분해 과정을 리뷰로 써야 하나, 망설이다가 공책을 폈다.
 

 

 


 학교에서 빌려와서 읽고 있던 척 팔라닉의 '질식' 중 맘에 드는 부분을 옮겨 적었다.

 

 "혹시 이런 고대 그리스 여자 알아요?" 페이지가 말한다.

 잃어버린 애인의 윤곽을 그렸다는 여자 말인가요? 알아요. 내가 대답한다.

 "그럼 그녀가 결국 애인을 잊고 벽지를 발명했다는 사실도 알겠네요."

 섬뜩하지만 우리는, 순례자이자 이 시대의 괴짜들인 우리는 이렇게 우리만의 뒤틀린 현실을 바로 세우려고 애쓰는 중이다. 돌과 대혼란으로 세상을 일으키려 애쓰는 것이다.

 무엇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리뷰다운 말을 해보자. 파카 수성펜은 우선 굉장히 부드럽다. 처음에는 살짝 뻑뻑하다 싶었는데, 두 글자쯤 가자 마치 물뱀처럼 종이 위를 거침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매력적이었다. 사실 살짝 졸렸던 참이었는데 잠이 깼다. 참, 글은 못 쓰면서도 필기구에는 민감하다니. 쥘 때 편안하고 쓸데없이 걸리적거리지 않고, 잘 나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까다로운 손이었다. 300원 400원짜리 필기구라도 손에 맞는 걸 골랐다. 아버지 친구분이 선물이라고 주신 만년필은 너무 좋았지만 살짝 걸리는 면이 있었다. 팬시 용품으로 파는 펜들은 너무 날카로웠고, 만년필은 너무 뭉툭했다. 하지만 파카 벡터 수성펜은 조금 미묘했다.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거침없이 흘러나간다.

 

 우리가 쓰는 것에 조금 더 책임을 느끼기 위해서, 펜을 고르는 순간부터 그 펜이 쓰여질 노트까지. 하염없이 뒤적이고 써보면서. 그게 무슨 용도든 간에. 문방구 펜 코너에 비치된 연습장들에 쓰여진 조그만 메모들과 무책임한 선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좋은 펜을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글쓰는 것도 잘 흘러갔으면 좋으련만? 맘에 맞는 필기구 친구를 사귀었으니 좋은 글도 함께 써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